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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단의 조치라뇨.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아?”
당연하게도 릴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정말, 이그드라실께 맹세하건대, 릴이 저렇게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통상적으로 말리크가 저런 말을 하면 고개부터 조아렸을 텐데, 형제는 형제였다. 릴은 내가 언니에게 그러는 것처럼 말리크에게 툴툴거렸다.
“대체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항상 생각하지만 릴은 지나치리만치 뻔뻔했다. 난 기막힌 시선으로 릴을 흘끗거렸다. 저기요, 남편님. 그 말씀은 너무한 거 아니요?
‘잘못은 했잖아!’
말리크는 직무 태만이라고 유하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태만보다는 유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짓을 하지 않았나?
하루 종일 자고 빈둥거리고, 다른 재상들에게 일거리와 부담을 안겨줬다는 고자질이 있었잖아. 덕분에 우리 할아버지 눈 밑 시커먼 거 보라고!
“좋은 말로 해서는 들어먹지를 않으니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
말리크의 목소리는 더 없이도 강경했다. 그런 말리크가 무서웠던 건지, 릴은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내가 볼 때에는 마냥 신기한 광경이었다. 말리크에게 혼나는 릴이라니, 심지어 꼬리를 말다니.
릴은 말리크가 아버지 같은 형님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걸 지금 피부로 선명하게도 느꼈다. 나도 아버지가 야단을 치면 일단 꼬리를 말고 ‘잘못했어요!’라고 사죄하고 볼 테니까.
다만 말리크가 이어 내뱉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혹시나 오늘 당장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음 말리크는 너다.”
“형님!”
“레반!”
릴과 말리카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지르다시피 말리크를 불렀다. 물론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끔찍했던 듯 서로를 노려보며 몸서리를 쳤지만 말이다.
‘저렇게나 싫을까.’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야 했다. 저러는 걸 보면 두 사람이 의외로 잘 통하는 것 같은데.
…뭐, 이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자. 애초에 지금 말리크의 발언은 릴과 말리카, 둘 모두 농담으로만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긴 했다. 레브아도 조심스레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레반, 내 생각에도 그 발언은 정도가 지나친 것 같구나.”
어라라.
혹시 나도 지금 ‘말리크시여!’라고 외치며 말을 막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순간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천만다행히도 말리크는 내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어머님, 사람이 죽고 사는 건 한순간의 일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겠단 말이니?”
말리크의 태도에 레브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어 인자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정말로 말리크를 아낀다는 게 태도에서 묻어 나왔다.
“레반, 그런 생각은 옳지 않아. 난 자식을 앞세우는 어미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늘 만발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이 프레이르를 위한 길이니 이 정도는 어머니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레브아의 태도와 다르게 말리크는 더없이 뻣뻣했다. 혹시 릴을 재상으로 삼은 게 후계자 교육을 시킨다든가…… 뭐 그런 뜻은 아니겠지?
릴은 기겁하며 대꾸했다.
“형님, 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입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부담감 가질 것 없다. 사실과 현실을 말했을 뿐이니.”
“형님께서 그러시니…….”
릴이 오만상을 일그러뜨렸다. 이제는 하다 하다 말리크까지 저렇게 나오니 짜증이 날 법도 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냥 제가 나쁜 놈 할게요.”
“알면 됐다.”
말리크 역시 져 주는 법이 없었다. 그에 평소에 릴과 내가 투닥거리는 모습이 떠오른 이유는 왜였을까.
……릴이 내게 져주기 싫어하는 걸 말리크에게 배운 게 아닐까, 괜히 생각하게 된다. 습관이 되어 이겨야 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말리크를 바라보던 릴이 속삭였다.
“이 나쁜 놈이 형님께 새해 덕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디 한번 해 보렴.”
“아름다운 말리카와 형님께서는 늘 사이가 좋으시지요. 두 분의 다정함에 올해는 저도 조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말리크에게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럴 일은 없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릴이 말리카께 할 수 있는 정말 최고의 덕담이었다. 비꼬아서 듣지 않으면 다행이긴 하지만.
옆에서 사이좋은 형제의 입씨름을 구경하던 말리카가 아름다운 두 눈을 반달로 접었다. 물론 꾹 움켜쥔 손은 파들파들 진동하고 있었다.
“어머. 카림께 그런 말씀을 들을 줄은 몰랐군요.”
“그러게나 말이다. 허나 그건 내가 할 말이구나.”
말리크의 눈이 나를 한 차례 돌아보았다. 두 눈이 온화하게도 반짝였지만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는 날 기겁하게 했다.
“나도 조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아니!’
비명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삼켰다. 순간 식겁한 나는 자연스레 자리에서 버둥거렸다. 대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더 반항심이 생기잖아!
“저희는 아직 십 년은 이르죠. 결혼한 지 아직 일 년도 안 됐습니다. 프리드린도 아직 어리고.”
다른 때였다면 날 놀려 먹었을 릴이 부드럽게 방패가 되었다. 예전에 데스테리언에서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의외로 든든한 남편이었다.
…평소에 조금만 날 덜 놀리면 진심으로 고마워서 절이라도 올릴 텐데 말이다.
“그래, 너희는 아직 느긋하게 생각할 때도 될 때긴 하다. 정말 아쉽지만 내가 조금 더 기다려야겠구나.”
말리크가 부드럽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지. 일 보 후퇴는 이 보 전진을 위한 전략적 행동이라고.
“릴.”
“예.”
“지금 서부 지방에 건기가 시작된 건 알고 있지?”
말리크가 부드럽게 운을 떼었다.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다만 말을 듣던 말리카는 입술을 짓씹었다. 릴이 관자놀이를 잠시 압박했다.
“예, 가뭄이 심각하겠네요.”
“아그리스가 유독 심각하다고 하더구나.”
아그리스는 프레이르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사실 말리크가 저렇게 말을 하긴 하지만, 건기 때의 가뭄이야 늘 있는 일이었다. 가끔 심각해질 때도 존재하기야 하지만 늘상 있던 일이니 대비를 철저하게 해 두는 편이었다.
혹시나 그 대비가 쓸모없어졌더라도 걱정할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비를 불러올 수 있는 릴이 있었으니까. 지금 일에도 가장 적격인 사람이었다.
“다녀오거라.”
말리크의 명이 떨어졌다. 동시에 신민들에게 인사를 마친 재상들이 자리로 되돌아왔다.
재상들이 착석하자 말리크가 다시금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마디 더 이어졌다.
“너 혼자.”
할아버지의 걱정에 찬 말씀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내 머릿속에는 미친 척하고 따라가라는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어느 정도 쓸데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막 나가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싶은.
릴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던 듯 별다른 반발은 하지 않았다. 나지막한 한숨 끝에 말리크를 얽었을 뿐이다.
“형님…….”
“귀환할 곳이 생겨야 너도 필사적이 될 테지. 이그드라실께서 함께하셔 봤자 오펠에 보냈을 때처럼 너 좋은 일만 시키는 꼴 아니더냐?”
“좋은 일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펠에 있을 때 나름대로 힘들었다고요. 할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천생 놀고먹는 게 체질인 사람처럼, 릴이 투덜거렸다. 말리크의 웃음기 서린 음성이 들렸다.
“그래, 거기서는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일을 했다고 하더구나.”
“…….”
“거기서 한 걸 여기서 못 하겠더냐?”
릴은 어두운 얼굴로 말리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정말 하기 싫다고!’라고 써 있다고 느꼈다면,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겠지?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이번 기회에 깨달으면 좋겠구나.”
그대로 걸어간 말리크는 다시 신민들 앞에 나섰다. 길고 긴 신년 축사가 시작되었다.
시녀일 때에는 말리크가 신년 축사를 읊을 때에 꾸벅꾸벅 졸았었는데. 너무 지루해서.
하지만 지금은 졸 시간이 없었다. 나는 릴의 허리를 쿡쿡 찔러야 했다.
“……제가 뭐랬어요. 나 혼자 두고 가야 하잖아요.”
내 볼멘소리에 릴이 슬그머니 입술을 열었다.
“…….”
그러다가 다시 조용히 다물었지만.
릴의 태도가 의아했던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그래요?”
“아니.”
릴은 또다시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건기인 건 둘째 치고……. 지금은 아그리스에 캄신이 불 시기거든.”
신께서 행하사, 사납게 우짖던 캄신이 가라앉고, 메마른 땅에 녹음이 우거지며, 영원히 눈을 감고 숨을 멈춘 이가 우거진 녹음 위를 거닐었더라…….
신화의 한 구절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