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먹어.”
케이크와 쿠키, 거기다가 흔치 않은 초콜릿까지.
다른 건 몰라도 초콜릿은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저걸 공수해 오는 데에 얼마나 많은 품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단 음식을 보고 있는데 침이 꼴딱꼴딱, 저절로 넘어갔다. 평소였다면 일단 양손 가득 움켜쥐고 우물거리고 봤을 것이다. 디저트는 늘 옳으니까.
다만 그런 내 충실한 욕망과 다르게 몸뚱아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을 눈앞에 둔 허기진 배가 진동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이그드라실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푸석푸석해진 붉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흔들렸다.
……그랬다.
이그드라실이 말한 협박은 내 육신을 가지고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안 먹으면 죽으니까!
릴도 처음 하루 이틀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설마하니 이그드라실이 이따위 수단을 들고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와 릴이 모두 필요한 이그드라실이 선택할 최악의 방법이니까.
어쨌든 그게 사흘이 되고, 나흘이 되니 상황이 심각성을 슬슬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차마 건드릴 수는 없고, 지켜보기만 할 수도 없으니 릴은 미치기 일보 직전인 것만 같았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라는 행동은 정말이지…….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는 잔인함이 돋보이는 일이었다.
‘협박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고?’
괜히 이그드라실이 했던 말을 곱씹게 되는 것이다. 이거, 간단하지만 효과가 참 좋은 방법이었다. 아, 나 정말 안 좋은 거 배웠어. 순수하게 살고 싶었는데!
“하……. 정말이지.”
릴은, 습관처럼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호수 같은 두 눈이 살벌하게도 번뜩였다.
“단식 투쟁이라니. 별수를 다 쓰네, 진짜.”
의자를 끌고 온 릴은 제법 사납게 그곳 위에 걸터앉았다.
어떻게든 이그드라실을 회유하고 협박하려는 것 같았는데……. 그런 그의 모습이 사람을 갈취하는 동네 깡패처럼 느껴진 이유는 왜였을까. 평소의 품위 있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려나.
이그드라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온기 한 점 존재하지 않았다. 제대로 화가 난 릴의,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었다.
“이봐, 이시스. 지금 너 세 살 먹은 아이 같은 건 알고 있어?”
“세 살이면 어떻고, 젖먹이면 어떠하더냐? 애당초 내 목적은 하나뿐인 것을.”
씨익, 이그드라실은 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비웃음을 덧그렸다. 릴의 푸른 시선에 비친 내 얼굴이 참 비열해 보였다. 우이씨, 내 얼굴 막 쓰지 말라고! 이미 반쯤 망한 것 같지만 그에게는 예쁜 모습만 보여주란 말이야!
나를…… 그러니까 이그드라실을 가리키는 릴의 손가락이 파들파들 진동했다.
“참…… 신이라는 게…….”
릴은 기가 막혔던 듯 말까지 더듬었다. 끝까지 잇지도 못했다.
지금은 저 말에 십분 동의했다. 저 말 외에 딱히 표현할 소리도 없었다.
그래, 신이라는 게!
지금은 과거, 신전의 그 이그드라실을 성스럽게 여겼던 내 자신을 매우 치고 싶을 정도였다. 하비에르 말대로 이건 악신이다. 악귀라고!
티끌만큼이나마 존재했던 신앙심이 오롯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릴의 말대로 확 불살라버려야 한다.
“예전부터 소갈머리가 쁘띠 사이즈인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더하네.”
“…….”
릴의 가감 없는 말에 이그드라실은 말없이 미소를 덧그렸다. 다만 지금 내 손끝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게 느껴졌다. 서서히 힘이 사라져가는 손이 내 몸의 상태를 여실히도 말해주는 듯했다.
……저기, 나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거든요? 와, 정말 미쳐버리겠네.
유병단수도 끔찍한데, 굶어 죽는 건 정말 너무하지 않아? 나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단 말이야.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 이대로 아사하려고?”
릴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 질문에 이그드라실은 대답 없이 두 눈을 내리깔았다. 바닥에 보이는 릴의 양발이 미묘하게 진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보고 양자택일하라는 거지? 내 목숨을 내놓을 건지, 아니면 눈앞에서 프리드린이 죽는 걸 보고만 있을 건지.”
…상황을 보면 저게 맞는 듯했다.
릴의 질문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이그드라실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이다.”
힘없는 목소리였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육신이 죽으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사라지는 건가?
무서운 생각이 나를 차지했을 때 이그드라실은 내 입술로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는 게 인간이지.”
“네가 인간이냐?”
릴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 말에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래…… 이그드라실은 인간이 아닌 게 맞지.
다만 릴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역시 사람은 맞는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게 맞는……. 잠깐만, 이그드라실은 인간이 아닌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하하, 육신에 영양 공급이 되지 않으니 나도 함께 미쳐가는 모양이다.
“…….”
“너 말이야.”
물끄러미 이그드라실을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화가 난 게 분명한데 그래도 ‘나’에게 차마 화를 낼 수가 없는 듯했다.
“내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다면, 그 녀석이 어떤 얼굴을 할 것 같아?”
……저기요, 그 녀석이라뇨.
평소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저렇게 부르는구나, 싶었다. 근데 나 다 듣고 있거든? 이 안에 사람 있다고요.
나중에 혼내줄 테다. 그럴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아, 서글퍼. 이제 좀 행복한 한때를 보내나 싶었는데.
“난 이 녀석이 우는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거든.”
‘…….’
그 말에는 괜히 울고 싶어졌다.
이그드라실의 이 말도 안 되는 협박에 릴이 굴복한다면 무척 마음 아픈 일이 일어날 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답답하긴 하지만, 정말 뭔가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하비에르의 말대로 때려서라도 제령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지금까지 릴을 때린 적이 꽤나 많으니까 나뭇가지로 때리는 것 정도야…….
‘……절대 안 하겠지?’
어휴, 내가 내 몸에서 이그드라실을 몰아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왜 그것마저 안 되는 거야!
‘……나 정말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는 거지.’
있는 거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것마저 뺏기기나 하고.
“이봐.”
답답했던 듯 릴의 태도가 바뀌었다.
“내가 널 엿 먹일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그럼 있더냐?”
“진짜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이그드라실을 불살라버리고 싶은데.”
“어디 한번 해 보거라.”
당당한 그 말에, 릴은 이그드라실을 살벌하게도 노려보았다. 내가 소름이 오싹 돋을 지경으로 맹렬한 기세였다.
하지만 이그드라실이 차지하고 있던 육신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 태도에 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네가 당당한 거 보면 불살라도 소용이 없단 거지?”
“신이 죽는 걸 봤느냐?”
불과 몇 분 전에 인간이 어쩌고…… 했던 이그드라실은 신 타령을 했다. 얼굴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아이야, 내가 죽을 수 있었다면 일찌감치 그 길을 택했을 거다.”
“그렇다면 프리드린은 죽어도 너는 무사하다?”
당연한 추측이 뒤를 이었다.
……어라. 이러면 상황이 더 암울한 것 아닌가? 내가 없어져도 이그드라실은 또다시 그저 기다리면 되니까.
물론 그 기다리는 게 끔찍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그드라실을 골탕 먹일 가장 좋은 방법은, 저 인고의 시간을 길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그드라실은 오천 년을 기다렸다고 하니까.
이제 내가 사라진다면……. 말이 신성하지, 그 삭막한 곳에서 몇 년을 더 숨만 쉬어야 하는지 모르니까.
“저…….”
그때 여지껏 있는 줄도 몰랐던 하비에르가 말을 걸어왔다. 이그드라실을 노려보던 릴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왜.”
“저분이 힘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 하나뿐입니까?”
하비에르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에 비로소 릴이 하비에르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신화에 따르면…… 이시스는 사하크에게 권능을 빌려줬다고 하죠. 권능을 내리실 때 자신을 죽여서 힘을 취하라고 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그 말에 릴이 순간적으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릴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신화의 일부분이었을 터였다.
…가끔, 굳이 따지자면 백 년에 한 번쯤 광신도가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