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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102화 (102/115)

102

하지 말라고, 그것만큼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이성은 릴을 말려야 한다고 속삭였지만 감정적으로는 그의 말에 십분 동의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쭈뼛거리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어야 했다.

“……그거 말이에요.”

“응?”

“정말 효과가 있긴 한 걸까요?”

“광신도 입에서 나온 거니까, 아마도?”

이제 하비에르의 대명사는 광신도가 되어버렸구나.

어쨌든 그럴듯하니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어디에선가 월계수를 구해서 품에 안고 있기라도 해야 하나? 그러면 신전으로 끌려가는 일 따위는 없으려나?

‘근데 저건 악령을 퇴치하는 방법 아닌가?’

내가 화가 나서 이그드라실에게 악신이 어쩌고……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정체는 어쨌든 간에 신이었다. 악령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제령이 불가능한 거 아닌가?

엉뚱한 생각을 이어 나가던 나는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내가 큰소리쳐둔 것도 있고.

“하지만 릴, 우리 평범하게 살고 싶잖아요.”

“그건 그거고.”

사납게 대답한 릴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화가 난 걸까. 릴의 손끝이 미묘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마음보다 이시스를 몇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거든?”

“…….”

뭐라고 할 말이 없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응, 그 마음 이해하지. 나도 이그드라실을 몇 대…… 이왕이면 머리에 혹이 날 때까지 쥐어박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프리드린, 진지하게 말하자면.”

“네?”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그거 좋지. 정말 바라던 바야. 아마 평생을 상상하고 꿈꿔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거야.”

어릴 때부터 평범하다고 말할 법한 삶은 살지 못했고, 가뜩이나 요즘 들어 많이 혹사당하기까지 한 릴은 진중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푸른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마 평범해진 삶의 모습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일단 너와 내가 그냥 아미르와 아미라가 된다면.”

잠시 말을 멈춘 릴이 있는 힘껏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그드라실도,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자라고도 불리지 못하게 된다면.

“말리카가 옳다구나, 신나게 칼춤부터 출걸?”

“어…….”

“여러모로 골치 아픈 힘은 맞아. 하지만 결국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냐. 무병장수의 길은 멀기만 하구나.

이번만큼은 나도 ‘말리카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릴의 말이 상당히 일리 있게 들렸으니까.

말리크는 즉위할 때에 형제를 죽이는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을 이제 와서 잇는다고 하며 칼을 빼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박수를 보내지 않을까.

…그러다 나는 문뜩,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일 하나를 떠올렸다.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근데 그건 말리크께서 막아주시지 않을까요?”

“응? 형님이?”

“네. 얼마 전에 만나 뵈었을 때…… 여차하면 말리카를 쫓아내셔서라도 릴을 지키겠다고 하셨거든요.”

입발린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리크가 진심으로 릴을 아끼는 게 느껴지긴 했다. 릴도 말리크를 잘 따르니까 형제 사이가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참 감동인데.”

릴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이윽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게만 되면 소원이 없겠네.”

여기서 차마 말리카 편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나도 이제 현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말리카가 정말로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람과 대립하고 있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지.

여지껏 말리크는 이 상황을 관망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릴과 말리카의 다툼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내게 말을 꺼낸 걸 보면, 앞으로는 릴을 편들어주겠다고 한 게 아닐까? 아마도 레브아 때문에.

“그리고…… 네 말대로 이시스에게 힘을 돌려줄 수 있다고 치자. 아니, 네가 가능하다고 하니까 할 수 있겠지. 이 힘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본능이거든.”

릴의 말이 이어졌다.

광신도 하비에르와 다르게, 신앙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릴에게서 이 설명 못 할 힘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그게 정말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면 이그드라실이 사라지겠지?”

“그렇죠.”

그게 이그드라실의 꿈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그드라실의 존재 여부에 대한 건 나 혼자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형님께서 정하셔야지.”

왕실의 정통성이 달린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여러 이해득실이 걸려 있다는 말에 나는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야 해요?”

“응?”

“자기가 프레이르가 싫어서 도망친다는데 뭘 어떻게 하라고요.”

배신당한 채로 오천 년이나 기다렸다잖아. 나라도 짐 싸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듯했다.

“그걸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적다는 게 문제야.”

릴이 흘끗, 눈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아마도 누가 서 있는 모양이다.

“당장 광신도만 해도 그럴걸?”

“그거야…….”

하비에르가 이그드라실에 미쳐 있는 광신도니까! 라고 대답하려던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하비에르는 자신이 믿고 섬기는 이그드라실의 행동을 직접, 두 눈으로 봤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모든 걸 직접 목격한 사람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고.

그렇다면 정말,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닐 듯했다. 제 발로 떠나가겠다는데 뭐 어쩌겠나 싶기는 하지만.

* * *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 태양이 하늘을 밝힐 즈음이 되어 겨우 잠이 들었다. 다행히 나는 다시 왕실의 중앙 신전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그날 밤만 그런 건 아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이그드라실의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가 없었다.

폭풍전야 같은, 이상한 평화가 흘러갔다.

다만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말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으니까 도리어 불안함이 나를 들쑤셨다.

하루바삐 해결하고 좀 편하게 발 뻗고 자고 싶은데……. 사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힘을 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돌려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그드라실의 말대로 유병단수 하게 되려나?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동그랗게 떠오른 달이 세상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자.”

그 달 아래에 선 릴은 엄지손톱만 한 초록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내게 내밀었다. 백금으로 만든 링까지,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였다.

나는 그 호화스러운 반지를 보며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려야 했다.

“갑자기 이게…… 뭐예요?”

“준다고 했었잖아.”

……언제?

자연스럽게 물어보려던 순간, 오펠에서 징징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악!’

불과 일 년도 안 된 일인데 흑역사처럼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지? 눈이 돌아가서 미쳤었나 봐.’

정말 저 말 외에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그때 뭘 달라고 가서 그렇게 떼를 써댄 거야! 아주 구체적으로 달라고도 했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릴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는 게르드로 돌아가면 선물하려고 했는데, 네가 요 며칠 너무 처져 있길래.”

그건 맞는 말이었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라서, 마냥 불안했으니까.

내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자, 릴이 내 왼손을 맞잡아 왔다. 이어 아무것도 없는 내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사이즈는 신기하게도 딱 맞았다.

묵직한 초록색 다이아몬드가 손가락 위에서 반짝거렸다. 예쁘기도 하지만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말…… 비싸 보인다.

“프리드린.”

나지막한 음성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가 시선을 마주했다. 푸른 눈이 생긋, 한 차례 부드럽게 휘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겉모습은 참 완벽하단 생각을 했다. 정말 왕족이란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이 날 정도로 품위 있고 우아한 외양이었다.

이윽고 릴은 내 앞에 무릎을 붙였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멍청하게 되물어야 했다.

“왜, 왜 이래요? 뭐 하는 거예요?”

릴은 고개를 꺾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곤조곤하니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나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네?”

“결혼하자.”

……어, 어라?

왜인지 모르게 그날의 일이 떠오르는 속삭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순간 그의 입술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이어지는 한마디란.

“거절하면…….”

“그, 그만!”

릴의 말을 끊은 나는 냅다 소리를 질러야 했다. 또, 또 죽여버린다고 하려고! 그것도 야밤에!

……지금이 그 야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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