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새빨갛게 물든 나는 겨우겨우 중얼거렸다.
“왜…….”
“응?”
“다, 당신에게 중요한 건 그 과정이잖아요!”
“오호?”
릴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짓궂게도 물어온다.
“과정이라니. 어떤?”
“지금 날 놀려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그, 그…… 그…….”
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물론 나도 그…… 그놈의 과정이 싫은 건 아니지만…….
오펠에서 보냈던 밤 이후 그와 딱히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팠고, 병이 나은 직후에 언니를 쫓아가고, 그 이후에는 그놈의 기적 때문에.
뭐가 되었든 간에 차마 나오지 않는 말 덕에 울상을 지어야 했다. 왜 아직도 말을 못 하냐고!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가 부끄러워서!
“어, 어쨌든 왜 다들 나만 보면 애 타령을 하는 거예요?”
“왜긴.”
예쁘게도 웃은 릴은 항상 그렇듯 그윽한 목소리로, 느끼하게 덧붙였다.
“네가 예뻐서.”
으악, 제발! 이그드라실이여, 이 사람 좀 말려 주세요!
나는 속으로 처절한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느끼한 말에 내성이 없는 내가 질겁하는 걸 알면서도 부러 저렇게 말하는 건…… 내 반응 때문이겠지? 그 과정 중 일부인 날 놀려먹는 걸 즐기려고?
오늘만큼은, 아니, 앞으로도 결단코 놀림받을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나는 겨우 차분하게 대꾸했다.
“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예요.”
릴은 그런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오늘도 내 모습을 훑는 그 시선이 참 노골적이었다.
“예쁜 사람의 2세는 기대를 하게 되는 법이잖아? 똑같이 예쁜 사람이 늘어나는 게 얼마나 보기 좋아.”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야 나도 예쁜 사람을 보면 그 외모 좀 대대손손 물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하니까…….
“그런 거예요?”
“응, 그런 거야. 그리고.”
말을 끊은 릴이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윽고 내게 스윽 양팔을 뻗었다. 단단한 벽과 자신의 양팔 사이에 나를 가두었다.
이 감각을 잘 아는 몸뚱이 위로 긴장감이 흘렀다. 괜히 침을 꼴깍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너, 그런 반응을 보일 때면 한입에 날름 잡아먹고 싶은 거 알아?”
“…….”
“명색이 신혼인데 말이지.”
릴의 양팔과 벽 안에 갇힌 나는 달달 떨어야 했다. 온몸으로 훅 느낄 수 있는 그의 묵직한 향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농밀하게 나오면 아, 아직 뭘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결국 성격대로, 아득바득 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 놀림받는 건 포기하자. 포기하면 편하다고.
“어, 어, 어차피 당신 이 결혼 오혼째잖아요. 그런데 무슨 신혼을 찾아요?”
“오혼이든 백혼이든 무슨 상관이야. 갓 결혼했을 때에는 무조건 신혼이지.”
이제는 부정도 안 한다. 우씨!
공기라는 먹이를 삼킨 내 뺨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릴은 내 통통한 뺨을 툭툭 건드렸다.
“이제 귀찮게 하는 애들은 다 시종들에게 맡겨 놓고.”
릴은 나긋한 어조로 나를 유혹했다.
“딱 한 달만. 어때?”
뺨에서 미끄러진 손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 순간 특유의 숨 막히는 분위기가 있었다. 오금이 저며드는 것만 같다.
나는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할딱이는 숨결로 겨우 말이란 걸 만들어냈다.
“……일주일이 한 달이 됐는데요?”
“뭐 어때. 살아가다 보면 한 달이 일 년이 될 수도 있어.”
릴이 피식, 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머금었다. 내 뺨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말을 잇는다.
“다람쥐야. 아주 솔직히 네가 형님 가발만 안 벗겼어도.”
악!
속으로 처절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정말 듣고 싶지도 않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남들은 기적이 일어났네 어쩌네 하지만 내게는 인생 최고의 흑역사란 말이야.
“데스테리언에서 네가 그토록 바라던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리고, 난 널 붙잡고 아직도 침실에서 안 나왔을 텐데.”
손길 한 자락, 발음 하나마저 참 에로틱하게 물들어 있었다. 저 말이 아니면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지금도 아주 감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않았을까.”
“애,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어요.”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기 속에서 필사적인 반항이 이어졌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으면 누가 허락했을 거 같아요?”
사실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랬다. 누가 알았을까, 내가 고작 몇 달 만에 이 남자에게 넘어갈 거라고. 내 스스로조차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자존심이 좀 상했다. 그렇게 안 넘어가겠다고 다짐을 해 놓고! 몇 년도 아니고 겨우 몇 달 만에!
내가 어쩌다가 홀라당 넘어가 버린 거지?
“안 건드린다고, 매력 없냐고 울던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내 이런 속을 모를 이 남자는 옛날이야기라도 들려주듯 가볍게 중얼거렸다. 아, 결국 오늘도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목소리가 터지고 말았다.
“안 예쁜 구석이 없다고 한 건 당신이거든요!”
“그렇지. 그러니까 더, 일단 잡아먹고 봤지.”
릴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정말 야살스럽고 색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대로 질식할 것 같은 이유는 내가 예전보다 저 감각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어떻게든 꼬셔서 건드렸을걸? 아내님을 건드리지도 못하는 남편이라니. 이거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잖아.”
“꼬, 꼬셔…….”
나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대놓고 말했었다. 나를 꼬시고 있는 게 맞다고.
하지만 그때는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바짝 몸을 움츠러뜨린 주제에, 나는 당당하게도 콧대를 세웠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한테 넘어갔을 거 같아요?”
“어라.”
한순간 잠시 닿았다 떨어진 손끝의 온기가 뺨에 남아 있는 듯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이미 넘어왔잖아.”
……평소였으면 치사하게 팩트로 때리지 말라고 투덜거렸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남자에게 내재된 어떤 것이 날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야?”
별것도 아닌 저 물음이 너무나도 색스럽게 들렸다. 내가 드디어 미쳐가나 보다.
잘 아는 긴장감이 나를 덮쳐왔다. 이 순간이 지나면 깨달을 감각이 내 모든 것을 들뜨게 했다.
나는 릴의 손길을 피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정확하게 말하면 물러서려고 했다. 벽에 부딪친 몸은 도리어 나를 그의 품 안으로 밀어버렸으니까.
단단한 품에 닿은 나는 겨우겨우 내뱉었다.
“아, 아, 아니거든요…….”
“그래?”
“네! 당연…….”
하죠, 라는 내 대답은 릴의 입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대로 입 맞춰 오는 그의 향기가 내 안 가득히 스며들었다.
양팔이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입 안에 숨어 있는 내 살덩이를 빨아 당겼다. 타액을 진득하게도 섞어왔다.
아니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나는 버둥거렸다. 오롯이 이어진 숨결이, 향기가 나를 달아오르게 했다. 부드럽게 혀를 얽어오는 감각이 뇌리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아…….”
작은 한숨을 토해낸 나는 결국 그에게 매달렸다. 나를 달뜨게 하는 그의 모든 것이 그저 좋아서.
* * *
그렇게 한바탕 진득한 스킨십을 나누고 게르드에 있는 카림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정말 의외의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내 부름에 우리 할아버지, 세린 성주, 제1재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날 담는 시선이 한 차례 진동했다. 이윽고 내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그드라실에 영광을.”
노쇠한 손끝이 내 소맷자락을 쥐고 한 차례 입을 맞추었다. 여전히 눈물이 날 것 같은 모습이다.
언니의 일이 있고 나서 가족들과 더 멀어진 기분이었다. 장례식장을 지키던 가족들이 그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더.
정작 나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가족들은 그런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나를 유독 아프게 하는 간극이었다.
내게 정중한 인사를 건넨 할아버지는 다소 딱딱하게 몸을 틀어 릴을 돌아보았다. 한 차례, 비교적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원대하신 카림, 말리크의 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형님의?”
릴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에 의문이 든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릴은 방금 전에 왕성에 다녀온 것 아니었나? 할 말이 있다면 그때 전하지 않고, 왜 굳이? 그것도 할아버지를 시켜서.
이윽고 할아버지의 입술에서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미르 릴 데스테리언에게 제8재상직을 내리니 내일부터 정시에 입궁하시라는 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