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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무시한 우리는 게르드로 향했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말리크가 브렌델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몰려드는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할 여력도 없었다. 희망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예전에 했던 릴의 말이 옳았다.
인간이란 하나를 주면 둘을 원하고, 둘을 안기면 셋을 바라면서 찾아오게 된다고.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손을 뻗으면 정말 프레이르의 모든 신민들이 우리에게 손을 뻗게 될 날이 올 터였다.
그렇게 게르드에 도착하자마자 릴은 왕궁에 볼일을 보러 떠나야 했다. 넓디넓은 그의 저택에서 혼자 방황하고 있을 때, 시종이 나를 찾았다.
“이그드라실이여.”
바닥에 무릎을 붙이며 하는 저 익숙해지지 않는 소리.
두 번째 기적 이후, 사람들은 나를 더더욱 어려워했다. 시종을 내려다보던 나는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네?”
“레브아께서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그 말은 정말 의외였다. 레브아께서?
설마하니 날 찾지는 않겠지, 싶은 마음에 당연한 걸 입술에 얹었다.
“카림께서 왕궁에 계신다고 전해주실래요?”
“아, 카림을 뵙고자 하시는 게 아니라 이그드라실을 찾으셨습니다.”
“아…… 정말요? 알겠어요.”
그렇게 나는 홀로 레브아의 저택에 향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시어머니를, 그것도 남편 없이 혼자 마주하러 가는 것이라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심장을 뒤로한 채 침대에 앉아 있는 레브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아하신 레브아.”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이렇게 무례하게 이그드라실을 맞이하는 건 너그럽게 양해해주시지요.”
내 인사에 레브아도 똑같이 존칭을 내뱉었다.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레브아가 바닥에 무릎을 굽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저 말 자체가 내게는 부담이었다.
나는 예전에 했던 말을 또다시 중얼거려야 했다.
“편하게 불러주시면…….”
“소문을 들었답니다.”
레브아는 포근하게 웃는 낯으로 부드럽게, 또 우아하게 돌려서 내 부탁을 거절했다. 덕분에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고아하신 레브아, 정말 죄송하지만 제게는 그게 더 부담인데요……. 제발 편하게 대해주시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뱉을 수는 없었다.
레브아는 천천히, 제법 오래도록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주름진 입술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이그드라실께 청이 있습니다. 감히 부탁드려도 되겠는지요?”
“마, 말씀하세요. 고아하신 레브아의 부탁이면 무엇이든 들어드려야죠.”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싶었다. 말리카에게 이랬다가 큰코다친 게 겨우 몇 달 전의 일인데.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물릴 수는 없었다. 아, 하비에르는 오해하기 좋게 말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지만 정작 고쳐야 할 버릇은 따로 있었다.
생각 없이 일단 대답하고 보는 거. 지금까지는 저걸로 내 팔자를 내가 꼬았다지만, 앞으로는 내 팔자만 꼬이는 게 아닐 것이다. 언니의 일을 경험했으니 조금만 더 조심스러워지면 좋겠다.
레브아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혹 제가 죽는다고 해도, 릴이 이그드라실께 부탁을 해도…… 이 늙은이를 되살리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
이어지는 부탁에는 순간적으로 입술을 달싹거려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발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고 찾아온다는 지금, 정반대의 말이라니.
레브아는 초연하게 눈을 감았다. 가을바람처럼 쓸쓸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죄 많은 인간이니 죄를 안고 눈을 감아야지요.”
죄 많은 인간이라고.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언니가 말해줬던 소문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터였다. 가뜩이나 레브아가 자기 자신을 죄가 많다고 이야기할 만한 거리가 많지도 않았다.
나는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고아하신 레브아, 저도 뭣 좀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지요.”
“제가 레브아와 말리크와 관련된 소문을 하나 들어서요.”
잘못하다가는 정말 경을 칠 수 있는 소문이었다.
내 소심한 목소리에 레브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던 듯이.
“저와 말리크와 연관된 소문이라니요. 대관절 어떤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말리크께서 사실 릴의 형제가 아닌 부친이라는…… 다소 민망한 소문이었어요.”
“오래전부터 떠돌던 이야기로군요.”
자신의 부정을 이야기하는 것에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레브아는 여전히 우아한 태도를 고수했다. 희미한 미소가 주름진 입가에, 그늘진 눈가에 돋아났다.
새삼스럽게도 그런 겉모습이 릴과 무척이나 닮아 보였다.
릴의 우아한 표면은 레브아에게 물려받은 것이구나. 이렇게 닮았는데 둘이 모자지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았다.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았어도 답이 보이는 문제였는데.
미안한 마음이 불쑥 솟았을 때, 나를 본 레브아는 품위 있는 웃음을 보였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그드라실께서 보시기에는 어떠합니까?”
“네? 어떤 의미신가요?”
“제가 릴의 친모가 아닌 것 같으신가요? 아니면 레반과 함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수르트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잠시 생각을 거듭했다.
전자든, 후자든 둘 다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감히 멋대로 지껄여서는 안 될 문제기도 했다.
“그건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는 문제예요.”
레브아의 주름진, 선한 낯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만 친모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릴이 레브아를 쏙 빼닮았고, 선대 말리크께서 아들과 아내의 배신을 모르실 정도로 우매하시지는 않으셨겠죠.”
레브아의 질문 두 가지를 부정하고, 레브아는 진실하다고 편들어주는 말이었다. 내 대답에 레브아의 시선이 한층 더 온화해졌다.
……휴, 시어머니한테 점수 좀 딴 걸까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말리카께서 릴을 싫어하시는 이유에 저런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요. 말리카와 릴의 사이가 극악하니까…… 좀 유해지면 좋겠거든요.”
“저도 둘이 화해하기를 바란답니다. 서로 날을 세워봤자 레반에게 도움될 일이 없건만, 그걸 알면서도 릴과 할라는 화합을 하지 못하지요.”
레브아가 쓸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하비에르는 할라 라펠리타를 말리카로 추대한 사람이 현 레브아라고 했다. 레브아가 친밀하게 말리카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면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맞는 모양이었다.
“이그드라실의 생각대로, 그 부정한 소문이 할라를 자극한 건 맞습니다.”
레브아가 자신의 손끝을 움직였다. 병자들이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해서 순간 의문이 들었다.
릴과 하비에르의 말에 따르면, 레브아가 저렇게 자리보전하는 건 말리카 때문인데. 어떻게 저렇게 온화한 목소리로 말리카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건지.
아팠던 과거가 있던 나는, 만에 하나 누군가가 나를 아프게 한 것이라면 그 사람을 결단코 용서할 수 없을 텐데.
자신의 손끝을 한 차례 바라보던 레브아가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이그드라실께서도 아시겠지만 왕궁에는 웬만해서는 헛소문이 돌지 않습니다.”
“네, 대부분……. 결국에는 진실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맞습니다. 과장된 소문이 나도는 경우는 있지만, 그 안에는 늘 진실이 숨어 있는 법이지요.”
레브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이 곱게도 접혔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는 무엇이 진실인 것 같으신가요?”
“…….”
나는 가만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왕궁에는 거의 퍼지지 않는 헛소문. 소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소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살을 떼면 남게 되는 작은 진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을 수 있는 것.
그래, 그렇게 생각할 때 저 소문에 숨겨둘 수 있는 진실은 하나 같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릴과 말리크가 형제가 아니라는…… 점일까요?”
저것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듯했다. 만에 하나 말리크와 레브아가 불륜 관계라면, 레브아는 애당초 말리카 자리에 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애당초 둘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들켰을 때에 선대 말리크 손에 죽어 나갔을 거고.
“형제가 아니라는 건…… 꼭 그게 부모 자식이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천천히 말을 이은 나는 형제를 제외한 다른 관계를 떠올렸다.
“조부모와 손자일 수도 있고, 사촌일 수도 있고……. 조금 다르게 보면 자매일 수도 있는 거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긴 하네요.”
나를 바라보던 레브아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