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응, 그러니까…….”
새카만 밤이 까무룩 기울었다. 별 하나 없는 고요한 하늘에서, 게르드의 것과 다를 바 없는 은빛 달만이 릴과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런 꿈을 꿨어?”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던 릴이 물어왔다. 빈틈없이 맞닿은 익숙한 온기에 나는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네에.”
“혼나야겠네.”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는 숨결이 있었다. 동그랗게 이어지는 척추 뼈를 따라 진득하게도 자신의 온기를 새겨 나간다.
쪼옥, 쪽. 뜨거운 입술과 피부가 맞닿을 때마다 울려 퍼지던 마찰음. 한 차례 지나간 열락에 한껏 예민해져 있던 몸이 움찔 진동했다.
나를 또다시 요사스럽게도 꿀꺽 삼킬 것만 같은 남자를 슬쩍 곁눈질했다. 한순간 마주한 푸른 눈이 장난스럽게도 반짝였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척 몸을 웅크렸다.
“나, 혼낼…… 거예요?”
“응, 두 배로 혼나야지.”
“왜 두 배예요?”
“왜긴.”
말로는 혼낸다고 하면서, 슬금슬금 움직인 손은 열심히 자기 욕심을 채워 나갔다. 이미 내 가슴은 그의 것이 된 지 오래였다. 열심히도 주물러댄다.
남의 손아귀에서 내 몸이 구속되는 느낌이란, 또 그로 인해 달아오르는 감각이란. 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손아귀 아래에서 비명 아닌 비명을 삼켰다.
으, 이 인간이 정말! 방금 했잖아!
“얌전히 기다리라는 말도 안 들었지.”
“어디서 얌전히 기다리라는 말은 없었잖아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득바득, 바락바락 따지는 소리였다. 다른 때였으면 날 놀려먹었을 릴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게 느껴졌다. 끄응, 하고 한 차례 앓는 소리가 들렸다.
날 만지던 손이 그대로 딱 멈추었다. 생각할 게 늘어난 것처럼.
“……그건 또 그러네?”
도무지 반박할 소리를 찾지 못한 모양이다. 한탄이 이어졌다.
“내가 왜 미처 그걸 생각 못 했지?”
와, 바락바락 따져도 이렇게 따지면 되는구나! 반박할 거리가 없게끔!
무언가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을 때, 내게 질 일이 없는 릴은 툭 중얼거렸다.
“그래도 말은 잘 듣고 있었어야지. 우리 다람쥐, 이럴 때는 말을 더 안 들어.”
“제가 언제요. 말 잘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얌전히 기다렸어?”
아픈 곳을 쿡 찌르는 소리였다. 그렇지, 내가 릴을 기다린 건 아니지……. 부득불 찾아왔지. 그것도 캄신을 가라앉히면서, 요란하게.
“벌써부터 떠드는 소리들이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아. 특히 신전 놈들.”
아야야. 내 여린 뼈와 살이 분리되겠습니다.
…사실 당장 신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바로 옆에서 우리의 광신도, 하비에르가 떠들어댈 테니까.
어쨌든 지은 죄가 있던 나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뭐가 됐든 내가 와서 가장 좋은 건 당신이면서.”
“그건 맞지. 너 오늘따라 맞는 소리 잘한다?”
저 맞는 소리가 얻어맞는 소리일까, 아니면 처맞는 소리일까.
“……제가 평소에 하는 말은 안 맞는 소리였어요?”
“음……. 굳이 따지면 엉뚱한 소리가 더 많았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도 내가 엉뚱한 소리를 퉁퉁 내뱉는 걸 잘 알아서.
…훌륭한 자아 성찰 시간이 이어졌다. 흑, 앞으로 헛소리를 조금 줄여야겠어.
그것과 별개로 내 동문서답이 이어졌다.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래, 그래. 물론 그 마음 잘 알지. 그건 너무 예쁘고 기특하고 사랑스러운데.”
아마 내가 강아지였다면 저 말을 듣고 꼬리를 살랑거렸을 것이다. 지금도 어쩔 수 없는 기쁨에 몸이 바르륵 진동했다.
“형님께서 이걸 뭐라고……. 하아.”
골치가 아프다는 듯 릴이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습관처럼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었을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릴도 말리크는 무서워했다. 나처럼.
하지만 나와 다르게 릴은 말리크를 무서워할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그거 신경 안 써도 될걸요?”
“응?”
“말리크께서 릴을 참 예뻐하시던데요.”
나는 그때의 말리크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건 예뻐한다는 말 외의 다른 걸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조금 다른 소리지만, 릴이 말리크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헛소문이 돌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단순히 동생을 예뻐하는 것 이상의 애정이다.
언니도 나를 예뻐하긴 하지만, 말리크가 릴을 예뻐하는 정도의 애정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릴을 향한 말리크의 애정은 훨씬 더 깊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순수하게 내가 뱉은 말의 의미를 묻는 소리였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 그대로요.”
“뭐?”
“말리크를 만나 뵙고 왔거든요.”
“허락 맡고 왔다고? 여기에?”
중간 단계를 다 건너뛰긴 했지만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내 등 뒤에 있는 릴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늘였다.
“아뇨?”
“……응?”
“신성한 제가 허락을 왜 맡아요?”
언니 말대로 미친 척하고 왔지.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뻔뻔한 소리였다. 실제로 양심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는 내 허리는 가늘게 진동했다.
하지만 이왕지사 사고 친 거, 뻔뻔하기라도 해야지. 이게 다, 전부, 모두 등 뒤에 있는 누구한테 배운 거다. 부부는 닮아간다고 하잖아.
릴에게 할 온갖 변명을 생각하고 있을 때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너……. 아, 예전 생각 나네.”
릴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어, 예전 생각……?
순간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
― 지금 살아있는 신께 그게 무슨 태도예요?
― 얼른 엎드려서 절부터 하지 못할까! 당장 내 말이 다 옳다고 하지 못해!
엄마야. 저때…… 내가 왜 그랬더라?
지나 보니 흑역사네, 흑역사야. 말리크의 가발을 벗겨버린 그 일 만큼이나!
“너 좀 변했다? 그 잠깐 사이에.”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잖아요.”
“그거 뭔가…… 맞으면서도 틀린 소린데.”
내 매끈한 뒷모습을 한 차례,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느른하게 가라앉은 채여서, 귀에 착 달라붙듯 감겨들었다.
“너 그거 알아?”
“뭐, 뭐를요?”
“가끔 보면 나보다 더 대책 없어.”
…색스러운 목소리에 전혀 그렇지 못한 내용이었다.
아니, 어디서 이런 심한 욕을 하고 있어! 남편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
나는 맞닿아 있는 손을 찰싹 때리고 보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욧!”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직무 유기를 한다고 잔소리를 할 군번이 아닌 것 같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심한 말을……!”
“그리고.”
이번에 이어지는 목소리는 제법 엄했다.
“나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없으면 그런 꿈을 꾸고.”
“그, 그렇지만.”
나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우는 시늉은 덤이었다.
“흑흑, 당신 원래 유명했잖아요. 알아주는 바람둥이로.”
피식, 그의 입술 밖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 당당하게 하는 말이란,
“본 적 있어?”
……그런 것이었다.
주어가 없는 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되물었다.
“네에?”
“내가 너 말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 거 본 적 있냐고.”
“…….”
아니, 이 황금 같은 신혼에 다른 여자랑 놀아나면 그거야말로 정신 나간 거 아니냐고…….
어쨌든 할 말이 없었다. 소문으로 들은 건, 과장 좀 보태서 집채만 한 마차를 꽉 채우고도 남지만 내가 두 눈으로 목격한 건 없으니까.
아, 꿈속의 청설모가 있나?
그놈의 청설모 때문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릴은 독심술을 했다.
“그리고 프리드린, 난 다람쥐는 좋은데 청설모는 싫어.”
“왜요? 청설모도 귀여운데.”
“그게……. 아니다, 됐다.”
늘 그렇듯 내 엉뚱한 소리에 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어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좀 더 정확하게.”
입술이 귓가에 와 닿았다. 끈적끈적하기 그지없는 속삭임이 떨어졌다.
“다람쥐만 좋아.”
아마 릴은 가장 환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말자.”
아, 미친 척하고 오길 잘한 것 같아. 나는 괜스레 릴의 품에 바짝 안겨들었다. 내 행동에 릴은 나를 좀 더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품 안의 온기에 취한 나는 헤실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릴은 대체 언제부터 내게 스며든 걸까. 정확한 시기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내 남편이 최고…… 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네. 맨날 나를 놀려먹으니까.
이제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 다고 말을 못 하겠네? 카림이, 제8재상이 직무 유기나 한다고 게르드에 소문이 쫙 돌았잖아!
깨달음이 밀려 들어온 나는 이그드라실을 찾아야 했다.
‘세상에, 이그드라실이여.’
저…… 정말 어쩌다가 이런 인간에게 코가 꿰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