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원대하신 카림. 이그드라실이여.”
다음 날 아침, 아니, 새벽이었다.
희붐하던 새벽. 짙은 안개를 꿰뚫고 서광이 겨우 쏟아질 때. 하비에르의 부담스러운 음성이 문밖에서 울려 퍼졌다.
인상을 일그러뜨린 릴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벌써부터…….”
“네?”
“아냐, 누워 있어.”
릴이 상체를 일으켰다. 대충 가운을 걸치고 귀찮다는 듯 휙, 문을 열어젖혔다.
바깥으로 열리는 문인지라 하비에르의 이마와 나무 짝이 맞부딪쳤다. 쿵, 제법 묵직한 소리가 울렸지만 비명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형형한 눈빛을 한 하비에르가 보였을 뿐이다. 그의 이마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제아무리 릴이라고 해도 황망한 모양이었다. 한 박자 늦은 질문이 들려왔다.
“……너 괜찮니?”
“괜찮습니다.”
“그래? 정말?”
“네.”
“근데 이 시간에 왜 왔어?”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왔습니다만.”
그 말에, 내가 볼 수 있는 릴의 등에 당혹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이어 한숨 서린 음성이 아득하게도 울렸다.
“이봐, 하비.”
“예, 원대하신 카림.”
“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물론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다든가, 세숫물을 떠다 바친다든가 하는 잡다한 일은 시종보다는 하인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물론 말리크의 경우는 예외다. 말리크에게는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바치는 것마저 큰 영광이니까.
릴의 질문에 하비에르가 목을 길게 뺐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건…….”
평소와 다르게, 하비에르는 다소 머뭇거렸다. 그러다 완전히 굳어버린 것처럼, 뻣뻣한 태도로 읊조렸다.
“사람은 말입니다.”
“응,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길게 운을 떼는 소리에 릴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너 오늘 죽을 날을 받아 왔다고?”
“살짝 거리가 있습니다만…….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기 때문에 이럽니다.”
감격으로 벅차오른 음성이었다. 이어진 말에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야 했다.
“살아생전 신의 기적을 눈앞에서 볼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미, 미친 인간아!
광신도, 하비에르는 정말 무서웠다. 멀리서 볼 수 있는 두 눈에 광기가 번들거리는 것만 같았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맹목적일 수가 있는 거지? 엄마야, 만에 하나 내가 진짜 신이라고 해도 저런 사람의 경배는 딱 잘라 거절할 것 같다. 무섭다고!
소름이 오싹 끼쳤다. 내가 몸서리를 칠 때 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비?”
“예, 원대하신 카림.”
“그럼 죽자.”
심드렁하게 이어진 그 한마디.
…너무 평온하고 느긋한 속삭임이어서,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도 그랬고, 하비에르도 그런 듯했다.
“…….”
릴을 올려다보던 하비에르가 순간적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반 박자 늦은 대꾸가 입술을 비집었다.
“원대하신 카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그게……. 그렇긴 했습니다.”
“그러면 죽어야지. 딱 죽기 좋은 시점이잖아?”
다시 한번 더 강조하는 말에 하비에르가 입을 떡 벌렸다. 릴은 말로 하비에르를 잘도 때렸다.
“사람은 여한이 없을 때 죽어야 한다? 내일이면 다른 미련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어떻게 미련을 줄줄 남기고 눈을 감겠어?”
“…….”
…맞는 말만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이, 정작 그 맞는 말을 들으니까 할 말을 상실한 모양이다. 잠시 머뭇거린 광신도는 자신의 오랜 꿈을 입술에 얹었다.
“그래도 카림께서 말리크가 되시는 건 보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한 헛소리 할 거면 얼른 죽자.”
“원대하신 카림!”
“시끄러워.”
아마 릴은 인상을 일그러뜨렸을 것이다. 정말로 방금 하비에르의 고함이 시끄럽긴 했다.
“여한이 없기는 무슨.”
릴이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하비에르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을까.
…굳이 보지 않아도 표정이 그려진다니. 으으, 이건 중증이었다.
“거기 미련이 풀풀 남아 있네, 남아 있어. 그것도 가득가득 차올라서 터지기 직전이네.”
하비에르가 아니라 하비에르 할아버지가 와도 대꾸를 못 할 팩트 폭력이었다.
“…….”
“차라리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면 이해라도 하지. 뭐? 내가 뭐가 돼?”
여전히 어조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지, 하비에르가 한 말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당장 목이 잘렸을 테니까.
“대체 그게 무슨 황당한 꿈이야?”
잠시 침묵이 내리깔렸다.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비에르는 겨우 대꾸할 말을 찾은 모양이었다.
“……제가 카림을 두고 어떻게 결혼을 합니까?”
“내가 그때도 말했지?”
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젠가 한번 들었던 말이 그 입술을 비집었다.
그때와는 전혀 상황이 다른 것 같지만…….
“네가 그래서 여자 손 한 번도 못 잡아본 거라고.”
“원대하신 카림,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습니다. 못 잡아본 게 아니라 안 잡아본 겁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릴의 대꾸에 하하하, 우하하하…… 하고 어디서 오소리가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진짭니다.”
“흐음.”
“……진짜라니까요.”
“응, 그래. 믿어줄게. 못 믿어 줄 것도 없지, 그 정도야.”
이보다 더 무심할 수 없었고, 이것보다 더 심드렁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게질 만도 했지만 하비에르는 고개를 푹 숙일 따름이었다.
릴은 그런 하비에르를 다독거리듯, 친절하게도 그를 불렀다.
“하비.”
“예, 원대하신 카림.”
“우리 한동안 보지 말자.”
하비에르가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큼지막한 눈을 두어 차례 끔뻑인다.
“……예?”
“내가 먼저 찾아가기 전까지, 나는 물론 프리드린 곁에 나타나지 마. 꼬리라도 보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극약 처방이었다. 하비에르는 세상을 잃은 얼굴로 릴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사람이 꼬리가 어디 있다고 그러지? 혹시 청설모가 하비에르 아냐?
“어째섭니까?”
“너 지금 너무 과열됐어. 머리 좀 식혀. 너 이러다 자연발화 할지도 모르거든?”
“불이 붙으면 카림께서 꺼 주실 거 아닙니까?”
“내가 왜?”
배라도 벅벅 긁으면 딱 어울릴 것 같은 음성이었다.
“사람은 여한이 없을 때 죽어야 한다니까? 우리 귀여운 하비가 미련 없이 저승으로 떠난다는데 뭐, 옆에서 구경하면서 박수나 쳐 줘야지. 걱정 마, 솔테에서 장례는 성대하게 치를 수 있게 해 줄게.”
“너무하신 거……. 아니십니까?”
천하의 하비에르도 지금, 말로는 도저히 릴을 이길 재간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러니까 내가 릴을 못 이기는 게 당연한 건가? 난 하비에르도 못 이기잖아?
“지금 누가 너무한 건데.”
“카림…….”
“됐고,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마. 네가 신실한 건 알겠지만 그건 그거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신실함이면 그건 더 이상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야. 인간의 이기심이지.”
몸을 돌린 하비에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비 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이어 문을 닫은 릴이 내게로 되돌아왔다. 침대에 누운 내 위로 슬쩍 몸을 드리운다.
“저 사람 무서워…….”
내 중얼거림에 릴은 장난스럽게 눈을 휘었다.
“그래도 심성이 못된 애는 아니잖아. 적당히 봐줘야지.”
“그, 그걸 알아서 더 무섭다고요. 사람이 어떻게…….”
가슴에 손을 모아 쥔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달달 떨며 한마디 내뱉어야 했지만.
“어쩌면 저렇게 광신도일 수가 있어요?”
“응? 광신도?”
릴이 내 말을 곱씹었다. 이어 박수를 한 차례 친다.
“와, 다람쥐야. 너 좀 천재다?”
“네?”
“하비하고 딱 어울리는 말이네. 신실하다는 말이 좀 모자란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내가 왜 지금까지 그 말을 못 찾았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릴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저걸 모를 수가…….” 하고 중얼거리는 건 덤이었다.
“……하비에르하고 친해서요?”
“그런가?”
“아니면 이산나 때문에?”
옆 나라, 이산나는 프레이르의 모든 사람들을 이그드라실에 미친 광신도 취급을 하곤 했다. 우리는 이산나를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당연하게도 이 두 나라는 상극이었다.
“……이산나라니. 그건 너무 갔어.”
“그런가요?”
릴이라고 해도 차마 이산나는 받아들일 수 없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릴과 나도 믿음이란 게 있긴 하니까…….
그렇게까지 신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릴은 손등으로 내 뺨을 두어 차례 어루만졌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너도 이제 모든 걸 다 할 줄 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