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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렇게 됐네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신화에서 말한 세 가지. 생명을 키우고, 되살리고, 캄신을 가라앉히는 거.
물론 그 생명을 키운다는 게 왜 하필 대머리에서……. 크흠, 큼. 뭐, 경험자의 말에 따르면 자라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왜 그런 공통점으로 엮을 수 있는 일이냐고. 알다가도 모르겠다.
손끝으로 괜히 릴의 어깨를 툭툭 찔러댔다.
“근데 있잖아요.”
“응?”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어요.”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물론 입술을 비집는 목소리는 여전히 자그마했지만.
“처음 신전에 갔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고, 말리크의 머리…… 도 정말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거든요. 언니 일도 그렇고요.”
내 속삭임에 릴은 따뜻하게 내 뺨을 어루만졌다. 애정이 가득한 온기에 이름 모를 용기라도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손쉽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쉬워.”
비교적 가볍게 대답하는 것에 나는 눈을 두어 차례 깜빡였다. 당연한 의문이 뒤를 이었다.
“릴도 그랬어요?”
“나?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대충 대답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릴의 태도는 의외로 진지했다.
“난 너하고 좀 달랐거든?”
“달랐다뇨?”
“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걸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왜 저 말이 비뚤게 들리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낑낑거려서 그럴까.
“할 수 있냐, 없냐는 문제가 될 게 아니었어. 당연한 거였으니까. 도리어 내가 걱정해야 할 건 이걸 언제, 어디서 써야 하느냐는 거였지.”
릴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 나갔다.
“잘못 쓰면 재해니까.”
“…….”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릴도 나름대로 생각과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고, 다른 능력이니 저런 생각을 할 법도 했다. 생각보다 깊은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막에서 비를 내린다는 거. 물이 부족한 곳에서 물을 다룬다는 거. 그것 자체가 권력이고 어마어마한 능력이니까. 여러모로 고려할 거리가 많았을 것이다.
……새삼스레 릴이 제법 험난한 삶을 살아왔겠구나 싶었다. 저번에 릴이 말했듯, 지금까지 릴은 저 능력으로 사고 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처럼 도움이 됐으면 또 모를까.
갑자기, 이곳에 오기 전에 마주한 형부가 생각났다.
“있잖아요, 형부가 말이죠.”
“브렌델 영주는 갑자기 왜?”
“릴을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던데요.”
릴은 별 얘기를 다 한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두 눈이 장난스럽게도 반짝였다.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묻지도 않았다. 듣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어라. 넌 안 그랬고?”
“네에? 잠시만, 그, 그건…….”
……치사하게 팩트로 때리지 말라니까요! 이왕 때릴 거면 공정하게 날조와 선동으로!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저, 전 말리카의 시녀였거든요?”
“응, 아주 잘 알지. 내가 그 사실을 몰라주면 또 누가 알겠어?”
“알 사람은 많은데요?”
내 말에 릴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괜히 양팔을 허공에 휘휘 저은 나는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어, 어쨌든 말리카의 시녀 귀에 릴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왔겠어요?”
“천하제일 망나니? 정신 나가서 날뛰는 개?”
툭툭 내던지는 말에는 아주 굵은 뼈가 있었다. 그냥 소문으로 널리널리 알려진 릴 데스테리언은 딱 한 마디, 미친개로 설명이 가능했다. 아직도 저럴 터였다.
가뜩이나 최근에는 그놈의 직무 유기…….
직무 유기도 보통 직무 유기였나. 아주 대놓고, 집무실에서 잠을 자고 딴짓을 하는 걸로 말리크에게 반항을 했다고 하지.
…저게 어떤 식으로 모래 폭풍처럼 불어났을지, 굳이 듣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말리카께서 저 좋은 먹잇감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난 어딜 가도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네. 아, 창피해. 어허허, 이놈의 인생!
“저 그래서 처음에 데스테리언에 가서, 릴을 만났을 때…… 얼마나…… 얼마나…….”
내 목소리가 파들파들 잘도 진동했다. 고작 일 년 전의 일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와, 어쩌면 그 일 년 만에 모든 게 변해버릴 수가 있는 거지?
적어도 눈앞의 이 인간이 보고 싶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암담했다고요. 눈앞이 깜깜했단 말이에요.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어도 그렇게 깜깜하진 않았을 거야.”
“와, 너 정말 너무한다.”
릴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내가 그때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청혼했는데.”
“지, 지극정성?”
기막혔던 내 음성이 진동했다. 이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그게 어딜 봐서 지극정성이야!
“반지 하나 없이! 거절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한 게 어디의 누군데!”
억울했던 내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청혼과 결혼식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눈앞을 가려왔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행사인데! 얼마나 꿈꿔왔던 일인데! 프러포즈도 이상했고 결혼식도 못 했다. 아, 이그드라실이여. 나 너무 억울해요!
“어라. 아직도 그 뜻이 그 뜻 같아?”
히죽, 그 무엇보다 사악하게 웃은 릴은 내 발목을 스르륵 잡아 당겼다. 나는 속절없이 그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 단단한 팔이 아침 댓바람부터, 내 가냘픈 허리를 거침없이 낚아챘다.
아뇨, 아뇨! 그 말이 그 뜻이 아니라는 거 이제는 잘 알아요! 너무 잘 알아요! 그런데 별로 알고 싶지 않았…… 아니, 알아도 뭐…….
우는 소리가 저절로 입술 밖을 비집었다.
“으, 으앙! 이 변태야!”
“난 분명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변태가 좋다고 여기까지 쫓아온 게 너야.”
“내, 내, 내가 언제 좋댔어요! 보고 싶댔지!”
“그 말이 그 말 아냐?”
“달라! 전혀 달라!”
결국 같은 뜻이긴 하지만 일단 우기고 본다. 세상천지 그 누구도 믿지 못할 말이었다.
“그럼 내가 싫어?”
뒤에서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너무 극단적…….
“난 네가 정말 좋은데.”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엉엉.
그렇게 아침부터 시작된 회포 풀기는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이어졌다.
* * *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아득하게 풍기는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푸르게 깔린 잔디 틈새로 도백색 꽃이 한들거렸다. 또다시 보이던 왕실의 중앙 신전, 거대한 세계수. 나를 압도하는 것만 같은 이 감각.
몽롱한 정신 틈새로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나는 왜 가끔 이곳에서 눈을 뜨는 걸까. 이그드라실이 나를 불러오는 걸까?
[드디어.]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던 이그드라실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뿐하게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더없이 아름다운 나무의 정령은 무게가 없는 것처럼, 마치 미풍에 휩쓸리는 깃털처럼 허공을 날았다.
이윽고 내 앞에 오롯이 섰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이그드라실은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때가 된 것 같다, 아이야.]
“네?”
[이제 겨우, 반쪽짜리에서 오롯이 내 뜻을 잇게 됐잖니.]
나는 잠시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야 했다. 신화에 등장하는 기적 세 가지를 모두 이루었다는 말이지 않았을까?
[저번에 내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니?]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린 이그드라실이 나를 가리켰다.
[네가.]
휙 돌아간 손가락이 이그드라실 자신을 향했다. 마치 강조하듯, 한 마디가 이어진다.
[나와.]
순간적으로 언니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지, 그때 그런 약속을 했었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봐야 했었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랬…… 는데요.”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 아니겠니?]
“그것도 맞는 말씀인데요…….”
[그러니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간이 왔단다.]
나는 이그드라실을 아득하게 바라만 보았다. 이그드라실은 뭐라고 더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일 뿐이다.
[그 아이.]
단 한 순간, 깊숙이 가라앉은 황금색 눈빛이 해묵은 분노와 증오로 번뜩였다.
[내 유지를 이은 사하크의 후손.]
릴?
[그 아이의 시체를 내게 가져다주겠니?]
이어진 부탁 아닌 부탁에 나는 한 차례 눈을 끔뻑거렸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함없이.
반면 나는 들은 말을 곱씹어야 했다.
신이시여,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뭘 가져다 달라고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