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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이 말한 바에 따르면, 나는 저렇게 신화 속에 언급된 세 가지의 기적 중 두 가지를 해냈다. 릴 자신도 딱 신화에서 언급한 만큼의 능력을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 해내지 못한 기적, 캄신에 대한 것은 신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일이었다. 나머지 두 가지는 그나마 해석의 여지가 다양해서 역사가들이 추측해낸 것에 가까웠지만, 캄신은 대놓고 이그드라실께서 가라앉힌 자연재해였다.
그러니 캄신은 내가 자연스럽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그러면 혹시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무엇보다 형님께서는 너는 가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언니는 얼굴에 철판 깔고 쫓아가라고 하던걸요.”
내 말에 릴이 웃음을 머금었다. 다른 때였다면 배꼽을 잡았겠지만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그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목소리가 바들바들 진동했다.
“처형답네, 처형다워.”
그렇지, 통통 튀는 매력이 있는 우리 언니다운 말이지.
릴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프리드린.”
“네에.”
“너도 잘 알겠지만 형님께서도 신화의 내용을 모르실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굳이 아그리스에 나만 가라는 건…….”
생각을 이어 나가는 듯 릴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이게 다 릴이 직무 유기해서 그런 거예요.”
“유기라니, 너무하다. 너와 일 분 일 초라도 더 오래 함께하고 싶은 내 발버둥이었다고.”
“그게 진심이라고 해도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다고요. 차라리 성실하게 일하고 돌아와요. 그게 차라리 멋있어 보여.”
누가 그런 발버둥을 직무 유기로 하냐고! 라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겨우 집어넣어야 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까.
“늘 말하지만.”
릴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는 시늉을 했다.
“항상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당연한 게 된다?”
“그건 맞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을 해 봐. 지금은 내가 놀고먹고 일을 안 하는 게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열심히 했다면 지금쯤 일에 깔려서 압사했을걸? 어쩌면 세린 재상의 자리가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몰라.”
궤변도 저런 궤변이 없었다. 그런데 묘한 설득력이 있다는 게 함정이다.
나는 괜스레 연설을 하고 있는 말리크의 뒷모습을 한 차례 바라보아야 했다. 4355년의 신년을 맞아…… 작년에 이그드라실께서 재림하셔서 보이신 기적이 어쩌고…….
그러면서 스리슬쩍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건 덤이었다.
‘으아아악!’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내가 듣기에는 굉장히 낯간지러운 말이 이어졌다. 쥐구멍 어디 없나.
어쨌든 저런 말리크의 태도를 보면 정말, 릴을 제1재상으로 삼고도 남을 수도 있긴 하지. 정말 저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람쥐야.”
릴이 내게 훅 손을 뻗었다. 미려한 손끝이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다른 때였다면 정수리 쪽에 손을 대 헝클어뜨리고 보았을 텐데, 오늘은 열심히 꾸며댄 시녀들의 성의를 봐서인지 부드럽게 곱슬거리는 한 가닥을 매만졌다.
“네에.”
“만에 하나 내가 캄신 때문에 실종된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마.”
릴이 가정하는 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어지는 말은 제법 진지했다.
“나 안 죽으니까.”
나는 양손의 검지를 모았다. 양 손가락에 힘을 줘 꾸욱 밀쳐댔다.
불안한 아이처럼 손장난을 해대는 나를 보며 릴은 늘 그렇듯 눈을 휘어 보였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내가 품은 기묘한 불안감은 삐딱한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지금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요.”
“어허.”
릴이 짐짓 눈을 부라리는 시늉을 했다. 나를 혼내는 것처럼.
“예쁜 말 해야지?”
“혼전 계약서에는 그런 말 없거든요?”
“잔소리해도 된다는 조항은 있고?”
“물론…… 그것도 없긴 한데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애초에 혼전 계약서에 누가 저런 조항을 쓴다고.
…아니, 저런 사소한 건 둘째 치고. 중요한 건 다른 문제였다. 릴을 올려다본 나는 양 뺨을 둥글게 부풀렸다.
“내가 잔소리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그러세요?”
“얼마나 한다니. 잔소리를 하는 본인만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이네.”
“네?”
“너, 네 잔소리가 얼마나 심한지 모르지? 너 잔소리 안 하는 날이 없어.”
“내, 내가 언제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내가 정말 잔소리를 언제 했다고?
그런 나를 응시하는 푸른 눈에 장난기가 번뜩였다.
“지금도 하고 있잖아. 일 안 했다고.”
“그게 왜 잔소리예요. 애정이 가득한 투덜거림이지.”
내 대꾸에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길이 그대로 멈추었다. 그 손끝이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릴과 함께 놀고 싶은 제 필사적인 발버둥이라고요.”
내가 이어서 속삭이자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한마디 했다.
“너…… 나 닮아 간다?”
“닮아 간다뇨. 일부러 따라 하는 거거든요?”
릴이 순간적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내 말에 할 말을 오롯이 상실한 모양이었다.
“봐요. 당신도 들으니까 기막히죠? 어이없죠? 내 심정 잘 알겠죠?”
“아니.”
늘, 항상, 언제나 뻔뻔하기 그지없는 릴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의 앞머리를 한 차례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언제나 맞는 말만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
……아, 씨! 절대 져 주는 법이 없지, 이 아저씨야!
* * *
말리크께서는 릴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신년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당일, 거의 쫓아내다시피 릴을 아그리스로 보내버렸다.
준비를 하고 뭘 하고 할 시간도 없었다. 이미 계획을 다 짜두었던 모양인지, 릴은 정말 마차에 몸만 실었다.
“미친 척하고 쫓아가라니까?”
그리고 소식을 들은 언니는 눈썹이 휘날리게 쫓아와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과 화병이 위로 들썩였다.
그 서슬 푸른 기세에 나는 추위에 몸을 떠는 원숭이처럼 몸을 웅크려야 했다.
“리, 릴이 오지 말라던걸. 여기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래.”
“카림께서?”
되물은 언니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지?”
“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카림이 아니란 말이야.”
아마 말리크의 명을 거부하기가 조금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말리크의 말은 무척이나 잘 들으니까.
예전에 데스테리언에서, 하비에르와 릴이 했던 대화가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나와 결혼한 게, 표면적으로나마 릴이 말리카에게 완벽하게 굴복한 시늉으로 받아들여졌다던가?
그러면 지금 나를 데리고 내려간다면 그게 말리크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 이러나저러나, 릴에게는 말리크가 명령한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저렇게 추측했지만, 언니의 얼굴은 별안간 심각해졌다. 얼굴 반쪽에 어둠이 내리깔린 것만 같았다.
“쥐새끼야.”
“응?”
언니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윽고 하는 말이란.
“그거, 바람이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내 얼굴을 본 언니는 재차 설명했다.
“내 감이 말하고 있어. 아그리스에 여자를 숨겨 두신 거야. 그러니까 네가 함께 가면 난감한 거고.”
“언니의 감은 늘 틀리잖아.”
“말리크께서도 알고 계시니까, 형제가 짜고 너를 속인 거지.”
언니는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늘 그렇듯 자기가 할 말만을 내뱉었다.
“너보다 예쁘고, 가슴도 크고 늘씬한 사람일 거야.”
그야 나보다 예쁘고 몸매 좋은 사람은 많겠지. 그런데 언니 말 덕에 괜히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는 거다.
릴이 나보다 예쁜 여자의 가냘픈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아,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상상만 해도 울적해지는 기분이다.
반대로 나보다 못생긴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도 떠올랐다. 으,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자존심이 팍팍 상했다.
이러나저러나 두 가지 상황에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그대로 내 자신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든다는 거.
그런 내 기분을 모를 언니는 한 술을 더 떴다.
“놀렸을 때 반응도 더 재밌지 않을까?”
“……아니야아.”
그 말에는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으로 언니를 바라봐야 했다.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 없어.”
“그건 모르는 거야. 미리미리 단속 잘해. 당장 쫓아가 보고.”
“세상에 나보다 반응이 재미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 말에 언니는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어냈다. 허공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드리웠다.
“지금…… 그게 문제였니?”
“당연하지!”
아마 릴이 나름대로 날 귀여워하는 이유는 저런 게 아닐까? 괴롭히는 재미! 그에게 먹힐 법한 매력은 저것뿐이었다.
……서글프고 가슴 아픈 매력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