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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가 느껴지지 않아요?”
“네가.”
들려오는 말은 짤막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리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이 제법 충격적이었던 듯이.
…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게르드 내에서는 네가 어디에 있든 간에 알 수 있었는데.”
릴이 미간을 모았다. 내 뺨에 닿아 있던 손이 목소리처럼 파들파들 진동했다.
“지금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네 존재가…….”
“원대하신 카림. 영광의 이그드라실이시여. 말리크께서 이만 들어오시랍니다.”
그때 시종이 집무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뺨에 붙어 있던 손이 스르륵, 힘이 풀린 것처럼 허공을 긁고 밑으로 떨어졌다. 굳게 입을 다문 릴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어 목각인형처럼 삐끄덕삐끄덕, 어색하게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릴의 이상한 모습을 본 말리크는 당연하게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릴?”
“……예?”
그 잠깐 사이, 반쯤 넋이 나간 릴은 멍청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영문을 모를 말리크가 되물었다.
…사실 나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긴 했고. 그게 저렇게 넋이 나갈 일인가?
“왜 그러느냐?”
“아뇨, 아무것도…….”
릴이 손을 꾹 움켜쥐는 게 보였다. 손톱이 희게 질린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짤막한 고통 때문이었을까. 반쯤 풀려 있던 그의 눈이 비로소 이지를 되찾았다. 이어 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것도 프리드린까지요.”
릴을 바라보던 말리크는 부드러운 웃음을 내비쳤다. 이윽고 엄청난 말이 떨어졌다.
“조만간 널 내 후계자로 공표할 생각이다.”
당연하게도 식겁한 릴이 비명을 질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형님!”
“네에?”
우리의 반응을 본 말리크는 쯧, 하고 작게 혀를 찼다. 다만 말리크의 태도는 더없이 강경했다.
“이그드라실도 얻었으니 이만한 기회가 없다.”
“절대, 죽어도 싫습니다.”
“준비하거라.”
“형님, 이러지 마세요. 저와 맞지 않는 자리니 사양하겠습니다.”
“명령이다.”
그 말에 입을 다문 릴은 말리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리크도 입을 다물고 릴을 바라만 보았다. 형제의 묘한 기 싸움이었다.
…권력욕이 없는 왕자라니, 흔한 모습은 아니었다. 말리크가 릴과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살며시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 속삭여야 했다.
“존모하는 말리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이그드라실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릴과 제게는 너무 큰 일이니까요.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의무라고…… 생각해요.”
내 입술을 비집는 음성은 마냥 소심할 뿐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부드럽게 잘 돌려서 말한 것 같았다. 그 광신도와 함께한, 짤막한 화술 수업 시간이 헛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덧붙여 내 간덩이도 적당히…… 아니, 만만치 않게 부은 것 같고.
“그건 릴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말리크는 짐짓 엄하게 내뱉었다.
“틀림없이 잘 해낼 겁니다. 제가 그렇게 키웠습니다. 릴이 그러지 못하겠다면 제가 릴을 잘못 가르쳤다는 거겠지요.”
“이러다가 형님께 아미르가 생기면요?”
릴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비꼬는 것 같기도 한 말이 뒤를 이었다.
“전 조카에게, 이 숙부가 이미 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네게 물려줄 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면 됩니까? 장자로 태어났지만 가질 수 있는 게 없다고요?”
“그게 나쁜 일이더냐?”
말리크는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난 널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구나.”
그에 답답했던 듯, 릴이 자신의 앞머리를 몇 차례고 거칠게 쓸어 넘겼다. 릴은 꽤나 어렵게 말을 골랐다.
“형님께서…… 자꾸 이런 태도를 내보이시니 헛소문까지 도는 것이지 않습니까.”
“헛소문?”
“제가 정말 형님의 친자식일 수도 있다는 거요.”
그 말에는 내가 멈칫거려야 했다. 릴도 알고 있었나?
……물론 모르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긴 하다. 원래 본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은 본인이 가장 빨리 알게 되는 법이니까.
말리크는 그 헛소문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누가 감히 그런 무엄한 소리를 지껄였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꾸했으니까.
“그럼 내가 어머님과 함께 아버님을 배신하고, 부도덕한 관계를 맺었다는 게냐?”
말리크가 릴의 어깨를 툭, 가볍게 때렸다. 역시나 오늘도 애정이 가득한 손짓이었다.
“넌 그런 걸 믿었고?”
“그 소문을 믿고 믿지 않고를 떠나서요.”
말리크를 바라보는 릴은 한순간,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요즘 들어 릴의 여러 얼굴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쩌면 내 경쟁 상대는 말리크일지도 모르겠다. 말리카가 릴을 경쟁 상대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두 분이 이상한 추문에 휩쓸리는 걸 보는 제 심정이 어땠을 거 같습니까? 그것도 저 때문에 퍼진 이야긴데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이야기를 토로하는 것이었겠지만, 말리크는 부드럽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런 릴이 기특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릴.”
“예.”
“정작…… 그 괴소문의 주인공인 어머님과 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데 말이다. 네가 마음고생이 심했다니.”
“저도 주인공이죠. 졸지에 말도 안 되는 불륜의 결산물이 됐으니까요.”
그에 말리크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한순간 말리크가 무척이나 대인배로 보였다. 내가 가발을 벗겼을 때와 다르게.
아니, 그거야말로 화를 낼 일이려나?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한 거니까.
저건……. 그래, 본인이 당당하다면, 하늘에 거리낌이 없다면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소문에 얽힌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기도 하고.
“아버님과 이그드라실께 맹세한다.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거다.”
말리크는 더없이 강경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넌 착실하게 내 뒤를 이을 준비를 하거라.”
“…….”
릴이 입을 다물었다. 나와 릴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씨알조차 먹히지 않을 듯했다.
저, 정말 도망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왕궁에 온 김에 나는 말리카에게 향했다. 어차피 말리크가 저렇게 나선 이상, 말리크를 말릴 수 있는 사람도 말리카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말리크는 말리카를 버릴 생각도 하고 있다지만, 말리카가 정말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냉정하게 버릴 수 있겠어?
말리카도 왕궁 살림에 능숙한 사람이니, 말리크가 함부로 자신을 쳐내지 못하도록 수를 써 둘 터였다. 덧붙여 릴을 경계하지 못하게 해야지.
“아름다운 말리카.”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내 방문이 의외였던 듯, 말리카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하지만 이내 우아한 가면을 쓰고 능숙하게 나를 대했다.
말리카는 손끝으로 허공을 한 차례 쓸었다. 허공을 스치는 손가락 끝마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요, 저번에 말씀드린 일은 생각해 보셨나요?”
선수를 친 말리카는 아름다운 얼굴에 푸근한 미소를 내비쳤다.
저건 내가 처음 데스테리언에 가게 되었던, 그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남편을 좀 팔아먹으라는 소리지.
“오늘은 확답을 들을 수 있겠지요?”
“정말 죄송하지만 그건 제가 들어드릴 수 없는 일이에요.”
빠르고 간결하게 내뱉은 말에 말리카는 아름다운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가 저렇게 대꾸할 건 생각하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내가 저런 말을 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 저렇게 딱 자른 대답이라니.
“하지만 아름다운 말리카.”
내 부름에 말리카의 눈썹이 제법 살벌하게 꿈틀거렸다.
…말리카가 슬슬 화가 나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챈 내 안에서 소심한 시녀 본능이 되살아났다.
“저랑 거, 거, 거…… 거래 하나 하실래요?”
덕분에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아, 정말 못 살아.
울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내 안을 차지했다. 울상을 짓지 않으려고 안면 근육에 힘을 꽉 줘야 했다.
“거래라니요.”
되묻는 말리카의 음성이 한층 낮아져 있어서 더, 내 안의 시녀 본능은 나를 떨게 했다. 저건 ‘너 따위가 감히 나와 거래를 논하느냐?’라는 의미겠지.
“전 말리카께서 간절하게 원하시는 한 가지를 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 대가로 제가 말리카께 내걸 조건은 두 가지예요.”
“하물며 두 가지라.”
내 말을 곱씹은 말리카는 정말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슬쩍 일그러뜨렸다.
…이그드라실이라고 꼬박꼬박 부르긴 해도, 자기 시녀를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지는 않겠지. 가뜩이나 앞길을 막는 방해꾼이 되고 있었으니까.
어쨌건 말리카를 올려다본 나는 심호흡을 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내뱉었다.
“첫 번째로, 다시는 레브아를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내 말에 말리카의 얼굴이 제대로 일그러졌다.
…저,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