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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85화 (8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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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스에 캄신이 심각하게 불어온다고 해도 별걱정은 되지 않았다.

릴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할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내 안에 존재했다. 세상 그 무엇도 릴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설마하니 캄신 한복판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건 자살 행위고, 릴도 생존을 위해 지금까지 발버둥 쳐 온 사람이니까.

또한 이번에는 이상하고도 막연한 자신감이 내 안에 존재했다.

나는 할 수 있다, 싶은 미묘한 확신. 신화에서 등장한 캄신을 잠재우는 일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굳이 이그드라실의 인도를 받지 않아도 가능할 터였다.

“형부.”

어쨌든 간에.

일단 입술을 비죽 내민 나는 툴툴거렸다.

“하비에르가 뭘 보고 싶어 하는지 알겠는데요, 너무너무 잘 알겠는데요……. 정말, 제가 봐도 뻔하게 속이 보이는데요.”

“…….”

내 말에 형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차마 긍정하지 못할 뿐, 형부도 하비에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형부도 하비에르에게 공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형부는 두 번째 기적의 당사자기도 했으니 도리어 더, 마지막 기적을 기대하지 않을까?

그 어떤 것도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보다 강렬한 기억은 될 수 없지만.

“그러니까 하비에르에게 그대로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전 릴의 말만 들어요.”

사실 릴이 당부를 하고 간 사실은 썩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 위치를 생각하면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말리카가 내게 권유하고 간 것에 대한 답도 정해져 있었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 못 한다.

혼전계약서가 떠올랐다. 내가 릴에게 말한 품위 유지와 다르게, 릴이 내게 당부한 ‘최소한의 품위 유지’는 저런 것이었다.

“근데 릴이 떠나기 전에 신신당부하고 간 게 있어요. 마음대로 하면 저도 릴에게 혼나거든요?”

물론 릴이 나를 혼낼지, 혼내지 않을지는 모른다. 적어도 남편보다 후궁의 말을 더 잘 듣느니 어쩌니…… 하면서 날 놀려먹을 건 분명하지만.

“이러다가…….”

나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청설모가 생길지도 모르고.”

“……청설모라뇨?”

형부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형부의 눈은 ‘얘가 뜬금없이 뭔 소리를 하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언니한테 물어보시면 될 거예요.”

언니도 모를 테지만.

아니, 근데 정작 언니 때문에 저 청설모 소리를 알게 된 거 아닌가? 우씨.

“어쨌든 릴은 저한테 걱정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랬거든요. 하비에르에 대해 잘 아니까, 하비에르가 저한테 저런 말을 보낼 걸 알고 저렇게 말한 걸 거거든요.”

“……카림께서요?”

다시금 물어오는 형부의 음성이 얼떨떨했다. 그에 난 다소 멍청한 시선으로 형부를 올려다봐야 했다. 지금 저게 무슨…… 말이람?

그리고 깨달음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형부는 릴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거.

릴은 공식적으로 미친개, 쉽게 말하면 왕실의 망나니였다. 과거에는 나도 릴에 대해 썩 좋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함께 지내다 보니 그에 대한 내 안의 평가가 바뀌었을 뿐.

게다가 요즘 릴은 재상직을 역임하면서 농땡이나 부린다는 소문이 게르드에 쫙 퍼져 있었다. 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이런 사람들이 거의 99%에 해당되겠지만― 퍽이나 좋게 생각할 점이 있겠다.

‘내가 왕족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는 지켜달라고 했잖아!’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러고 보니 직무 태만, 아니, 유기는 저 조항을 어긴 거네?

어쨌건 형부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카림 릴 데스테리언은 나사가…… 한 개는 뭐야, 네 개는 족히 빠진 인간일 터였다. 릴은 언니와 있을 때에도 시답잖은 농담이나 했으니까, 형부는 더더욱 릴을 좋지 않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섬기는 시종이 무슨 생각을 하고 판단할지 예측도 하지 못할 사람이라.

……이거 좀 많이 슬픈 평가 아니냐고. 물론 사람 속을 파악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 실례했습니다. 물론 카림을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의외여서…….”

내가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형부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형부에게서 묘한 걸 깨달았다.

“……형부.”

“예, 이그드라실이여.”

“언니한테 잡혀 살죠?”

내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형부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평소 모습을 보면 언니가 형부에게 져 주는 감이 있는 것 같지만, 부부의 속사정은 둘만 아는 법이다.

입술을 닷 발쯤 내민 나는 중얼거려야 했다.

“부러워라.”

“예?”

“나도 잡고 살고 싶다. 난 왜 잡혀 살지?”

아니, 비단 릴뿐만 아니라 내 근처 모든 사람은―그래 봐야 둘뿐이지만― 왜 날 놀려먹는 거지? 내가 뭘 어쨌다고? 반응이 재미있다는 건 일단 놀려 봐야 아는 일이잖아!

릴은 처음 만난 날부터 꾸준히 날 놀려먹었다. 씨잉, 내가 누구를 이길 수 있는 날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억울하고 억울한 일이다. 아아, 불쌍한 내 인생!

“…….”

급기야 머리를 쥐어뜯는 나를 보며, 형부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그럼 하비에르 솔테에게 이그드라실의 말씀을 전하도록 할게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남긴 형부는 죽을힘을 다해 이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잡을 새도 없었다.

“어, 형…….”

휘이잉.

형부가 떠난 자리에는 허망한 바람만이 불 따름이었다. 나는 형부가 쏜살같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부?”

쳇, 조금만 더 놀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요 며칠은 언니도 찾아오지 않고, 하루 종일 얼마나 심심했다고.

결국 그날도 혼자서 남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새카만 밤이 깊었지만 잠이 들지도 않았다.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천장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서 창문에 기댔다. 혼자 외롭게 떠오른 사막의 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굴, 개굴. 어디에선가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람쥐야.’

더운 바람 틈새로 들리는 것 같은 릴의 목소리. 푸른빛이 도는 광활한 밤하늘에 릴의 모습이 맺히는 것만 같았다.

허상이 내게 손을 뻗었다. 큼지막한 손이 습관처럼 뺨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나는 그 환청에 자그마하게 대꾸했다.

“네.”

‘색다른 곳에서 즐기는 것도…….’

“아니, 왜 저런 게 먼저 떠오르냐고!”

허공으로 손을 휘휘 저은 나는 고함을 질러야 했다. 떠오르냐고, 르냐고, 냐고……. 내 목소리가 밤하늘 밑에 메아리쳤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정말 미쳤지, 미쳤어! 릴과 저런 기억밖에 없나? 조금 더 감동적이고 뜻깊고, 행복한 추억이 없는 거야?

혹시 벌써 욕구불만…… 으악!

‘물들어 버렸어!’

얼굴이 뜨거웠다. 자연스레 고개를 푹 숙였다. 뜨거운 사막의 공기가 뺨을 스쳤지만 그 온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아한 달빛은 변함없이 나를 내리쬐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지금 이 순간, 쓸쓸한 내 마음을 차지하는 생각은 하나였다.

맨날 날 놀려먹는 건 예사고, 괴롭히는 건 덤이지만……. 그래도 남편이라고…….

없으니까 심심하고 외롭네. 심지어 그립기까지 하네. 아련한 환상이 허공에 맺히고 그 느른한 목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바닥에 대고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

언니의 말대로 미친 척하고 쫓아갔어야 하는 건데. 그랬으면 이렇게 땅 파고 있을 일도 없었을 거 아냐.

걱정 말고 얌전하게 기다리라는 말은 왜 해서는…….

‘응?’

토라진 채 입술을 비죽거리던 나는 저 말의 모순을 하나 깨달았다.

‘가만있어 봐.’

‘어디에서’ 얌전하게 기다리라는 말은 안 했잖아?

그러면 굳이 게르드에 있을 이유는 없는 거 아닌가?

말리크께서는 릴에게 부득불 혼자 가라고 명을 내리긴 했지만, 내가 가겠다는데 뭐 어쩔 거야? 나 프리드린 라비아, 이래 봬도 살아 있는 신으로 섬김받는다고.

…그렇게 학을 뗐으면서, 나 스스로도 내가 이런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간에 말리크께서 릴에게 그 어떤 악의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릴은 말리크의 의도에 일말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지만 내가 볼 때는 썩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말리크는 지금 상황에서 말리카냐, 릴이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릴을 선택할 테니까.

더 생각할 건 없었다.

나는 그 길로, 언니의 말대로 미친 척을 하고 아그리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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