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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104화 (10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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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이 싫어하는 엄청난 소리였다. 당연하게도 질색팔색한 릴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형님, 왜 자꾸 그러세요. 자꾸 불안한 말씀은 왜 하시는 거고요.”

“만에 하나를 가정한 것뿐이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완전히 질린 얼굴이었다. 릴은 습관처럼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형님께서 자꾸 그러시니 말리카께서 더 절 경계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주 제가 게르드에 있으면 피가 마른다고요. 저 좀 살려주시면 안 됩니까?”

드물게 내뱉는 노골적인 소리였다. 말리크는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내비쳤다.

“릴.”

“예.”

“왜 그렇게 할라를 신경 쓰느냐?”

그 담담한 질문에 릴의 인상이 일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고.

“그건 또 무슨 말씀인데요.”

“릴. 너는 카림이자 아미르다. 하지만 할라는 그저 말리카일 뿐이다.”

…저번에 내게 말했던 것처럼, 여차하면 말리카는 얼마든지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혈연은 끊을 수가 없는 거였다.

말리크를 응시한 릴이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 새에 사라졌다가, 다시 드러난 눈빛은 제법 복잡했다.

이윽고 내뱉은 말에도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형님께서 아끼시는 말리카죠.”

“할라냐, 너냐를 놓고 고르라고 한다면 난 기꺼이 널 택할 거다.”

말리크가 슬쩍 나를 곁눈질했다. 저번에 레브아 얘기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다.

‘저 입 무거워요. 릴에게 아무 소리도 안 했답니다.’

대충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말리크는 온화하게도 입귀를 늘어뜨렸다. 다만 릴은 앞머리를 몇 차례, 더 거칠게 쓸어 넘기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게 무슨……. 왜…….”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이 있는 듯 릴이 말꼬리를 흐렸다. 이어 릴은 나와 말리크를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전 형님과 프리드린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면 프리드린을 고를 건데요?”

“릴!”

나는 순간적으로 비명처럼 그를 불러야 했다. 선의의 거짓말이 뭔지 모르냐고! 진짜로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말리크가 좋다고 대답해야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린 말리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장난스러운 한탄이 뒤를 이었다.

“자식 놈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형님……. 제가 언제부터 형님 자식이 됐습니까?”

“내가 널 자식처럼 키우지 않았느냐?”

반박할 말이 없던 듯 릴이 입을 다물었다. 말리크는 눈을 부드럽게 휜 채, 애틋하게도 한마디 덧붙였다.

“이제 와서 아이가 생긴다고 해도, 내 첫 자식은 언제까지나 너일 텐데.”

말리크의 태도도, 목소리도, 표정도, 심지어 전하는 말까지. 정말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괜히 언니와 내 모습이 생각났다.

언니가 내 기저귀를 갈아줬다고 말하는 것도 저것과 비슷한 소리지 않을까?

다만 그 깊은 애정이 낯부끄러웠던 걸까. 답지 않게 고개를 꺾은 릴의 귀밑이 붉었다. 꽤나 새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면 기겁하시겠어요.”

“그러시겠지. 하지만 네게는 늘 그런 마음이다.”

릴은 어울리지 않는, 살짝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와, 저 뻔뻔한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네.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 보는 표정을 살펴보고 있을 때, 릴은 조심스레 말리크를 불렀다.

“형님.”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만에 하나, 프레이르에서 이그드라실이 사라진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리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잠깐 생각한 말리크는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불살라버리기라도 하려고?”

“아, 물론 그것도 생각하고 있죠.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은데요.”

“마음대로 하거라. 네가 불태우겠다는데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다.”

……말리크는 놀랍게도 선택권을 릴에게 떠넘겨 버렸다. 프레이르를 지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신성에 대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이.

내게 이그드라실이라고 부르며 무릎을 붙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저 발언은…….

……아니, 그러기 싫으니까 저러는 거일지도 모른다. 말리크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예를 갖추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릴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이제 더 이상 비를 못 내리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내가 그래도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냐, 라는 의미가 어렵지 않게 읽혔다. 꽤나 슬픈 질문이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다소 놀란 눈으로 릴을 바라보아야 했다.

‘……오.’

이그드라실이 싫어서 돌려주기 싫다더니. 나름대로 저게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길이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말리크만 릴의 뒤에 든든하게 남아준다면야 무서울 게 없을 테니까.

“치세의 기본은 치수라는 말이 있다는 걸 아느냐?”

릴을 두 눈으로 담은 말리크는 온화하게 읊조렸다. 릴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들어보긴 했죠.”

“네 덕에 편해진 건 사실이나, 그 힘이 없다고 해서 기본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무능력하지는 않은 것 같다. 또한.”

잠시 말을 멈춘 말리크가 숨을 골랐다.

“릴, 신은 사라져도 신앙은 사라지지 않아.”

나조차도 괜히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말이었다.

신은 사라져도 신앙은 사라지지 않는다……. 실체는 사라져도 보이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계속된다.

“다만 난, 이제 신화에 의존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긴 한다.”

저건 굉장히 진취적인 소리였다.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생각이지 않았을까.

심지어 이그드라실을 악신이라고 느낀 나도 저런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릴도 저 발언은 의외였던 듯 의구심 어린 목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받아들이게 해야지. 벌써 반만년이나 의존해 왔으면 충분히 긴 시간이지 않느냐?”

물음에는 물음이 뒤따랐다. 반만년은 길다 못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긴 하지.

“나는 프레이르가 조금 더 먼 곳을 보면 좋겠다.”

사실 이그드라실의 지배를 받는 것과 다를 게 없는 프레이르는…… 아무리 나라가 살기 좋아져도 큰 발전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늘 신이라는 존재와 그를 향한 믿음이 발목을 잡았으니까.

“그게 내 치세하에 이루어지면 더 좋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새삼스럽게도, 말리크는 말리크라고 생각했다. 역시 한 나라의 지배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말리크는 자꾸 릴을 후계자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덕분에 나는 릴이 말리크가 된 모습을, 또 그가 직무 유기를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상상했다.

‘맙소사. 릴이 후계자라니.’

……오천 년이나 존속된 프레이르가 망하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면서 말려야 하는 일이었다.

* * *

“형님이 왜 저러시지?”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에 릴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뭐가요.”

“분명히 말리카를 편 들었었잖아. 오펠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릴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았다. 그때는 면박에 가깝게, 릴을 호되게 꾸짖긴 했었다.

그건 아마…… 집안싸움 안 나게 하려고 그랬던 거겠지. 말리카가 레브아를 아프게 한다는 게 사실이라고 인정하면 릴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저건 정말 칼부림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레브아도 사실을 알면서도 릴에게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 사안이었다.

나는 저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어렵게 속삭여야 했다.

“저,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응?”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혹시 말리크께 병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내게 말씀하셨겠지. 형님께서 안 하셨어도 의원이 가장 먼저 내 앞으로 뛰어왔을걸?”

그건 그랬다. 릴은 노화를 제외한다면 뭐든 치료할 수 있으니까.

“프리드린.”

“네?”

“혹시 욕심이 생겨?”

주어는 없었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건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아뇨? 전혀요.”

릴이 말리크가 된다니, 절대 사양이다. 그날이 오면 도망부터 갈 거라고.

“나 왕궁 시녀 일 년이나 했거든요?”

“그래, 일 년. 오래 했네.”

고작 일 년이긴 하지. 물론 릴과 결혼한 것만 아니라면 아직도 말단 시녀로 일하고 있었을 거다.

“물론 긴 시간은 아니지만 말리카 자리가 얼마나 귀찮고 힘든 곳인지 잘 알아요. 누가 맡겨도 절대 안 해.”

“……흠.”

잠시 한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속삭였다.

“프리드린, 우리 잘 생각해야 할 거 같아.”

“네에? 뭘요?”

“이러다가 우리 형님께 코 꿰일지도 모른다? 코가 안 꿰이려면 형님께 자식이 있어야 하는데.”

릴이 턱으로 흘끗, 우리 뒤에 아찔하게 서 있는 왕궁을 가리켰다.

“말리카가 한바탕 칼춤 추기 더 좋아지는 건 둘째 치자.”

…아마 말리카가 난리를 치면 말리크가 막아주지 않을까? 릴을 첫 번째 자식이라고까지 말씀하시는데.

“일단 이시스에게 힘을 돌려주면 불가능해지는 일이라는 것부터 생각해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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