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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83화 (8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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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개꿈. 그 말 외에 이 이상한 꿈을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바람도 바람인데, 풍성했던 머리털이 훌훌 빠져버린 그 장면은…….

‘아니…….’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보다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려서.

내 남편이 대머리라니, 그 무슨 소리요! 하고, 스스로를 세뇌하듯이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짤막하고 강렬하고 날카롭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이라니!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달콤하다는 신혼에!

“이게 다 언니 때문이야아아!”

놀려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저런 걸로 놀려먹냐고! 아니, 놀려먹는 것도 좋으면 안 되지!

나는 이불을 뻥뻥 걷어차며 소리를 질러야 했다. 정말 내 열과 성을 다하여 통곡을 하고 싶은 날이었다.

* * *

그날 늦은 점심이었다.

시퍼런 새벽에 그렇게 깬 이후 한숨도 잘 수가 없었던 내 눈 밑이 새까맸다. 그뿐이랴, 망할 놈의 꿈 덕에 음산한 기운을 팍팍 풍기고 있었을 것이다. 건드리면 꼬리로 때려버리겠어, 싶은 그런 기색.

사람들은 평소에도 내게 잘 다가오지 않았지만 오늘은 더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다. 저마다의 허리를 찌르며 수군대는 건 덤이었다.

그게 서럽고 뭐고 할 순간도 없었다. 꿈에 정신이 팔려서.

‘바람이라니이이……. 진짜 바람이면 어쩌지?’

혼자 생각하는 와중 화가 치밀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허공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뭘 어쩌긴! 때려버릴 거야! 두 번 다시 못 쓰게 만들어버릴 거야!”

……뭘 못 쓰게 만들려고?

본능적으로, 알아서 외쳐놓고도 자연스러운 의문이 뒤따랐다.

내 사나운 음성에 먼발치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언성은 한층 더 높아졌다.

“각방이야! 이혼할 거야!”

내가 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벌이었다. 아니…… 저게 벌이 될 수 있나?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간 거니까 저 두 가지 모두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하려나?

우씨.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람? 역시 못 쓰게 만드는 게…….

‘그러니까 뭘?’

그 바게트?

‘근데…… 애초에 아직 아그리스에 도착도 안 했겠지?’

이어서 든 생각에 나는 흥분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래, 게르드와 아그리스는 가까운 여정은 아니었으니까 마차가 한창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바람은 무슨, 마차에서 하비에르와 마주 앉은 채 지루해 죽겠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겠지.

‘아니, 애초에 마차에 누구 하나 더 실은 거 아니야? 꼭 하비에르와 둘만 타고 있다는 보장은 없는데…….’

이상한 상상이 또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나는 관자놀이를 압박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다니.’

그렇게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을 때였다. 스르륵 나타난 그림자가 내 앞에 무릎을 굽혔다.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네, 안녕하세요……. 제나티 영주?”

심호흡을 하며 무심코 인사를 건네던 나는 이 남자가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제나티 영주는 말리크의 시종 중 하나였다. 시녀 시절 자주 보았던 사람이었다.

시녀 시절 때에는 말단 귀족이었던 내가 저 앞에서 굽실거렸는데, 지금은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다.

내 말에 제나티 영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이라도 줄줄 흘릴 기세였다.

“불초한 저를 기억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깍듯하게도 속삭인 제나티 영주가 내 드레스 밑단에 입을 맞추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겁했던 저 모습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어쨌든 나는 제나티 영주의 행동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말리크의 시종이 여기에는 왜 나타났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말리크께서 이그드라실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 말에 멍청하게 눈을 끔뻑여야 했다. 수많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무려 말리크가? 나를? 왜?

화들짝 놀란 나는 한 박자 늦게 어깨를 들썩였다.

“……네? 저를요?”

“예. 예의를 따지자면 직접 모시러 와야 하지만, 재상 하나가 비어 격무에 시달리고 있으니 양해 바란다는 말씀 전하셨습니다.”

“저를…… 왜요?”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저는 말리크의 명을 하달받았을 뿐입니다.”

제나티 영주가 몸을 바르게 폈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 예바르게도 속삭였다.

“따르시지요.”

어안이 벙벙했지만, 나는 별 불만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설마 그때 가발을 벗긴 사건에 대한 복수를 이제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의심하면서.

대대로 카림에게 내리는 저택과 왕궁은 그렇게 멀 편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까이 두고 얘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지 감시해야 했을 테니.

그렇게 도착한 왕궁, 처음 들어 가보는 말리크의 집무실.

말리크의 집무실은 넓고 아늑했다. 말리카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오래된 천장에는 보석으로 새긴 꽃나무가 있었다. 이그드라실을 의미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조, 존모하는 말리크.”

나를 본 말리크가 재깍 바닥에 무릎을 붙였다. 나는 다소 당황스러움을 머금은 채 말리크와 나란히 자리에 무릎을 붙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저런 생각을 한 지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저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를 바로 깨달았다. 말리크가 이러는 건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부담스러웠으니까.

사실 할아버지가 내게 절을 했어도 소름이 오싹 돋았을 테지만.

“제가 직접 찾아뵙고 용건을 전달해야 했는데, 이곳까지 모셔 온 걸 너그럽게 용서하소서.”

“아, 아니에요.”

“신혼부부를 떼어놓은 것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아주소서.”

말리크는 정말 미안한 얼굴이었다. 저 얼굴에 간밤의 꿈이 떠오른 이유는 왜였을까.

…언니가 신나게 날 놀려먹던 게 떠올랐다. 너무나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날 놀려먹지 않은 사람은 말리크가 처음이었다.

때문일까. 말리크를 올려다보는데 순간적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그건…….”

겨우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말리크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울고 계시잖습니까.”

그 말대로 굵은 눈물이 뺨을 뚝뚝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그놈의 꿈 때문이다. 릴과 말리크가 혈연이기 때문일까, 말리크의 말을 들으니까 자연스럽게 그놈의 꿈이 날 괴롭혔다.

…애초에 울먹거리는 주제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냐.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고 발뺌할 수도 없었다. 먼지가 들어간 거 가지고 누가 이렇게 우냐고!

그래도 원래대로 따지면 시숙인데 솔직히 털어놓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 그게…….”

…나는 말을 더듬었다. 차마 ‘간밤에 릴이 바람을 피우는 꿈을 꿨어요!’라고 일러바칠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 릴이 대, 대, 대머리가 되는 꿈을…….”

"이그드라실이여."

“꿨는데…….”

말리크는 다소 강경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말리크의,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흑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에 깨달은 것 하나.

“지, 지금은 풍성하시잖아요.”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소리였다.

……그리고 바로 내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엄마야, 미쳤구나!

말리크는 그런 날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신께서 지금 절 놀리시는군요.”

“저저저저저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말리크를…… 아야!”

고개를 숙이며 부정을 하던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말리크만 만나면 머리를 어디에 박는 것 같다. 아야야, 혹 나게 생겼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픈 머리를 붙잡고 있을 때 말리크는 제법 다정하게도 속삭였다.

“한동안은 마음 편히 쉬소서.”

“네?”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이그드라실께서도 마음 편히 쉴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랬다. 작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릴과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하하, 뭐…….”

나는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데스테리언에서 나와 릴의 모습을, 특히나 내가 기겁하는 모습을 본 말리크는 나름대로 걱정을 한 모양이다.

이제는 사이가 딱히 나쁠 이유가…… 없지만.

“전 릴이 무한한 가능성을 품었다고 여깁니다.”

애정이 가득 담긴 말이 이어졌다.

“릴도 이그드라실을 얻었으니 이제 날개를 달아야지요.”

……내 귀에는 릴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으로 들렸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릴이 늘 좋다고 말한 내 감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말리카께서는…… 같은 생각을 하시나요?”

“…….”

말리크의 입꼬리에 담긴 미소가 진해졌다. 더없이 냉정한 말이 이어졌다.

“말리카 자리에 항상 할라가 있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소리였다.

“다른 사람을 올리면 그만일 위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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