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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91화 (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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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한 음성. 상냥한 어른의 눈빛.

그런데도 그걸 직접 듣고, 보고 있는 내 눈에는 이그드라실이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비추어졌다.

다 큰 어른이 약속을 빙자해서, 세상 그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직접 하시면 되잖아요.”

[내가……?]

피식, 여린 웃음을 머금은 이그드라실이 손을 뻗었다. 하얗고 뼈마디가 가느다란 그것이 내 목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 식겁한 나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내 행동보다 이그드라실의 손길이 더 빨랐다. 번개같이 날렵하게 움직인 손이 내 목을 꿰뚫었다. 비명이 튀어나왔다.

“어, 엄마야!”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가득 웅크렸다. 그래, 말 그대로 꿰뚫었다.

투명한 손은 내 목을 꿰뚫고 통과해서 지나갔다. 손뿐만 아니라 이그드라실의 몸 그 자체가 고스란히 나를 스쳐 지나갔다.

유, 유령이 내 몸을 통과했다고!

생각 외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봤니?]

“뭐, 뭐를요!”

[지금의 나는 드리아스, 이 나무의 정령일 뿐. 인간에게 그 어떤 위해도 끼칠 수 없어.]

…할 수만 있다면 일찌감치 했을 거란 뜻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하는 게 진짜 신이냐고!

[그러니 네가 해줘야지. 내 복수를, 네 선조들의 희생을 네가 갚아줘야지.]

“난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절대로!”

내 필사적인 외침에 이그드라실은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이그드라실을 노려보았다.

누구 하나 피하지 않는 치열하고 처절한 눈싸움이었다.

* * *

“……프리드린. 프리드린?”

문득 들려오던 목소리.

이그드라실의 중얼거림과는 다르게 귀를 선명하게 파고드는 음성. 나는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으, 으아아악!”

“왜, 왜 그래?”

우아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내 비명에, 릴이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듯했다. 눈싸움을 하고 와서 그런지 눈이 빠질 것같이 아프다.

나는 양팔로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이그드라실이 나를 통과해가는 느낌이 아직 몸에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으, 소름 끼쳐. 감싸 안은 몸이 부르륵 진동했다.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어울리지 않게 포근하게 웃은 릴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들오들 떨던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릴이 눈앞에 있었다.

그의 두 눈과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있었다. 심란했던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흔들리는 손으로 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내 상태를 본 그는 다정하게도 속삭였다.

“왜. 또 청설모가 나타났어?”

“이, 이, 이그드라실이…….”

나는 릴에게 매달린 채 울먹거렸다. 이그드라실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나, 나, 나, 나한테 유병단수할 거래요…….”

“나무 정령 주제에, 감히 어디서 저주를 퍼붓고 있어?”

…어디 이그드라실을 불살라버리겠다고 했던 사람 아니랄까 봐, 릴은 사납게도 내뱉었다. 나는 덕분에 겁을 바짝 집어삼켜야 했다.

“이, 이그드라실께 그렇게 말해도 돼요?”

“응. 그래 봐야 소갈머리가 쁘띠 사이즈인 정령이지.”

이그드라실을 향한 릴의 말은 거침없었다. 시종과 다르게, 릴의 신앙심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게 틀림없다. 어, 그래도 옆 나라 이산나를 쓸모없다고 하는 걸 보면 0에 수렴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 떨림이 가라앉지를 않자, 릴은 나를 자신의 품 안으로 꼭 끌어당겼다.

“괜찮아. 아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을 안 하기에는 나름대로 신이 한 말이었다.

신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언 아닌가?

‘맙소사, 나 유병단수할 거라는 최악의 예언을 들은 거잖아!’

비로소 깨달은 것에 내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무병장수는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까지 했어!

“네가 예전에 내게, 왜 살고 싶냐고 물었지. 기억나?”

내 등을 어루만지던 릴은 차분하게 속삭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이제는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릴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내가 그때 한 말에, 릴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을 했었다. 내게는 아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떠나간 일이지만 릴에게는 마음에 걸린 소리였던 게 틀림없다.

“사실 나도 잘 몰랐거든. 그냥 내가 죽어주면 참 편했을 텐데. 형님도, 말리카도, 어머니도 말이야. 그런데 나도 참…… 살려고 아득바득 발버둥 쳤지.”

릴은 조금 더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왜 그랬을까. 이제야 알 거 같거든, 그 이유를.”

“그래요? 그 이유가 뭔데요?”

“널 만나려고.”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조금 전에는 이상한 유령 덕분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면 이번에는 릴의 말 덕에 소름이 끼쳤다. 엄마야, 언니야! 나 살려줘!

“너야말로 내 삶의 의미고, 전부야.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야.”

“……저, 저기요. 아저씨?”

릴에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팔뚝을 내밀고 보았다. 양팔에 오돌토돌 닭살이 돋아 있었다.

“저, 저, 저 그런 말에 내성 없다고요. 이거 봐, 닭살 돋았잖아!”

“익숙해지라니까.”

이런 느끼한 말에 어떻게 익숙해지냐고! 태생적으로 안 맞는단 말이야!

“어쨌든 그런데, 내가 널 유병단수하게 둘 거 같아?”

릴은 당당하게 내뱉었다. 자신감 가득한 말이 왜…… 믿음직스럽지 못할까.

“걱정하지 마, 그깟 드리아스의 저주 따위. 널 아프게 하면 그거야말로 남편으로서 직무 유기지.”

이어지는 말에 릴이 믿음직스럽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릴은 여기에서도 직무 유기를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 * *

이그드라실이 내게 한 말도 안 되는 ‘부탁’이 머릿속을 뱅뱅 떠돌았다.

안 한다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덕분에 점심시간에 혼자 남았을 때, 나는 가만히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해야 했다.

‘내가 안 한다면 어쩔 건데!’

이그드라실은 사람에게 위해를 끼칠 수도 없다고 하고. 정말 이대로 배짱 장사를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릴에게 저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설명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릴은 내가 한 마디 꺼내는 순간, 신전의 이그드라실을 정말로 불살라버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면 문제는 이그드라실이 불탄 이후에 생기지 않을까? 신전도, 왕실도 그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넘길 일이 없었다. 이번에는 말리크도 절대 그를 편들어주지 못할 것이다.

‘으으……. 뭘 어떻게 해야 해?’

이그드라실은 내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할 때까지, 매일 밤 나를 부르지 않을까? 아니면 언니를 다시…….

‘그건 싫어.’

언니와 연관되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머리가 딱딱 아파왔다. 관자놀이를 꾹 압박했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한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쪽 구석에서 짤막한 그림자가 보였다. 태양이 남중한 것에 가까웠던지라 정말 깡똥했다.

하지만 누군지 굳이 묻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비에르?”

내 목소리에 그림자가 움찔, 하고 몸을 떠는 듯했다. 이윽고 하비에르가 어울리지 않게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뭐, 뭐예요?”

내 말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뚜벅뚜벅 내게 다가오더니 바닥에 무릎을 붙였다. 으악, 이러지 말라고! 제발!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리, 릴이 나타나지 말랬잖아요.”

“카림께서 지금 안 계시잖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릴을 배신한 하비에르의 태도는 지나치게 당당했다.

……와, 이거 하비에르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좋겠다. 누구 좋아해서 쫓아다닌다고.

아, 좋아하긴 하는 거지. 좋아하다 못해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 거지. 자신이 섬기는 신을.

그 맹목적인 믿음에 한 차례 몸서리를 친 나는 하비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 고민에 대한 답을 하비에르가 어느 정도 줄 수 있지 않을까?

“……저기요, 하비에르.”

“예?”

“혹시 말이에요. 만에 하나, 내가 하비에르에게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예요?”

내 갑작스런 질문에 하비에르가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이 광신도는 조금 의외의 답을 내비쳤다.

“아뇨? 제가 왜 죽습니까.”

……오, 의외로 정상적인 답이었다. 정말 상상 초월의 광신도니까 죽으라면 기꺼이 죽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어진 말은 하나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전 이그드라실께 악착같이 붙어서 하나의 기적이라도 더 보고 만수를 누릴 겁니다만?”

아, 이 광신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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