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105화 (105/115)

105

“일단 그게 될지, 안 될지를 모르겠는데요…….”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일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확신이 가득했는데, 저건 정말 막연했다. 그러면 못 한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뭐,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는 것도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술 좀 먹고 취하면 갑자기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근데 말리카께서 칼춤을 추신다면……. 어떤 식으로, 무슨 일을 하실까요?”

“글쎄.”

릴은 제법 심각해진 얼굴로 한 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어 음산하게도 중얼거렸다.

“일단 나였으면 가장 먼저 왕적에서 파버릴 건데.”

그 말에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곤두설 것 같았다. 어느덧 나를 지나쳐서 걸어가는 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릴, 그거 알아요?”

“응?”

“가끔 보면 릴이 제일 악당 같아.”

처음 만난 그날, 강도들을 가차 없이 죽여버렸던 것도 그렇고……. 릴과는 절대 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릴은 그대로 자리에 멈추어 서 나를 돌아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내가 뭘?”

“차라리 죽이는 게 자비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에요.”

왕족 족보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겠다는 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벌이었다. 목숨 빼고 모든 걸 빼앗아 가겠다는 뜻이니까. 하다못해 말리크의 손에 죽은 아미르들도 이름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저런 상태를 죽지 못해 살아간다고 말한다.

릴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만큼 말리카와 내가 악연이라는 거지.”

…저런 관계니까 말리크가 레브아의 얘기를 긍정하지 못한 거겠지? 심증에 증인이 생긴다면,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릴이 칼을 들고 말리카에게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말리크께는 아이가 생기면 좋겠고요?”

“이기적이긴 한데 그래. 계승 서열이 바뀌는 사안이니까.”

말리크께 자식이 생긴다면, 그 아이가 계승 서열 일 순위였다. 신전에서 아무리 릴을 내세우려고 애를 써도, 그 아이가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계승 순서가 바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형님의 아이잖아.”

“네?”

“형님이 나를 아낀 것처럼 예뻐해줄 수 있어.”

그 순간 릴의 음성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자기들끼리는 참 우애 좋은 형제구나, 싶었다.

어쩌면 말리카가 릴을 경계하는 이유에 저런 게 들어가는 건 아닐까. 말리크 안에서 자신보다 릴이 우위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덧그려야 했다.

‘조금…… 아니, 많이 씁쓸하네.’

말리크와 말리카는 잉꼬부부로 유명한데, 사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현실은 때로는 무엇보다 잔인한 것 같다.

데스테리언에서의 조식 시간이 생각났다. 말리크는 독 얘기를 꺼냈고 릴이 발끈했었지만, 사실 그건 릴이 아니라 말리카에게 하는 경고이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경계심을 세우지도 말고, 그곳에서 허튼짓을 벌이지 말라는.

…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의미 부여를 하면 한도 끝도 없겠지.

* * *

― 릴.

그렇게 저택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흰 털과 황금빛 눈을 가진 고양이였다. 무척이나 풍성한 털을 지닌 그 고양이는 언젠가 본 듯 익숙했다.

그 고양이를 본 릴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왜 네가 왔어.”

사납게 내뱉으며 그러면서 근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빠득빠득 이를 갈며 한마디, 짤막하게 물었다.

“이시스는.”

― 자고 있다.

무심하게 답한 고양이는 앙칼진 눈으로 나를 한 번 흘겼다. 이어 도도하게 꼬리를 세웠다.

― 잔다고 말해야 할지, 기절한 거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강제로 튕겨낸 게 타격이 컸던 모양이야.

“어…….”

나는 멍청한 목소리로 내뱉어야 했다. 아마도 내가…… 그런 걸 말하는 거겠지?

물론 저 일도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릴이 죽어주겠다고 하니까 나도 순간적으로 발끈했을 뿐이다. 이게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의 힘이라는 건가?

‘어허허, 어허허허…….’

자연스럽게 든 생각에 이상한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어쨌든 고양이를 한 번, 릴을 한 번 바라보던 나는 정리되지 않는 무언가를 입술에 얹어야 했다.

“근데…… 둘이 다른 거였어요?”

물으면서 문뜩 떠올렸다. 신전의 아름드리나무 근처에서도 한 번, 사람 모습을 한 이그드라실의 곁에 이 고양이가 있던 걸 본 적이 있긴 한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처음 이그드라실에 꽃을 피웠을 때 봤었지. 그때 릴은 이 고양이를 보고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라고, 나보고 알아보지 못하냐고 했었는데.

당연히 나는 내 몸을 빼앗은 그 이그드라실과 이 고양이가 같은 거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근데 지금 둘의 대화를 들으면 전혀 다른 존재를 대하듯 표현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응? 뭐가?”

“그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 아니,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해?”

순간 머릿속이 꼬였다. 이걸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는 내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잖아?

나는 이그드라실을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보았지만, 릴은 다른 모습을 보았을 터였다. 그게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신앙심이 병아리 눈곱만큼 존재하는 릴은 목소리만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습을 한 어쩌고…… 라고 설명해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척하면 척이었다. 내가 뭘 묻고 싶어 하는지 눈치로 알아차린 릴은 빠르게 대답했다.

“아, 그 고목에 기생하는 정령은 둘이야.”

― 기생이라니! 역시 사하크의 후손은 싸가지가 없어.

“내가 틀린 말 했나? 기생 맞잖아, 이 축생아.”

…저 축생 소리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릴은 그 사람 형태의 이그드라실에게는 꼬박꼬박 이시스라고 불러줬다는 걸.

하얀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가 하악질을 시작했다. 워낙 예쁘게 생긴 고양이라서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 애초에 이시스를 그 고목에 봉인시켜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건 네 선조다. 그래놓고 기생? 기새애앵?

“그러니까 기생이지. 그 고목이 없으면 못 사는 거 아냐? 아, 아닌가? 이시스는 고목을 불살라버려도 무슨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말하던데.”

……유치한 싸움이 이어졌다.

어쨌든 난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려야 했다. 어허허허, 이걸 왜 이제 알았지?

“둘이라고요……?”

“응. 이시스는 이시스고, 얘는 이시스가 부리는 전령이야.”

―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악질을 하던 고양이가 새침하게 끼어들었다. 놀라운 태세 전환이다.

― 난 이시스가 사하크에게 자신의 힘을 전해주기 위해 분리한 그녀의 일부다. 이시스는 애초에 땅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라 자신이 자리 잡은 곳에서 쉽게 움직일 수 없지만, 내 근본은 물이기에 훨씬 자유롭지.

“그렇대.”

릴은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고양이는 앙칼진 눈으로 릴을 노려보았다.

― 괜찮은 제안을 해볼까 해서 왔는데, 네 녀석에게는 필요 없는 것 같구나.

“그게 뭔데.”

― 필요로 하지 않는 놈에게 입 아프게 뭐 하러 떠들어야 하지?

“반대 아닌가? 뭔지 들어봐야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 알 수 있지.”

당연한 말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어조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그런 말투였다.

저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고양이가, 놀랍게도 고양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저걸 알아본 나도 참 대단하다.

― 잠이 든 이시스가 언제 깨어날지는 나도 모르거든.

“…….”

릴은 잠시 저 말을 곱씹었다. 중의적인 의미라고 생각했던 듯 머잖아 되물었다.

“지금 그거, 네가 이시스를 계속 재워둘 수 있단 말이지?”

― 아마도?

모호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에 릴은 사정없이 고양이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똑바로 말 안 해?”

예쁜 고양이는 가엾게도, 릴의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저, 저거 동물 학대 아니냐고.

― 한 가지 약속해주면 얼마든지 가능해.

“약속? 뭘?”

― 너.

고양이의 새침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네, 네?”

― 이시스의 힘을 돌려줄 수 있다고 했지?

“아마도요.”

― 그러면 됐어.

동물 학대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고양이는 뒷덜미가 잡혀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도리어 할짝, 하고 자신의 앞발까지 핥는 여유를 보여줬다.

분홍빛 혓바닥이 날름거리며 털을 고르는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귀여웠다.

― 정신이 나간 이시스가 너무 제대로 사고를 쳐서. 지금 상태라면 아스가르드에서 그녀를 쫓아낼 거다.

…평이한 어조였지만 그 내용은 평범하지 않은 것 같았다.

― 그러니 난 너희가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이시스를 이대로 재워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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