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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금슬 좋은 부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소리였다.
말리크가 있는 이상, 말리카는 끝까지 그 자리에 앉아 계실 것만 같았다. 레반 프레이르와 할라 프레이르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로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뭐, 뭐가 어쩌고 저째? 다른 사람을 말리카 자리에 올린다고?
가뜩이나 남편이 바람피우는 꿈을 꾸고 심란한 내게는…… 천지가 개벽할 소리였다.
‘진담이야?’
날 시험하는 소리가 아니고?
덕분에 내 얼굴이 볼만했을 것이다. 혼이 반쯤 나가 있지 않을까.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저…….”
그래도 차마 ‘간밤에 릴이 바람피우는 꿈을 꿨다고요! 가여운 말리카의 마음이 십분 이해돼요! 얼마나 충격적인지 말리크께서는 절대로 모르실 거예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가 저런 말을 해도 절대적으로 릴을 편들 테니까.
“말리카를 하렘으로 돌려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선대에서도 자주 있던 일입니다.”
말리크의 어조는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물론 저 말도 옳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말리카에서 하렘으로 쫓겨난 이들도 제법 찾을 수 있었다. 차라리 정쟁에서 패해 죽는 게 낫다고 평가될 정도로 굴욕적인 일이지만.
그래, 저건 좀……. 많이 거북한 일이었다.
말리카는 남편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실까? 그것도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다정하게 시늉하는 사람인데.
새삼스럽게도 우리 가문의 일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구나, 싶었다. 지금 식구가 몇 되지도 않는 왕실인데 정말 무정하구나.
“할라가 한 짓을 제가 모르겠습니까?”
갑작스런 말에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귀신이라도 보는 눈을 하고 말리크를 바라봐야 했다.
“네, 네?”
“지금 제가 무정하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 정말 얼굴에 생각이 보이는 모양이다. 식겁하고 있을 때에 말리크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라가 어머니께 수작질을 부리는 건 사실입니다.”
“아, 네. 그랬…… 네에에?”
입에서 나가는 대로 내뱉다가 고개를 바짝 처들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아니, 말리크가 지금 또 뭐라고 하는 거야?
눈을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시야 속에서 날 마주한 눈빛은 더없이 진중했다.
진담이구나. 저게 진실이구나.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리크가 인정했다.
“저, 저번에는 릴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지금부터는 이그드라실께 하는 제 고해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어딜 가서 절대 얘기하지 말라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고해고 뭐고, 이런 엄청난 얘기를 함부로 떠들고 다녔다가는 내 목이 쥐도 새도 모르게 떨어질 터였다.
말리크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릴에게 저 일을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제가 인정하는 순간 칼부림이 날 테니까요. 저런 불상사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
그, 그건 그렇지.
릴의 전적을 생각해 보자. 내가 혼전 계약서에 부득불 써넣은 조항이 있지 않나.
4. 릴 데스테리언은 프리드린 라비아의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면 그 어떠한 것도 해치지 않는다.
(단, 바선생은 예외로 한다.)
라고.
릴은 그 강도들을 인간 미만의 무언가라고 얘기했었다. 그래서 강도들을 해치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노라고.
하지만 그때 곤경에 처한 게 내가 아니었다면 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조금 슬픈 얘기지만 강도도, 위기에 처한 사람도 무시해버렸겠지. 그래야 그는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말리카에게서 견제를 당할 일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릴은 내가 자신의 사람이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면 아픈 손가락인 레브아를 아프게 한다면? 정말 눈이 뒤집혀서 난리를 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다시 말리크를 올려다봐야 했다. 레브아는 말리크께도 특별한 사람이지 않았나?
저번 신년회 때에도 말리크와 레브아의 사이는 굉장히 돈독해 보였다. 물론 말리크는 말리카와의 사이도 늘 좋아 보였지만, 정작 이렇게 뒤통수칠 준비를 하고 있네?
겉모습만으로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 같지만, 어쨌든…….
‘왜 가만히 두지?’
말리카를 하렘으로 쫓아낼 생각까지 하고 있다면 이제는 눈치 볼 게 있나? 말리카께는 자식도 없으니까, 새삼스럽게 친정 가문인 라펠리타를 무서워할 이유는 없고.
“제가 할라를 가만히 두는 연유가 궁금하신 눈치십니다.”
악, 이 형제는 독심술을 하는 게 틀림없다. 나는 떨려오는 양손을 맞잡았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었다.
“안, 안 궁금하다면 거짓말인데요오…….”
“다른 사람이 할라와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며, 무엇보다……. 아직까지는 할라를 아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쓰디쓴 음성이었다. 말리크의 얼굴에 조각난 미소가 번져 나났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참고 봐줄 수 있는 선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이미…… 십 년을 넘게 참으신 것 아닌가요?”
“그만하면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그드라실께서 생각하실 때에는 아닙니까?”
아니…… 물론 오래 참은 게 맞긴 하다.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할라도 없었을 겁니다. 요즘에는 회의감이 듭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어디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말리크가 중얼거렸다. 말리크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정작 말리카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부부였는데, 말리크의 마음이 슬슬 말리카에게서 떠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나.’
그러면 릴도 얼마든지 바람을…….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이게 다 언니 때문이야! 책임져!
* * *
릴이 없는 시간은 천천히, 또 빠르게 흘러만 갔다.
언니도 게르드에서 사교 모임을 다니기 시작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심심하고 지겨울 뿐이었다.
덕분에 하루하루는 더디게 지나갔지만 뒤돌아보면 일주일은, 또 한 달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릴에게는 편지가 몇 번 왔을 뿐이었다. 아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사막으로 나가야 했을 때.
편지마다 다람쥐가 보고 싶다, 다람쥐 잡아다가 도토리 먹이고 싶다, 빵빵한 볼을 툭툭 건드려 보고 싶다…… 등등의 이상한 말을 써 둬서 나는 꿈속의 그 말을 생각해야 했다.
바게트만 먹이면……. 크, 크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그드라실이여.”
하고, 드물게 나를 찾아온 형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정말 의외의 방문이어서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부를 바라보았다.
“네, 형부. 형부가 어쩐 일이셔요?”
“…….”
내 대답에 형부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내가 어색한 것 같았다.
…뭐, 별수 없지. 형부와는 가족다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으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도 피하는 마당에.
다만 어려워해도 너무 어려워했다.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 내가 먼저 입술을 열어야 했다.
“언니가 저를 찾던가요?”
“아, 아니에요. 아리엘은 할아버님께 갔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에요?”
“하비에르 솔테가 소식을 전해와서요."
“하비에르가요? 뭐라고요?”
왜 형부에게 전하지?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형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원대하신 카림께서 사막으로 홀로 나가셨는데 캄신이 심각하게 불고 있다고요……. 아무래도 고립된 것 같아, 이그드라실께서 아셔야 할 것 같으니 꼭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음?”
나는 짤막하게 반문해야 했다.
릴은 얌전히 앉아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 하비에르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릴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친절하게 경고해뒀을 테니까.
그런데 뭐, 내가 알아야 할 것 같은 일이라고?
저건 아그리스로 나를 부르는 전언이었다. 하비에르는 왜 부득불 내게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무엇보다 진짜 고립된 거라면 이곳에 이야기가 전달되었을 때에 상황이 끝나있을 텐데.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신화의 한 구절. 그리고 광신도인 하비에르.
하비에르는 정말 광신도였지만, 심지어 릴의 측근이었지만 내가 벌인 ‘기적’을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해 들었을 뿐이지.
지금이 기적을 직접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고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속 보인다, 이 작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