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86화 (8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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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와 아그리스는, 게르드와 오펠보다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내게는 체감적으로 훨씬 길게만 느껴지는 여정이었다.

혼자 가야 했으니까.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아그리스의 성에 도착하자마자 날 맞이한 광신도, 하비에르의 외침이 하늘을 쩌렁쩌렁 진동시켰다.

날 맞이하러 나온 이들이 모두 땅바닥에 무릎을 붙였다.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나는 하비에르의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에요, 하비에르.”

“오랜만에 뵙습니다.”

“얼른 일어나요, 나 너무 창피해요. 근처 사람들도 얼른 가라고 해 줘. 제발!”

내 작은 속삭임에 하비에르는 재깍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비에르가 가볍게 손짓하자 근처 사람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안 오신다고 하시더니? 카림의 말씀만 듣는다고 하셨잖습니까?”

내 시선을 슬슬 피하면서도, 여전히 하비에르의 입은 살아 있었다. 평소의 깐죽거리는 재수 없는 태도는 그대로였다.

“하하하하, 하하, 그게…….”

“아, 물론 잘 오셨습니다. 저는 대환영입니다. 또한 카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나는 주변을 살펴보아야 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릴의 그 특이한 색상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요? 그래서 릴은 어디 있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계신다고는 안 했습니다만.”

“그럼 어디에서 기다리는데요?”

“사막 한복판에서요.”

그 뜬금없는 소리에 멍청한 목소리가 입술 밖을 삐져나갔다.

“……에?”

“카림께서는 사막 한복판에서 이그드라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비에르는 아주 친절하게도,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나는 동그랗게 늘인 두 눈을 끔뻑였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캄신 때문에 오도 가도 못 하고 계십니다.”

끔뻑, 끔뻑.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나는 눈을 수차례 깜빡였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일단…… 릴은 사막 한복판에 있고, 그림자처럼 곁을 따라다니며 수행해야 할 시종인 하비에르는 편하게 아그리스 성에 있고?

이게 무슨 하극상이란 말인가? 말리카의 곁에서 페라엘 샤리프스가 떨어지는 소린데?

“…….”

“혼자 사막으로 나가셨다가 그대로 고립되셨습니다만.”

하비에르가 핑계처럼 덧붙였다. 아주 잠시, 생각이란 걸 한 나는 뒤늦게 물었다.

“……대체 왜 혼자 내보냈어요?”

“그럼 함께 가야 합니까?”

하비에르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아, 저 말투. 오랜만에 들으니까 더 복장이 뒤집히는 것만 같다.

하비에르의 뚫린 입은 열심히 말이란 걸 만들어냈다. 그것도 늘 그렇듯 몇 대 때리고 싶은, 맞는 말을.

“혼자 가시면 혼자 살아남으면 되지만, 같이 가면 함께 간 사람을 살려야 하잖습니까.”

“어…….”

“생존을 위해서라면 혼자 가시는 편이 가장 좋고 효율적입니다. 카림이시라면 샤이탄(악마)의 지옥 끝을 굴러도 안 돌아가실 테니.”

말이 그렇게 되나? 나로서는 도저히 반박할 구석이 없는 소리였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한 대만 냅다 쥐어박고 싶다. 아니, 맞는 말을 하니까 하비에르는 모난 돌이 아닌가?

“이그드라실께서도 아시겠지만 사막의 생명력은 강인합니다. 비만 온다면 굶어 죽을 생명이 없습니다.”

그 말은 맞았다. 모래투성이인 사막이 품고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잠시 쏟아진 소나기에 모래 언덕 안에 잠들어 있던 씨앗은 몇 분 사이에 싹을 틔우고, 몇 시간 내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사막의 척박한 환경은 그런 것을 가능하게 했다. 때문에 태조, 사하크의 비를 내리는 힘은 이그드라실의 내비친 기적보다 더 존중받을 때가 있었다.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보다 더. 당장에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이를 살리는 힘이니까.

“그래서…… 릴은 어디로 나갔는데요?”

마지못한 내 목소리에 하비에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어요. 하비에르는 따라오지 말아요.”

저 광신도가 안내한다니, 앞으로 있을 일에 얼마나 호들갑을 떨어댈지 모르겠다. 내 태도에 하비에르는 딱 잘라 대답했다.

“싫습니다만.”

“명령이에요.”

“그런 명령은 이그드라실의 할머니께서 오셔도 못 듣습니다.”

혈압이 올라 심호흡을 한 나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이, 이 망할 광신도야!

“……솔직히 말해요, 하비에르.”

양손을 허리에 올린 나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야 했다.

“눈앞에서 보고 싶은 거죠?”

“당연한 말씀, 왜 하십니까?”

하비에르는 주어 없는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이어 나름대로 처절하게 절규했다.

“저만 못 봤습니다!”

나는 기막힌 시선으로 이 광신도를 바라보아야 했다. 지금 그게 내 잘못이니? 앙?

“그래서요.”

“매일매일 신앙심을 시험받고 있단 말입니다!”

“……시험받을 정도면 얄팍한 신앙심 아닌가?”

거의 잇새로 말하는 내 목소리를 들은 듯, 하비에르의 두 눈이 희번득하게 번뜩였다.

“제 믿음은 굳건합니다.”

“…….”

그야 이 인간이 광신도이긴 하지만…….

“하지만 눈앞에 이그드라실이 계시는데, 제 앞에서만 기적을 내비치지 않으시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쯤 되면, 이 일을 하비에르가 일부러 만든 건 아닌가 싶었다. 릴에게 일부러 직무 유기하라고 속삭인 거 아냐? 캄신이 부는 곳으로 쫓아내려고?

“……그럼 안 믿으면 되잖아요.”

“이그드라실께서는 이그드라실을 안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본인한테 그걸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라는 거니?

물론 나라고 해도 안 믿을 수는 없지만……. 아니, 이그드라실을 직접 보고 경험했으니 더 믿을 수밖에 없지만…….

하비에르는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며 어울리지 않게도 중얼거렸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시험에 들게 하지…….”

“그건 옆 나라 기도문이거든요?”

“그 정도로 절실한 신도의 마음을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는 살아생전 두 번 다시 이런 광신도를 만나지 못할 터였다.

* * *

그렇게 내가 행한 세 번째 기적.

릴이 향했다던 에스티 사막에 도착하자, 하늘이 황토빛으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나를 반겼다.

나는 거칠게 부는 모래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휘이잉, 거칠고 황량한 소리와 함께 사납게 우짖는 바람은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온갖 것이 날아다니는 게 눈에 보였다. 당장 나조차도 폭풍에 휩쓸려 날아갈 것만 같았지만 겁이 나지 않았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고개를 들고, 캄신을 마주한 나는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 사그라들어라.

자연스러운 명령에 거짓말처럼, 사납게 우짖던 모래 폭풍의 기세가 꺾였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서서히, 느긋하게, 한 줄기 미풍이 되어 청량한 하늘 속으로 녹아든다.

거칠게 모든 것을 삼키던 모래 폭풍은 마치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하비에르가 오오, 하고 감탄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바람이 오롯이 사그라들자 먼발치에 자그마한 오아시스와 대추야자수가 보였다. 그 오아시스 옆에 릴이 누워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모래 위에, 아무렇게나.

반가운 마음이 와락 목소리를 높였다.

“릴!”

내 목소리가 들렸던 걸까. 릴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 너…….”

나는 한달음에 릴에게 달려갔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신기룬가?”

“리일.”

코가 시큰해져서, 울먹이는 소리를 낸 나는 사르르 그 품에 안겨 들었다. 그는 얼떨결에 나를 받아 안았다.

“어…….”

릴의 몽롱한 목소리가 들렸다. 릴은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겨드는 온기를 확인했다.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작은 어깨를 보듬고, 마침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혼내는 듯한 말이 들리는 건 덤이었다.

“내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어, 안 했…….”

“보고 싶었어요.”

내 소심한 고백에, 말을 채 다 내뱉지 못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

이윽고 그가 나지막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나도.”

제법 오랜만의 재회였다. 한동안 그 품 안에서 바르작거린 나는 문뜩 떠오른 것에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근데요.”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눈과 눈이 마주했다. 애정 가득한 푸른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설모는요?”

“응?”

“청설모 없죠?”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그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얘가 지금 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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