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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된 목소리에 이그드라실은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되묻는다.
[왜?]
“아뇨, 아무래도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저 평온한 태도에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딱 이것 하나였다.
아무래도 귀지가 쌓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게 틀림없다. 검지로 오른쪽 귀를 대충 후벼 판 나는 이그드라실을 아득하게 올려다보았다. 귀에 손을 모아 붙인 건 덤이었다.
“뭐, 뭘 가져다 달라고 하셨어요?”
이그드라실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채 읊조렸다.
[시체.]
“……누구의?”
[네 남편.]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저, 저기…… 지금 신께서 살인 교사하세요?
새하얗게 웃은 이그드라실은 상냥한 음성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그 아이를 죽여서 내게 데려오렴.]
“제, 제가 왜 그래야 해요?”
[나와 약속했잖니.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그, 그래서…….”
이그드라실을 가리키는 내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약속을 빙자해서 사람의 시체를 요구하는 이게 어딜 봐서 신이야? 어딜 봐서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냐고! 악마지!
“저, 저보고 지금 살인을 하라고요?”
[어머……. 말이 그렇게 되나?]
“그, 그것도 남편을 죽이라고요? 프레이르의 카림을?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신성한 분을?”
신성한 분이라니, 평소였으면 내 입에서 결단코 튀어나올 리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저랬다.
프레이르에서 알아주는 왕실의 망나니, 통칭 미친개지만……. 릴의 본질적인 위치는 저랬다.
동네 창피한 소문을 만들고 다녀도 릴이 프레이르에서 없어지는 순간, 프레이르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로 뺨을 적실 것이다.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자가 다시 태어나는 날을 기다리며 릴의 행적을 줄줄 읊고 다니겠지.
[그게 뭐 대수니. 넌 나 그 자체인데.]
“아니, 장난이 과하시잖아요!”
내 떨리는 외침에, 이그드라실의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에 쓴웃음이 돋아났다.
[장난이 아니란다. 나는 진지해. 그 아이의 시체가 필요하단다.]
“애초에 왜…… 필요한 거예요? 왜 이, 이상한 걸 가져다 달라고 하시는데요?”
[왜긴.]
담담하게 중얼거린 이그드라실이 근처를 돌아보았다. 삭막하게 얼어붙은 금빛 눈동자에 근처의 정경이 담겼다.
[난 여기서 오천 년을 살았다.]
이곳에는 거대한 고목과 잔잔한 호수, 푸른 잔디와 꽃을 제외하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름답긴 하지만 지극히도 정적인 광경이었다.
[이만 돌아가고 싶어. 내 고향으로, 내가 살아 숨 쉬어야 할 곳으로.]
“그게…….”
[하지만 내 땅으로 돌아가려면 내 힘을 되찾아야 해.]
오래된 회한이 묻어나온 음성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그드라실은 자신의 섬섬옥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병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손끝에 힘을 주는 행동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오래도록 저래 왔으니까. 저 손끝에 닿는 허망함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내가 얘기했잖니. 사랑의 꿈은 한순간의 달콤한 환상일 뿐이라고. 그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 애참함에 비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가웠다. 말만으로도 뼈가 시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하크는 날 배신하고, 자신을 도운 내 힘을 빼앗았다. 결국 지금의 난 반쪽짜리 신이라서, 그저 이 거목의 드리아스일 뿐이라서……. 내 외침은 내 고향까지 닿지 않아.]
애틋하기 그지없는 소리에 나는 이그드라실을 바라만 보았다.
예쁜 사람이 저러니까 지금의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말리카에게 넘어갔던 것처럼, 이그드라실에게 홀려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만 같잖아.
절대로 수긍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반항을 하다가 이그드라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했다.
‘고향이라고…….’
프레이르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는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이그드라실의 고향, 아득히 멀고 신성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신이 나누어준 힘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일단 릴이 가지고 있는, 물을 다스리는 힘을 돌려받고 싶다고. 당연하게도 저 다음은…….
“그러면…… 다음에는 제 시체도 필요한 거 아니에요?"
[응? 그게 왜?]
이그드라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연스럽게 덧붙인다.
[넌 어차피 유병단수할 운명이라니까.]
그건 내가 발작할 소리였다. 유병단수라니, 지금 그 무슨 소리요!
“제 소박한 꿈은 무병장수라고욧! 왜 불안한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못 이룰 꿈이지.]
담담하게 내뱉는 말에 혈압이 치솟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뒷목을 움켜쥐었다. 이, 이, 이 악마야!
이그드라실은 내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아가야, 네가 처음이라고 생각하니?]
“네, 네에? 뭐가요?”
[내 힘을……. 정확하게 말해 대지를 품을 힘을 이은 사람이.]
순간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받는 자’라고 불리는, 메마른 사막에 단비를 내리는 자들은 종종 볼 수 있었으니까. 역사서를 비추어 봐도 잊을 만하면 한 명씩, 왕실에서 비를 내리는 사람이 태어났었다.
저런 현실에, 일각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신화가 진실이라면 태조 사하크의 힘을 물려받는 이는 보이는데, 이그드라실의 힘을 이어받은 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왕실에서 자기들이 좋을 대로 끼워 맞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는.
내가 이야기를 제법 진지하게 듣는 눈치자, 이그드라실이 연달아 속삭였다.
[왕가에서 왜 말리크를 제외한 모든 아미르를 죽여 왔겠니?]
이상할 것 없는 전통을 언급하는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거야 다른 아미르들이 왕권에 위협이 되니까. 척박한 사막에서 일말의 불안함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왕가에서 종종 태어났거든. 너처럼 생명을 키우고, 사람을 되살리고, 캄신을 잠재우는 사람이. 그래서 즉위한 말리크는 형제를 모조리 도륙 내버렸다. 이그드라실이 나타날, 혹시 모를 가능성을 두고.]
“…….”
나는 입을 떡 벌려야 했다. 그건 생각보다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지금 나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치켜세우는 꼴을 보라. 그렇게 신성하게 여기면서…… 죽여 왔다고?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죽여 올 필요가 있나? 왕실의 전통성이나 신성함을 내세우는 존재로 굉장히 유용했을 텐데.
“왜……?”
[응?]
“왜 죽여 온…… 거예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왜 이유가 없어. 가장 큰 이유가 네 눈앞에 있잖니.]
내 의문에 대한 이그드라실의 답은 생각 외로 간단하고, 명쾌했다.
[내가 돌아갈 테니까.]
“…….”
[너희에게 꿈과 같은 번영을 안겨주고, 눈부신 성장을 선물한 내가 내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 그러게? 왕가의 정통성이고 신성함이고 나발이고, 이그드라실이 사라지면 모두 끝인 이야기잖아?
[왕가를 유지할 명맥으로 둘 중 하나는 남겨야 했지. 하지만 이 고약한 사막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면 너보다는 그 아이의 힘이 낫잖니? 나은 정도가 아니라 그 아이의 힘은 확실히, 지금도 유용하지.]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다.
캄신이야 뭐,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면 되는 자연재해였다. 약간의 피해는 있겠지만 대부분 마을은 캄신이 부는 곳을 피해 이루어졌으니까.
농업 기술이 발전했으니 생명을 키우는 건 딱히 쓸모 있는 힘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을 살려내는 건 도리어 분란만 생길 가능성이 높지 않나.
하지만 사막에 비를 내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저 힘 하나로 왕실은 어마어마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문뜩 이그드라실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촉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이그드라실 특유의 기운이 선명하게도 와 닿았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이러세요?”
[기특해서.]
사늘한 음성으로 대꾸한 이그드라실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내 머리를 여러 차례 어루만졌다.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그 눈이 무척이나 부드럽게 휘었다.
[이번에는 숨고, 또 숨어서, 여기까지 무사히 성장해준 내 편린에게 하는 칭찬.]
……칭찬이라고는 하지만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전혀 모를 소리였다.
[어쨌든.]
이그드라실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날을 기다려왔다. 오천 년이나.]
“…….”
[그러니 내 아가야.]
이그드라실의 눈이 상냥하게 휘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상냥한 눈빛이 악마의 시선처럼 비추어졌다.
[내 것을 이만 돌려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