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그, 그리고!”
“리니, 언니 귀 떨어지겠어. 소리 지르지 마.”
“언니, 나 자꾸 괴롭히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덕인지 목소리도 꽉 막혀 있었다. 덕분에 나름대로, 최대한 무섭게 내뱉은 것이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혼내줄 거야.”
내 말에 언니는 오만한 여왕님처럼 웃어 보였다.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언니를 이기지 못하리란 걸 잘 알기 때문에.
하지만 내게도 최후의 수단이 있다고!
“혼내? 네가 날? 어떻게?”
“양 뺨에 하루 종일 뽀뽀할 거야!”
“얘, 얘가!”
내 최후의 수단에 언니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학을 떼는 언니의 모습에 괜히 뿌듯해졌다.
후후, 드디어 이겼다! 언니를!
승리감에 도취해있기도 잠시. 오늘도 역시나, 언니는 주먹을 휘둘렀다. 꽁! 돌덩어리와 돌덩어리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유쾌하게도 울려 퍼졌다.
알싸하게 아파오는 머리를 움켜쥔 나는 눈물이 핑 감돈 눈을 들어 올렸다.
“힝, 대체 왜 때려!”
“그런 거 너 남편한테 하라고 했어, 안 했어?”
저기요, 남편이랑은 뽀뽀로 안 끝난다니까요? 그 인간이 얼마나 밝히는지 언니가 알면 절대 저런 말 못 한다고.
“아 참, 남편이 여기에 없지? 외로워서 자꾸 그러는 거면 백 보 양보해서 이해해 줄게. 어때, 언니가 좋은 곳 좀 데려다줄까?”
“좋은 곳?”
자연스레 되물은 나는 생각했다. 좋은 곳이라면…….
……아니, 이럴 때 좋은 곳이라고 말할 법한 곳이 하나밖에 더 있나. 놀고 마시고 노는 곳!
물론 내가 직접적으로 말을 하면 언니는 딱 잡아떼고 볼 게 틀림없었다. 언니는 릴하고 같은 과니까. 놀릴 건덕지를 하나 더 잡았다고, 아마 일 년은 저걸로 놀리겠지?
어쨌든 뒤늦게 말뜻을 알아들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니!”
습관처럼, 빠르게 근처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자꾸…… 자꾸 그러면 형부한테 다 이를 거야.”
“뭘 일러? 리니, 내가 무슨 짓 했니?”
천연덕스럽게 묻는 것에…… 할 말이 없었다. 언니가 한 짓이라고는 날 놀려 먹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남편이 바람을 핀다고! 그러니까 날 좋은 곳에 데려다준다고!
언니도 진짜로 그 좋은 곳이라는 데에 가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드나들었다면 아버지께 머리털이 빡빡 밀렸을 테니까.
“리니.”
“응?”
“난 내 뺨의 순결을 지켰을 뿐이야.”
언니는 보란 듯 자신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두 눈이 예쁘고 얄밉게도 휘었다.
“네 뽀뽀를 거부했다고 하면 클리드가 뭐라고 할까. 아주 좋아하지 않으려나?”
그야…… 언니네도 만만치 않은 닭살 부부니까. 형부도 나한테 언니를 빼앗기는 건 별로 바라지 않는 게 아닐까?
내가 입술을 달싹거리자 언니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디 한번 일러봐. 이 언니는 아주 친절하게, 한술 더 떠줄 수가 있어요.”
“한술 더 뜨다니?”
나는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역시나 우리 언니는 내게 져 주는 법이 없었다.
“카림도 안 계시겠다, 네가 좋은 곳 놀러 가고 싶다고 했다고?”
“그건 언니가 한 말이잖아! 왜 나한테 뒤집어씌워!”
“그걸 누가 알겠어? 저러면 우리 여보야가 내 말을 믿을까나, 네 말을 믿을까나?”
당연히 언니 말을 믿겠지. 증거 하나 없는데, 형부가 친하지도 않은 내 말을 믿을 이유가 없잖아!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하는 것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왜 언니까지 치사하게 팩트로 날 때리는 거지?
‘이거 남편이랑 멀리 떨어진 사람은 억울해서 살겠냐고.’
엉엉, 떨어진 지 하루도 안 되어서 릴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언니 덕분에!
* * *
언니의 짓궂은 놀림 때문인지, 그날 밤은 악몽 아닌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릴은 처음 보는 예쁜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언니의 말대로 나보다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여자였다.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를 보는 것처럼 정말 눈이 부셨다.
한동안 나도 넋 놓고 여자를 바라볼 정도였다. 와, 저런 사람이라면 나라도 바람이 나겠네.
아주 잠깐 멍청한 생각을 하던 꿈속의 나는 잠시 후에 정신이란 걸 찾았다.
― 릴!
내 외침에, 여자의 몸을 다정하게 지분거리던 릴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여자를 가리키는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 그…… 그 여자 누구예요?
― 얘?
릴이 여자를 향해 제법 무심하게 턱짓했다. 항상 날 어루만지던 손이 여자의 날씬한 허리를 쓰다듬었다. 여자는 그런 릴을 내려다보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내 눈에서 불똥이 튈 때 그가 느긋하게 속삭였다.
― 청설모.
지극하게 릴다운, 그 엉뚱한 말. 덕분에 삿대질을 하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그대로 딱 굳었다.
― ……네?
― 넌 다람쥐고, 얘는 청설모야.
왜 둘 다…… 설치류인 겁니까?
릴은 보란 듯, 능숙하게 여자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평소에 내게 하던 모습이 눈앞을 스쳐서 내 여린 속을 더 뒤집어놓았다.
― 둘 다 바게트만 먹이면 되니까 참 편해. 그렇지?
다람쥐와 청설모는 도토리를 먹는 게 아닌가요? 웬 바게트…….
몽롱한 머리로 생각을 이어 나갈 때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어, 엄마야! 저게 그 뜻이었어?
꿈속의 릴은 환하게 웃으며 친절하게도 속삭였다.
― 앞으로 먹을 거 가지고 얘하고 싸우면 안 된다? 공평하게 한 입씩 나눠줄 생각이거든. 근데.
릴이 여자에게서 손을 떼고 내게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단단한 검지가 통통한 내 뺨을 툭 건드렸다.
― 넌 이미 볼이 빵빵하네.
음성이 은밀하게도 물들었다. 통, 통.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내 뺨이 탄력 있게 출렁거렸다.
― 바게트를 얼마나 넣어둔 거야? 욕심 부리다가는 얹힌다?
빨간 딱지를 붙여야 할 것만 같은 발언에 내 얼굴이 확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후다닥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검기만 한 공간에 내 발 소리가 아득하게 메아리쳤다.
― 다, 다, 다, 당신!
― 응?
― 지…… 지금 바람피워요? 날 두고?
― 바람이라니. 합법적 결혼 사업이라고 해 줘.
내 꿈속에서마저 뻔뻔한 릴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기가 막혔던 내 목소리가 떨렸다.
― 뭐…… 뭐라고요? 결혼 사업?
― 응, 결혼 사업.
― 그게 뭔데요!
― 뭐긴, 말 그대로의 의미지. 그런데 일처다부제를 먼저 실현한 건 너였다?
― 내, 내가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요!
아득바득 따지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정막 억울했다. 내가 언제 일처다부제를 실현했어? 남편이 여럿이긴 무슨, 연애 한 번 못 해본 순진한 처녀였단 말이야!
― 날 뒷방 후궁 신세로 만들었잖아.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가 저지른 옛 잘못이 떠올랐다.
…저거에 한이라도 맺혔던 듯, 릴의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에 비소가 피어올랐다.
― 나한테는 한 번도 안 해 줬던 남편 소리를 첩에게 먼저 해 주고 말이야.
― 아니…… 그건…….
나오지 않는 말이 있었다. 하비에르가 남편이라니, 그 무슨 끔찍한 소리야! 나도 싫단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나름대로 사정이란 게 있었다고! 지금은 꿈도 꾸지 않는 일이지만.
릴은 씨익, 평소와 다른 조각난 미소를 덧그리며 속삭였다.
― 네가 너무했거든? 그러니까 나도 똑같이 했을 뿐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옛날 법전은 존중해야지.
순간 딱딱하게 굳은 나는 릴을 올려다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해서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이 순간, 내 뺨을 나긋하게 어루만지는 손이 한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이윽고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이어졌다.
― 우리 아내님은 정말 너무하지. 나만큼 모자람이 없는 남편이 어디 있다고.
모자람이 없……?
그 순간 바람이 살포시 불어왔다. 그의 머리털이 바람에 날아갔다. 자신의 자리를 이탈한 애쉬 그레이빛 머리카락이, 검은 허공에 비화처럼 훌훌 흩날렸다.
머잖아 미끈하기 그지없는 두피가 세상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반짝, 맨들맨들. 어두운 곳을 환하게 밝히는 그 민머리. 기름을 칠한 듯 미끈한 그곳에서 반사광이 흘러나왔다.
릴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없던 듯 손이 자꾸만 머리 위에서 미끄러졌다.
“꺄아아아악!”
그대로 비명을 지른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 누워있던 넓은 침대가 한없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괜히 근처, 항상 릴이 누워있던 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푹신푹신한 이불만 만져질 뿐이었다.
손끝을 덜덜 떤 내 머릿속에 꿈의 내용이 그려졌다. 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개꿈이냐고!’
개꿈도 이런 개꿈이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