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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93화 (9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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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비에르와 사이좋게 사라진 릴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일단 엎어지고 본 릴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힘들다……. 욕실 갈 힘도 없어.”

“세상에……. 얼마나 혹사를 당한 거예요?”

나는 그런 릴을 보며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도 그럴 게, 점심때까지만 해도 보송보송했던 릴의 얼굴이 이상했던 것이다.

두 눈은 퀭했고, 양 뺨이 홀쭉했다. 누구의 표현에 의하면 다크서클이 복숭아뼈까지 내려와 있었고, 바짝 마른 입술은 하얀색에 가까웠다. 툭 치면 그대로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거…… 혹시 미라 아냐? 말로만 듣던 걸어 다니는 시체?

이그드라실이 나 몰래 릴을 해친 건 아니겠지? 아니, 분명 자기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오만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대체 뭘 하면 사람이 몇 시간 만에 저렇게 피골이 상접해질 수가 있는 거지?

“얼마나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하루 종일 혹사당했어.”

릴은 자연스레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내 머리카락에 코를 바짝 파묻은 채 웅얼거린다.

“아, 네 살냄새 참 좋다.”

익숙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를 것 같다. 릴은 별것도 아닌 말을 야하게 하는 재주가……. 아니, 내가 이상하게 듣는 건가?

…또다시 생각을 읽히고 놀림받을 것만 같아서, 나는 빠르게 말을 꺼내야 했다.

“왜 혹사당했어요?”

“하비에르 때문에.”

“……예?”

그 말은 좀 의외였다.

깊은 원한이 짙게도 묻어 나오는 음성이었다. 누렇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이 음산한 푸른빛으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

전설 속에나 나오는 원귀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비에르가 대체 무슨 난리를 어떻게 쳤담?

“그 광신도, 확 쫓아내 버릴까.”

…진심이 묻어 나왔다. 물론 릴의 지금 상태를 보면 오늘 하루 종일 맺힌 게 좀 커 보이긴 한다.

“어때. 사막 한복판에 파묻고 도망칠까?”

살벌한 소리를 내뱉는 데 반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어조도 심각하다기보다는 가벼운 편이었지만…….

하비에르의 광신도적인 모습을 잘 아는 내게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나라도 그런 하비에르에게 하루 종일 시달린다면 그대로 파묻어 버리고 싶을 테니까. 모래 밖으로는 코만 살짝 내보낸 채로.

“…….”

“응? 어떻게 생각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자, 릴은 채근하듯 물어왔다.

차마 ‘그대로 묻어버려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코만 살짝 내놓고! 특히 입은 제대로 묻어야 해! 말 못 하게!’라고 외칠 수가 없었다.

마음속의 솔직한 외침을 무시한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응?”

“그 사람, 솔테에서 보낸 감시역 아니에요?”

“맞지. 일단은 솔테에서 보낸 훌륭한 감시역이지.”

“릴의 절친한 친구기도 하고요.”

자그마한 속삭임에, 내 머리를 쓰다듬던 릴의 손이 딱 굳었다. 멀뚱멀뚱 나를 내려다보며 읊조린다.

“지금 뭐라고 했어?”

“네?”

“누가 절친한 친구?”

릴의 입술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새파란 눈이 파르륵 진동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걸 그렇게 온몸으로 표현해야 하냐고!

“나랑 하비가?”

또다시 물어오는 것에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여야 했다. 이번에는 내가 온몸으로 긍정을 표해줄 테다.

사실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긴 했다. 하비에르는 몇 안 되는, 오롯한 릴의 사람 아닌가? 그러면 절친하다고 말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어떤 말로 표현해야 둘 사이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내 생각과 다르게 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른쪽 검지를 내 눈앞에 쓱 내밀며 말을 이었다.

“프리드린, 너 지금 정말 큰 오해를 범하고 있어.”

“……오해 아닌 거 같은데.”

“착각하지 말고 잘 봐. 하비가 일방적으로 내게 달라붙는 거야. 난 광신도와 친하게 지내는 악취미는 없거든?”

논리적인 척 천천히 내뱉는 말에는 뭔가…… 함정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뱉은 릴은 정말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릴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이다가…… 방금 그가 내뱉은 말의 모순을 하나 깨달았다.

“그러면 왜 하비라고 부르는 거예요?”

“응? 그게 뭐?”

“릴은 나도 애칭으로 안 부르잖아요. 친한 사이니까 애칭을 쓰는 거 아니에요?”

“저게 애칭이야? 별명이지.”

뻔뻔한 대꾸에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별명이나, 애칭이나 그게 그거죠. 애초에 친하지 않으면 그렇게 부를 일이 없잖아요!”

“아, 별명이나 애칭이나 그게 그거야?”

중요한 건 뒷말이었는데, 오늘도 건수를 잡은 릴은 내 앞말을 되짚고 보았다.

“내가 그래서 너도 종종 다람쥐라고, 사랑을 담아 불러주잖아.”

어라……? 그게 그렇게 되나?

“왜. 리니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물론 가족들은 날 리니라고 불렀지만……. 이제 새 가족이 된 릴이 나를 리니라고 부르자 온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아, 왜 이 사람이 뭘 하든 닭살이 돋는 거지? 대체 뭘 해도 느끼한 이유가 뭔데?

“……아, 절대 싫어요. 프리드린이 훨씬 나아요.”

“봐, 그럴 거면서.”

이제 나에 대해 잘 아는 릴은 다소 오만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그를 보며 입술을 삐쭉거리다가 속삭였다.

“어, 어쨌든 친구는 묻으면 안 돼요. 나쁜 짓이라고요.”

단순한 나쁜 짓도 아니었다. 심각하게 나쁜 짓이다.

내 단호한 한마디에 릴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큼지막한 눈을 한 차례, 두 차례 천천히 끔뻑였다.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순진하게 물든 목소리였다. 날 보는 눈망울이 한 마리 사슴을 닮아 있었다.

귀, 귀엽다.

놀랍게도 이 남자가 귀여워 보였다. 조금 과장해서 몸집이 나보다 두 배는 큰 거 같은데!

사슴 같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구슬프게 반짝였다. 덕분에 내 마음의 소리와 다른 말을 했던 전과에 양심이 쿡쿡 찔려오는 것이다.

“안 돼?”

“…….”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이 남자에게 홀려버린 나는 조금 전 한 생각을 그대로 토해냈다.

“무, 물론 하비에르 같은 이상한 사람이면 묻고 싶은 게 당연하긴 하지만……. 특히 말을 못 하게 입술은 꼭 파묻고, 그래도 숨은 쉬어야 하니까 콧구멍만 겨우 모래 밖에 꺼내놓……. 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횡설수설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내 입술을 때리고 보았다. 내 행동에 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 말이야.”

짤막하게 나를 부른 릴의 손이 뺨에 닿았다. 부드럽고 그윽하게도 내 뺨을 감싸 쥐며 속삭인다.

“귀여운 걸 좋아하는구나.”

“……네?”

“갑자기 말이 바뀌는 걸 보니 그래. 그쪽 취향이었어?”

갑자기 말이 바뀐 게 아니라 그냥 솔직한 심정을 토해냈을 뿐이다. 차마 내뱉을 수 없었던.

…그것과 별개로 나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며 속삭였다.

“세상에 귀여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릴을 가리키는 내 손가락이 파들파들 진동했다.

“이, 이,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뭐야?”

“응? 뭐가.”

“당신, 하나도 안 귀엽거든요? 산더미만 한 사람이 귀엽기는 무슨!”

“이상하네. 난 내가 귀엽다고는 안 했다?”

“이 상황에서 그럼 그 말이 그 뜻이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왜 없어.”

릴의 얼굴에 사악하기 그지없는 웃음이 피어났다.

“하비에르, 귀엽지 않아?”

그 말에 입을 떡 벌려야 했다. 아니……. 그 광신도가 어떻게 귀엽냐!

……물론 중요한 건 저게 아니었다.

그래, 물론 릴이 내뱉은 말이 저 의미일 수도 있긴 하지. 릴은 구체적으로 뭐라고 한 게 아니니까! 그냥 내 말이 바뀌었다고만 했을 뿐이니까! 정말 뭐가 귀엽다고는 안 했지, 안 했어!

하지만……. 억울함이 치솟았던 나는 부들부들 떨며 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느덧 내 양 뺨이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릴, 나 아주 진지한데요.”

“응?”

“한 번만 좀 져 주면 안 돼요?”

이번에는 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릴을 올려다보았다. 최대한 불쌍한 척, 귀여운 척을 했다. 그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릴이 손을 뻗어왔다.

익숙한 온도가 내 불룩한 뺨을 어루만졌다. 톡, 톡. 가볍게 건드리자 통통한 뺨이 탄성 있게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져 주기에는.”

내 그런, 필사적인 애교와 앙탈에도 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삐져서 뺨 나온 게 너무 귀여운걸.”

“취향 참…….”

나는 입술을 비죽거려야 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거야? 마냥 예뻐하기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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