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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말해 볼래?”
“신화가 모두 진실이라고 가정했을 때에, 태조께서는 이그드라실을 죽인 적이 없단 겁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힘을 그냥 주고받는 모종의 방법이 존재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 아닙니까?”
꽤나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물론 신화가 모두 진실이라고 가정했을 때에.
그 가정은 썩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눈앞에 이렇게, 그 신화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말해 줄 이그드라실이 있잖아?
릴이 다시금 이그드라실을 돌아보았다.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이그드라실이 골똘한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그래…….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구나.”
이윽고 어렵게도 입술이 열렸다. 묵직하게 이어지는 말은 좀 실망스러웠다.
“물론…… 그래, 나야 내 힘이니까. 내가 너희에게 빌려주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너희가 내게 돌려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너희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지는 모르기에.”
결국 가능성의 이야기였다. 이그드라실은 가능한데 나나 릴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알 수 없다는 것.
고개를 꺾은 이그드라실이 릴을 응시했다. 릴의 시선에 비친 내 눈동자에는 미혹이 없었다.
“너는 가능할 것 같으냐?”
“나야 모르지.”
릴은 딱히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정말 묘하게.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마치 캄신을 가라앉혔을 때처럼, 근거가 없음에도 선명하게 드는 확신.
가능한 일이었다. 틀림없이 가능할 것이다. 이그드라실이 내 몸만 돌려준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게 가능하다면, 평화롭게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굳이 이러고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
이윽고 릴은 사나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하지만 내게 가능하다는 걸 묻기 전에 말이야. 거꾸로 네가 찾아가는 것이 가능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지금 반쪽짜리 신이기에, 이 아이가 없으면 그 무엇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아니겠더냐?”
물론…… 그건 그랬지. 이그드라실이 스스로 할 줄 알면 나를 인질로 잡고 협박하고 있을 이유도, 필요도 없지.
자기 일은 좀 스스로 하면 덧나냐고. 응?
…그리고 늘 그렇듯, 맞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한 사람을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꾹 움켜쥔 릴의 주먹이 파르륵 떨렸다. 억지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도 파들파들 진동했다.
어허허, 내가 듣기에도 이렇게 얄미운데 눈앞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오죽하겠나. 차마 내 몸을 가지고 저러고 있으니 쥐어박는 것도 불가능할 뿐.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모로 꺾은 이그드라실이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너희에게서 강제로 빼앗을 수 있다면 이 고생을 하고 있지도 않았겠지.”
“네가 무슨 고생을 한다고? 고생은 프리드린이 하고 있지.”
‘맞아! 고생은 내가 하고 있지!’
몸이 굶어 죽어가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단 말이야! 정신은 멀쩡한데 육체가 죽어가는 걸 느끼다니. 이 악신아, 이게 어떤 고문인지 당신이 알기나 해?
나도 모르게 한 대답에, 내 인상이 일그러지는 기괴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딱히 의미가 있는 대답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그드라실은 착 내리깔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너희 둘, 죽이 참 잘 맞는구나.”
정말 뜬금없는 소리였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던 릴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건 갑자기 뭐라고 하는 거야, 또.”
“나도 사하크와 그럴 때가 있었지.”
과거의 일이라도 떠올리는 걸까. 씁쓸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앎에도 진실이라고 믿고……. 기꺼이 속아주고……. 차마 매정하게 버리고 뒤돌아서지 못하였기에 후회하는 과거가.”
그 목소리를 듣는데 문득, 저러고 있는 이그드라실이 가엾게 느껴졌다면 내가 바보인 걸까. 어쨌든 내게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지만 그 원인 자체가 이그드라실에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좋은 시절은 단 한때뿐인 것을.”
“한때만 좋았다는 건 서로에 대한 신뢰도, 사랑도 고작 그 정도였기 때문이겠지.”
릴답지 않게 지극히…… 이상적인 대꾸였다. 릴을 보는 이그드라실의 시선이 가느다래졌다.
“그러면 너희는 다르다는 거냐?”
“글쎄,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어서 같다 다르다는 차마 말 못 하겠는데.”
…묘하게 사람 속을 긁는 어조였다. 그래, 이래야 릴이지.
이그드라실이 이마를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악신도 기분이 상하는 모양이다.
“일단 나도 이 녀석이 프레이르가 빙하 지대라고 말해도 기꺼이 속아줄 수 있거든? 하지만 네가 좋았다던 그 한때가 내게는 죽을 때까지일 거야. 그게 제일 큰 차이지.”
……어쩐지 발끝이 간지러운 듯한 말이었다. 좋다 싫다 어쩐다 하는 직접적인 말은 없었지만 고백은 고백이니까.
그에 하비에르가 뜨악한 얼굴로 릴을 바라보았다. 턱이 나갈 것처럼 입을 헤 벌린 모습에 릴이 미간을 모았다.
“뭐야. 넌 또 왜 그래?”
“아니…… 원대하신 카림.”
릴을 부르는 하비에르의 이마 위에 식은땀이 삐질,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두 분…… 결혼만 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응?”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카림의 위치에는 조금 더 사려 깊은 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미라께서는…….”
하비에르가 말꼬리를 흐리며 흘끗, 내 껍데기를 살펴보았다.
아니, 내가 뭐 어쨌다고! 물론 내가 사려 깊고 배려 깊고…… 그런 말과는 떨어져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애 같은 거 아닐까.
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속삭였다.
“하비, 지금 나한테 이혼을 종용해?”
“아니, 절대로 그런 건 아닙니다만…….”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하비에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기묘한 행동에 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아무튼…….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전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
저절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뱅뱅 돌려서 말했지만 나와 릴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두고 보자, 저 광신도 자식. 언젠가 다람쥐꼬리로 화끈하게 때려버릴 테다.
* * *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나서, 밤이 깊었을 때였다.
풀벌레 우는 소리 사이로, 힘이 거의 쇠진한 내 육신은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는 이그드라실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있잖아요, 있잖아요.’
“왜 부르느냐.”
‘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을 말이냐?”
갈라진 음성으로 되물은 이그드라실이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나는 조곤조곤 속삭였다.
‘캄신을 가라앉힌 것처럼. 이그드라실께 이 능력을 돌려주는 것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내 말이 속임수처럼 느껴졌던 걸까. 피식, 하고 이그드라실이 입술 밖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허탈했다.
“그런 자신감이 있다면 다행이구나.”
…쓸데없는 자신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확신이란 말이야. 근거는 없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이그드라실을 설득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곧 아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란 말이다! 나는 아플 때에도 하루 이상 굶어본 적이 없다고!
‘저기요, 사하크가 당신의 힘을 빼앗아 갔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실제로도 그랬다.”
‘당신의 힘이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잖아요?’
이그드라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사하크에게도 자유로운 일이었나요?’
“물론…… 그건 아니다.”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사하크도 어떻게든 할 수는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가 당신의 힘을 빼앗고 이 땅에 묶어둔 거 아니에요?’
광신도 하비에르의 말대로, 모종의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할 수 있고요.’
중요한 건 저거.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가야. 그게 어떤 방법이었든 간에.”
부드럽게 대꾸한 이그드라실이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무척이나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난 죽지 않아.”
‘그거야…….’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하크가 나를 한 차례 해한 것일지도 모르지.”
쓰디쓴 목소리였다. 하지만 저 말에서 한 가지 진실을 깨달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기억이 안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