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71화 (71/115)

71

“그게 소문의 맹점이지요.”

웃음기 서린 음성이 정말 우아했다.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되물었다.

“네?”

“눈덩이처럼 부푼 소문에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파헤치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진실과 거짓의 실마리를 놓치고 말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결국 이야기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건 듣는 쪽이기도 하고.

“이그드라실께서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시는데 할라는 오죽했겠습니까.”

…으, 음. 아마 남편의 일이니까 눈이 뒤집혀서 더 좋지 않은 쪽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수긍하는 얼굴이자 레브아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 나갔다.

“할라와 릴도 처음부터 사이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

나는 순간 입술을 달싹여야 했다. 사이좋은 릴과 말리카라니. 그……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두 사람이?

둘이 만나면 공기가 얼마나 날이 서 있는데. 말로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이 참 살벌했다. 근처에 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레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정말로요?”

“예. 제 아들이라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에 릴이 참 예뻤답니다.”

“지금 모습을 보면…… 그랬을 거 같긴 해요.”

몇 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생긴 건 정말 멀쩡하니까. 내 솔직한 대답에 레브아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한참 어린 데다가 남편인 레반이 귀여워했고, 예쁘기까지 했던 아이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마냥 이그드라실을 경배하고 찬양할 때에도 할라와 레반은 늘 한결같이 그 아이를 대했습니다.”

레브아가 두 눈을 내리깔았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조차 릴과 같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기 시작한 소문이랍니다.”

“그래서라면…….”

“레반이 릴의 친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요.”

아.

레브아는 소문에 담긴 진실을 단 한마디로 응축했다. 말리크가 릴을 아끼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역시, 애초에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이야기긴 했다. 어느 정도 믿을 법해야지.

“저조차 하지 못한 것을 레반이, 할라가 했으니…….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가뜩이나 할라에게는 자식이 허락되지 않았으니 할라가 서서히 미쳐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릴의 적대감과 다르게, 레브아는 끝까지 말리카를 두둔했다. 이러니까 나야말로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남편이니까 릴의 말을 믿어야 하지 않나? 괜히 손끝을 꿈지럭거리다가 속삭였다.

“릴이 그러던걸요.”

“무엇을요?”

“고아하신 레브아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말리카라고…….”

레브아의 눈썹이 파르륵 진동했다. 세 사람을 이간질을 하는 것 같아서 빠르게 덧붙여야 했다.

“무, 물론 저는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지만…….”

“저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레브아가 내 답을 회피했다. 이어 말머리도 함께 뱅글 돌아가 버렸다.

“페라엘에게 들었습니다. 이그드라실께서 할라가 아이를 가지지 못할 거라고 하셨다고요.”

아니, 내가 언제 그랬냐고! 목이 뎅겅 잘릴 소리에 필사적으로 부정해야 했다.

“저, 절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에요. 그냥 저한테 자꾸만…….”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제가 릴과 결혼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다들 아이 타령을 하잖아요. 샤리프스 귀부인도 그렇게 말하길래 말리카께 먼저 좋은 소식이 들려야 한다고 했을 뿐이라고요.”

내 변명에 가까운 속삭임에, 레브아는 부드러운 어조로 나를 혼냈다.

“할라가 그 말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나는 꼬리를 말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제가 잘못한 거 맞아요.”

“그러니 이그드라실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네?”

갑작스런 말에 고개를 치켜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브아는 온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할라에게도 아이가 생기면 지금보다 덜 예민하게 굴 겁니다. 둘을 계속 싸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어긋난 사이를 되돌리는 게 맞죠. 그런데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어서요.”

지금 나는 이그드라실의 인도하에 뭔가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아니면 꽃을 피우거나.

레브아가 다시 입술을 열었을 때 문이 왈칵 열렸다. 릴이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

릴이 나지막하게 레브아를 불렀다. 여태껏 사근사근했던 레브아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런 레브아에게 다가오는 그의 얼굴이 제법 어두웠다. 레브아의 노쇠한 손을 움켜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좀 어떠셨어요.”

레브아의 눈썹이 진동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릴을 외면하며,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야 잘 지냈지. 너야말로 무사했니? 역병이 돌았다면서.”

“그럼요. 걱정하실 일은 없었어요.”

눈을 한 차례 깜빡인 레브아가 릴의 손을 조심스레 뿌리쳤다. 몸을 침대에 기대는 행동이 제법 냉정하게 느껴졌다.

“피곤하구나.”

“저만 보면 피곤하시죠.”

“…….”

레브아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저번의 그 따스한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없는 말리크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릴이 허락 없이 온 것일 테니까.

레브아를 물끄러미 바라본 릴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없는 작별 인사가 그 입술에 얹어졌다.

“이만 가볼게요.”

“그래. 또 뵙지요, 이그드라실이여.”

레브아가 내게 눈인사를 건네 보였다. 나도 따라 목례를 건네고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릴은 복도를 걸어가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잠겨 있는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

오늘 레브아는 크게 두 가지 부탁을 했다.

그래도 차마 자신을 되살리지 말라는 그 얘기는 할 수가 없었다. 부모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자식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상처니까.

“말리카를 도와달라고 하시는데요?”

내 말에 릴이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덕분에 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사이가 좋았던 말리카와 릴이라니.

…차라리 고양이가 수영을 한다고 하면 믿겠다.

“말리카를?”

“네, 말리카가 아이를 가질 수 있게요.”

이어진 말에 릴의 얼굴이 제법 어두워졌다. 복잡한 생각을 한 듯 작은 신음성을 토해냈다.

“……음.”

“근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요?”

내가 물은 것에 그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머잖아 한 발자국 내디디며 속삭였다.

“이그드라실……. 물론 신화는 너도 잘 알겠지만.”

“신화요?”

“응.”

내 되물음에 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 신화에서 이그드라실께서 사하크에게 내린 기적은 비를 내린다거나, 물을 다스리거나 사람을 치유하는 거였거든. 나도 딱 신화에서 언급한 저만큼을 할 줄 알아.”

가벼운 어조로 속삭였지만 사실 하나하나 대단한 힘이었다.

“이그드라실 본인도 크게 세 가지의 기적을 행사하고 다녔다고 하잖아. 황량한 불모지에서 생명을 키우고, 죽은 것을 되살리고, 사막의 기후를 다스리는 거.”

신께서 행하사, 사납게 우짖던 캄신이 가라앉고, 메마른 땅에 녹음이 우거지며, 영원히 눈을 감고 숨을 멈춘 이가 우거진 녹음 위를 거닐었더라…… 였나. 신화 대목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를 흘끗 바라본 릴이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그중 두 개를 해냈어.”

그중에 두 개.

…다만 첫 번째 기적을 떠올린 나는 릴의 옷소매를 붙잡아야 했다.

“저기, 있잖아요.”

“응?”

“대머리 치료가 생명을 키우는 거에 해당해요?”

모자람이 없는 곳에 모내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릴도 끄응, 하고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다. 머잖아 생각을 정리한 듯 짤막하게 속삭였다.

“……뭐, 일단 뭔가 자라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머리카락도 자라나고 식물도 자라나는 건 맞지만……. 그 자란다가 이 자란다와 같은 말인가?

“그리고 인간의 아이야말로 생명을 키운다는 것의 가장 본질적인 일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내 미래를 먼저 겪어 본 릴은 확언했다.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레브아는 아이가 있다면 릴과 말리카를 화해시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말리크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릴도 계승 서열이 밀리긴 하고. 신전이 뭐라고 나설 수 있는 명분이 하나 줄어드는 건 맞는데.

내가 괜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문뜩 말을 걸어왔다.

“근데 다람쥐야.”

“네?”

“지금 형님의 아이가 중요해?”

날 쓰윽 살펴보는 그의 새파란 눈이 제법 음흉했다.

의미하는 바가 명확해서, 아마 뭔가 마시고 있었다면 입 밖으로 뿜어냈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