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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76화 (7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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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잠깐만이야.”

“여, 여기서 나눠 주겠다고요?”

나는 본능적으로 가슴 근처의 옷자락을 여미며 버둥거렸다. 내 모습을 바라본 릴은 장난스럽게 눈을 휘었다.

“어라.”

익숙한 그 말버릇. 하지만 익숙하기 때문에 날 더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것도 당연했다. 이젠 너무나도 잘 아는 것들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내 아내님께서는 피로 회복제를 뭐라고 생각하신 걸까.”

“그야……!”

당신이 생각할 건 뻔하잖아! 이런 짓, 저런 짓! 그리고 요런 짓까지! 다양하긴 해도 기승전 살색의 향연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잖아!

내 눈에 담긴 선명한 말을 읽은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그렇다고 안 될 건 또 뭐야?”

“…….”

분명 장난스럽게 하는 말인데, 나는 결단코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릴 데스테리언이라는 남자가 어떨 때 저런 시선을 하고 저런 목소리를 내는지 잘 아니까.

엄마야, 큰일 났다. 긴장을 집어삼킨 나는 그의 밑에 깔린 채 또다시 버둥거렸다.

“내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내님과 놀겠다는데.”

살포시 움직인 손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옷자락을 파고든 익숙한 온기가 조금 더 바짝 다가붙었다. 히죽, 얄밉게도 눈을 휜다.

“누가 뭐라고 할까.”

“지, 지, 지금 제가 뭐라고 하잖아요!”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근데 뭐라고 하는 이유가 뭐야?”

그냥 넘어갈 기세가 아니었다. 그야 당연하고도 뻔한 이유가 있잖아! 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혹시 하녀라도 지나가면 어떻게 하려고!

“이럴 거면 차라리…….”

불쌍한 나는 가냘프게 달달 떨며 속삭여야 했다. 평소였으면 결단코 말할 수 없던 소리가 이런 상황이니까 잘도 튀어나왔다.

“……치, 치, 치, 침대로 가요.”

“어라.”

날 내려다보던 릴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색기 가득한 웃음이었다.

은근하기 그지없는 손길이 뺨에 닿았다. 천천히, 소중하게 보듬듯이 어루만지는 행동에 아낌없는 애정이 묻어 나왔다.

그 애정 가득한 손길에 오금이 저려 들었다. 발끝까지 진동시키는, 나도 잘 아는 이름의 감각이 온몸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많이 대담해졌네.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할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이게 다 누구한테 물들어서 그런 거잖아요.”

반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그는 날 여러 의미로 울리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크, 크흠.

어쨌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했던 내게 당신이 이런 짓, 저런 짓 가르쳐서 그런 거잖아! 흑흑,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했지?

이어진 발악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 순수함 좀 돌려달란 말이에요. 나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오, 그건 딱 잘라 거절할게.”

왜, 어째서! 눈으로 외치자 릴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프리드린.”

“왜요?”

“저번에도 말한 것 같지만, 부끄러움 많은 게 귀여운 건 한순간이라니까.”

지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보다는 귀엽지 않은 게 나았다. 사람은 귀엽지 않아도 되지만, 수치심이 무엇인지는 알고 살아가야 하는 법이다.

지금 릴은 지나치게 당당했다. 아니…… 내 반응을 보고 즐기느라 저러는 거겠지?

“너, 예전에 나하고 약속했잖아. 앞으로 종종 코피 좀 터뜨려 주겠다고.”

기억 속에 아득하게 파묻힌 일이었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저 날의 일.

물론…… 난 베개로 얼굴을 맞춰서 코피를 터뜨리겠다는 거였지. 섹드립 아니었단 말이야!

하지만 저걸 또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릴의 재미만 더해줄 것 같았다. 밤새도록 날 놀려먹어도 모를 일이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발뺌하고 보았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어라. 난 분명히 기억하는데. 그 이후에 내게 휘두르던 폭력까지.”

“폭력이라뇨!”

이건 정말 발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훌륭한 단어 선정에 나는 재빨리 근처를 돌아봐야 했다.

다행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졸졸졸, 작은 연못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을 뿐.

“오해하기 좋은 말씀 하지 말란 말이에요! 누, 누가 들으면 제가 폭력이나 휘두르는 줄 알잖아요!”

“누가 듣는다고. 그리고 들으라고 그래.”

내 위에 올라탄 릴은 마치 모든 것을 내어주겠다는 듯, 숭고한 표정을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아내님이 날 좀 때리겠다는데 못 맞아줄 이유도 없잖아? 마음껏 때려.”

나는 순간적으로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이, 이 인간이? 혼전계약서에 폭력 금지 한 줄 추가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아, 근데 이왕이면 손발 말고 다른 걸로 때려줄래?”

“손발 말고요? 베개로 때려요? 아니면 회초리로요?”

“예를 들면 깜찍한 입술이라든가…….”

은근한 여운을 남긴 그의 눈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내 붉은 입술을 탐미하듯 바라보더니 그 밑으로, 점점 더.

그 노골적인 시선에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 이 인간이 점점 더…….

결국 참다못한 나는 릴을 냅다 밀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연못에 발을 담그고 놀고 있었다는 사실.

남자의 거구가 그대로 연못으로 날아들었다. 풍덩! 척 듣기에도 시원한 소리가 사방을 적셨다.

순식간에 물속에 몸을 기댄 릴이 눈을 끔뻑거렸다. 축 젖은 옷이 그의 몸에 들러붙었다. 잔근육으로 꽉 짜인 더없이 익숙한 몸이 석양 아래에서 아름답게 반짝였다.

어느덧 릴의 머리 위에 앉은 초록빛 개구리 한 마리가 개굴개굴 울어대기 시작했다.

괜한 미안함이 치솟았다. 하지만 미묘한 자존심이 있던 나는 사과는 하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어라. 흠뻑 젖었네요.”

“…….”

내 말을 뭐라고 받아들인 것이었던지. 릴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서렸다.

이윽고 그가 손을 뻗었다. 단단하고도 뜨거운 손이 내 손목을 거미줄처럼 결박했다.

그대로 그는 나를 잡아당겼다. 휙! 찰나의 순간, 내 여린 몸이 허공을 날았다. 바람의 저항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나도 그대로 연못에 입수했다.

제법 차갑게 느껴지는 물이 온몸을 적셨다. 그렇게 깊지 않은 물속에서 버둥거린 나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꺅!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뭐긴.”

웃음기 서린 목소리는 의외로 낮게 가라앉은 채였다. 이어 나를 발끝까지 새빨갛게 만드는 한마디가 이어졌다.

“늘 젖는 건 너잖아.”

……저 말이 외설적으로 들렸다면 지금의 난 정말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야, 내 머릿속에 어쩌다가 이런 마귀가 낀 거야!

“너, 가끔 한 마디씩 던지는 게 정말……. 이상한 데에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니까.”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는 당신이 이상한 거라고!

내 다리 밑에 손을 집어넣은 릴은 그대로 나를 안아 들었다. 다소 갈급하게 입을 맞춰오며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그날 밤은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 * *

언니는 신혼이 무엇보다 달콤한 날이라고 했었다. 물론 언니와 형부도 아직 신혼부부지만.

나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릴이 열심히 날 놀려먹긴 하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으니 그렇다 치고. 꽤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이었다.

그렇게 릴이 재상으로 출근한 지 딱 일주일이 되던 날의 일이었다.

“이그드라실이시여…….”

분명 국정을 돌보고 있을 시간에, 날 찾아온 할아버지가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카림 좀, 제발 카림 좀 말려 주소서.”

갑작스런 말에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카림께서 사고라도 치셨어요?”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걱정이 앞섰다.

어딜 가서 사고를 당할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고를 칠까 봐 걱정하는 것도 상당히 우습지만 말이다.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반대라서…… 문제입니다.”

“네? 반대라뇨?”

“아무것도 안 하십니다.”

할아버지가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아무래도 릴이 카림이 아니었다면 할아버지 손에 종아리가 남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굉장히 바른 사람이었는데, 그게 다 할아버지의 엄격한 교육하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할아버지는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분이셨다.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이기도 하셨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서 졸고, 그러다 주무시고……. 참다못한 저희가 한마디 하면 심드렁하게 귀를 후벼 파시며 말씀하십니다. 잘 시간이 모자라서 여기서라도 주무신다고요.”

“…….”

할 말을 잃은 나는 입을 달싹였다. 저건 너무 노골적으로 ‘제발 나 좀 잘라줘!’라고 말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싫다는 사람을 왜 억지로 데려다 놓아서는…….

뭐가 되었든 우리 할아버지가 견딜 법한 일은 아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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