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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103화 (103/115)

103

검은 어둠이 잔잔하게 내리깔린 밤, 그리고 달아오른 숨소리. 밤의 장막 속에 녹아내렸던 더운 시간들.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에 내 얼굴에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필사적으로 손짓, 발짓하고 있는데 릴의 얼굴에 미소가 돋아났다. 내게는 더없이 사악하게만 보이는 웃음이다.

“어라.”

서서히 움직인 손이 피가 몰린 내 뺨을 어루만졌다. 얼굴이 뜨거워서 그런지 그의 손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울려 퍼지는 음성은 나긋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내가?”

…릴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붙인 채 나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내가 뭘?”

“거, 거절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려고 했죠!”

“아니?”

뻔뻔하기 그지없는 부정이었다.

“그럼요?”

“거절하면 허락해줄 때까지 괴롭힐 생각이었는데.”

순간 릴을 가리키는 내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괴롭힌다는 거나, 죽여버리겠다는 거나 그 말이 그 말이잖아!

“결국…… 결국 같은 말이잖아요!”

내 물음에 릴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봐, 봐! 이것 봐!”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툴툴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너무해. 한 번은 아무것도 없이 죽인다고, 또 한 번은 반지 주면서 괴롭힌대. 나빴어.”

“어쨌든.”

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무릎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난 해달라는 거 해줬다? 내 입은 네가 막았으니까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어.”

“……어?”

생색내는 말에 나는 멍청한 신음 소리를 내야 했다.

“이왕이면 다른 걸로 막아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어지는 짓궂은 소리. 평소였다면 그의 얼굴을 냅다 밀어버리고 봤겠지만, 지금은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애초에 반지 하나 없고, 협박뿐이었던 그 엄청난 청혼 덕에 내 불만은 하늘을 찔렀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인가 했더니. 그에게는 생각도 못 한 곳에서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었다.

다만…….

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뺨이 둥글게 부풀었다.

“그럼 결혼식은요?”

“그건 게르드로 돌아가면 생각해보자.”

저번에도 생각해보자고 하더니.

나는 왼손 약지에 자리 잡은 묵직한 반지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이걸 보니 치르지 못한 결혼식에 대해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나도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가 되고 싶단 말이야. 청혼보다는 저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 깨달았다. 지금 그가 말한 건 결국 긍정의 의미라는 걸.

“해줄 거예요?”

“할 수 있으면.”

“게르드에는 언제 돌아갈 건데요?”

“조만간. 이왕이면 이번 달 내로.”

릴도 나름대로 결심을 내린 모양이었다. 이어 변명처럼 덧붙였다.

“건기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고. 일단 여긴 급한 불만 끄면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건 다른 일인 것 같으니까.”

나는 한 차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해결해야 할 다른 일에 대한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나도 이그드라실에게는 힘을 돌려주겠다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건 바라는 일도 아니지만.

과거의 나로 돌아가면 말리카가 칼춤을 춘다는데 뭐 어떻게 해? 무병장수하고 싶단 말이야.

저런 골치 아픈 문제가 눈앞에 직면하고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뭐, 당장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상황에서 저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던 건 당연하긴 했겠지만.

아마 내 얼굴이 제법 심각하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내 가라앉은 모습을 보기 있기가 거북했던지, 릴은 턱짓으로 내 왼손 약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나저나 마음에 들어?”

“네에……. 정말 비싸 보여요.”

이 반지에 대한 첫인상은 정말 저거였다.

녹색 다이아몬드가 찬란하게도 반짝거렸다. 언니가 이걸 보면 뒤로 넘어가면서 부러워하겠지?

언니의 얼굴을 떠올리자 벌써부터 묘한 행복감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후후후, 난 더 큰 걸로 받았다고!

내 말에 릴이 슬쩍 미간을 모았다.

“……그게 중요한가?”

“아주 중요하죠! 릴, 돈은 아주 소중한 거라고요!”

“그렇게 소중한가?”

경제관념이 저 먼 아스가르드에 박혀 있는 릴이 한 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럴 때 정말, 릴이 왕족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릴은 경제적으로 부족하다는 것과 모자라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테니까.

“그러고 보니 말이야.”

“네?”

“너 품위유지비 준 거 거의 안 썼더라. 기껏해야 신년회 할 때 한 번 쓴 거 말고 없던데.”

릴은 온화한 웃음을 내비쳤다. 눈앞의 나를 귀여워한다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윽고 릴은 내 통통한 뺨을 한 차례, 주욱 잡아당겼다. 그의 손가락에 질질 끌려가던 나는 볼멘소리를 내야 했다.

“흐, 흐지 므요!”

“소중해서 그냥 쌓아만 뒀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겨우 대꾸하던 내 목소리가 저절로 흔들렸다. 돈도 써본 놈이 쓸 줄 안다고, 검소한 아버지 밑에서 살아왔던 나는 도저히 이 큰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거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어디에 쓰다니. 쓸 곳은 넘치는데.”

“그것도 누가 나랑 놀아줘야 쓸 곳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무도회를 열 수는 없잖아요.”

“오, 무도회라. 그것도 제법 괜찮은 생각이야.”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한 말이었지만, 릴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구미가 당겼다.

“정말요?”

“응. 물론 주최하는 사람이 굉장히 귀찮을 수밖에 없다는 큰 단점은 있지.”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니까.

그러고 보니 머잖아 릴의 생일이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내가 다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한순간 당겼던 구미가 싸그리 사그라들었다. 내가 벌써부터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배워야 할 게 참 많다는 거.

“정 쓸 곳이 없으면 보석이라도 사 모아. 네가 아무리 보석보다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아, 아니거든요! 보석이 더 좋아요!”

나는 일단 릴의 말을 끊고 보았다. 보석보다 초콜릿이라니, 꿀꿀거리면서 돌아다녀야 할 것 같잖아!

물론 눈앞에 두 개가 놓여 있으면 초콜릿을 선택할 것 같긴 하다. 먹지도 못하는 예쁜 것을 보는 것보다는, 입이 즐거운 게 당장의 더 큰 기쁨이니까.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가느다래졌다.

“오호. 정말?”

“네! 정말로! 진짜로!”

“그럼 잘됐네. 감정사 하나 고용해서 마음에 드는 걸로 사 모으면 되겠어.”

그래, 그 말대로 게르드로 돌아가면 쌓여 있는 품위 유지비나 적당히 써봐야겠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대화 속에서 묘한 걸 깨달았다. 미래를 말하는 그에게는 죽어줄 생각 따위는 없다는 걸. 이그드라실에게도, 말리카에게도.

* * *

아그리스의 건기가 끝나기 전, 우리는 게르드로 귀환했다. 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한 빠른 선택이었다.

“보아라. 하면 되지 않느냐.”

우리의, 정확하게 말하면 릴의 귀환을 가장 반긴 건 말리크였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귀환한 것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말리크의 명을 어긴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말리크는 진심으로 우리를 반겼다.

입이 귀에 걸린 말리크는 릴의 어깨를 툭툭, 두어 차례 두들기고 보았다. 그 애정 가득한 손짓이 꽤나 보기 좋았다.

“형니임…….”

“왜 그렇게 부르느냐?”

릴은 그런 말리크를 보며 우는 소리를 냈다. 이럴 때에는 릴이 말리크의 동생이긴 하구나, 싶었다.

“저 이번에 혹사 많이 당했습니다.”

“혹사당하라고 보낸 거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 하고 싶지 않은데요.”

“네 잘못이다. 여기서 제대로 일을 했으면 그런 일이 있었겠느냐?”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일을 했으면 아그리스까지 갈 일은 없었지.

“……형님.”

릴은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결혼하라고 노래를 부르셔서 결혼도 했고, 재상을 하라고 협박하셔서 재상도 했습니다.”

…그건 눈을 가늘게 뜬 채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싶은 발언이었다.

이 인간이. 말리크가 결혼하라고 노래 안 불렀으면 나랑 결혼 안 할 생각이었니?

“제가 이제 뭘 더 해야 합니까?”

“릴. 이제 왕족에 남은 아미르는 너뿐이다.”

릴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던 모양인지, 말리크는 진지하게 답했다.

…솔직히 꽤나 아이러니한 소리였다. 형제를 죽여서 없앤 건 말리크니까.

“오늘 내가 잘못된다면 다음 말리크는 너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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