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67화 (67/115)

67

흐르던 시간마저 숨을 죽인 채, 고스란히 멈춘 것만 같았다. 지금 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빛을 잃은 듯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와, 저 제안을 한 이그드라실만이 존재하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

내 귓가에는 끊임없이 이그드라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네 소중한 이를 살려줄까. 살려줄까, 살려줄까, 살려줄까…….

이 순간에마저 지극히 아름다운 이그드라실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애써 비틀었다. 겨우 열린 작은 틈새로 흔들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살려…… 줘?”

“프리드린?”

옆에서 당황한 듯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지금의 내게 닿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이그드라실만이 지금, 내 세계의 전부였다. 내 소중한 이를 되돌려주겠다는 이그드라실만이 내가 응시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럼.]

아스러지는 눈웃음을 남긴 이그드라실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손끝이, 그리하여 기묘하게 느껴지는 그 온기가 눈물로 젖은 내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한 차례, 두 차례, 여러 번 반복해서.

지금까지 이그드라실과 만난 것은 총 세 번이었다. 그 세 번 모두, 촉감으로는 이그드라실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만지는 감촉이 선명하게도 느껴졌다. 이그드라실은 마치 육신을 얻은 것처럼 나를 매만졌다.

[생명을 키워내는 네게 인간 하나 소생시키는 것쯤이야,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남용해서는 안 되는 힘일 뿐.]

이어지는 말에 머릿속이 서서히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인간 하나 소생시키는 것쯤이야,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숨 쉬듯 할 수 있는 일, 숨 쉬듯 할 수 있는 일…….

이그드라실의 음성만이 귓가에 뱅뱅, 아득하게 감돌았다. 혼몽한 머릿속으로 다소 늦게 깨달은 것, 하나.

숨 쉬듯 할 수 있는 일이면…… 그렇다면, 우리 언니가 내게 돌아올 수 있어?

기대를 품은 채 고개를 바짝 치켜올렸다. 두근, 두근……. 귓가에서 심장이 기괴하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나.]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이그드라실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주체인 네가 이토록 슬퍼하고, 간절하게 바라고 있으니 내 기꺼이 너의 바람을 허하노라.]

그 따스한 말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주르륵, 뺨을 탄 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이그드라실의 입술이 다시금 흔들렸다.

[단 너도 언젠가, 내 바람을 하나만 들어주겠니?]

하나의 단서가 붙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언니, 나의 아리엘을 내게 돌려만 준다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세상 살아가는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주겠다는데. 영원의 강을 건너버린 사람을 되살려 웃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데.

내가 죽은 이후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되돌려 받겠다고 해야지. 당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기꺼이 모든 희생을 치를 수 있다고 해야지.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이그드라실이 나를 인도했다. 마냥 새하얀,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그드라실의 손끝이 천천히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처음 시작은 시퍼렇게 죽어 있는 언니의 뺨 위였다. 얼음장처럼 차디찬 온기 위에 내 손이 닿았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름 모를 무언가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 몇 번 느껴본 적이 있는 그 기묘한 감각.

내 손이 닿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던 언니의 뺨에 서서히 혈색이 돋아났다. 마치 이그드라실이 개화했던 그날처럼, 꽃이 피어나듯 새파란 뺨이 서서히 붉어졌다.

이그드라실의 손끝이 또다시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번에는 미려하게 솟은 코를 향해.

“…….”

이그드라실을 따라 움직이는 손끝이 코를 어루만졌다. 이윽고 가냘픈 숨소리가 들렸다. 그 어떤 미동조차 없던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향이 아득하게 피어올랐다. 살아 있는 것만이 지닐 수 있는 감각이 텅 비어 있던 공간을 채워갔다.

그대로 미끄러진 손이 입술을 더듬었다. 새하얗게 가라앉았던 입술에 서서히 붉은 기운이 돌았다. 이그드라실의 손끝이 나를 인도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목을 타고 미끄러지자 푸른 혈관이 되살아났다. 잃어버린 온기가 주인을 찾아왔다. 그 손끝이 마침내 심장에 닿았다.

나를 인도하던 이그드라실이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자신을 따라 하라는 것처럼.

[소생하라.]

“소생하라.”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조용했던 강당을 덮어 눌렀다. 두근,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삶을 이야기했다.

내가 마주하고 있던 붉은 속눈썹이 파르륵 진동했다. 천천히, 또 느리게……. 마치 갓난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힘겹게, 눈꺼풀이 떨려왔다.

한 차례, 두 차례……. 그러다 마침내.

기나긴 암전을 이겨내고, 언니의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가 세상을 향해 몽롱한 빛을 드리웠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반복해서 깜빡인다. 몽롱했던 눈빛에 이성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지를 얻은 눈이 자신의 앞에 있는 나를 담았다. 한동안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머잖아 그 두 눈이 내가 무엇인지 선명하게도 인지했다.

언니의 떨리는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내 뺨에 다가붙었다. 따스한, 살아 있는 것의 온기가 느껴진다.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한 입술이 조심스레 달싹거렸다. 뒤이어 들려오는,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

“리니……?”

들려오는 애칭에 울음이 차올랐다. 꾹 잠긴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응, 언니.”

내 목소리를 들은 언니는 마치 자다 깬 사람처럼 희미한 미소를 덧그렸다. 눈물에 녹아버린 내 통통한 뺨을 툭, 툭 건드리며 속삭인다.

“우리 쥐새끼, 누가 울렸어……. 일어나자마자 본 게 우리 쥐새끼가 우는 얼굴이라니……. 어휴, 내 팔자야.”

언니의 너스레가 들렸다. 그 말에 울컥, 하고 또다시 터지는 게 있었다.

누가 울렸긴, 언니가 울렸잖아. 왜 처음 하는 말이 그런 건데.

어느덧 따스하게 물든 언니의 손이 내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걱정과 애정이 담뿍 담긴 손이었다.

언니는 마침내, 죽음의 향만이 짙게 풍기던 관 위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두 발이 오롯이 검은 바닥을 밟고 몸을 바로 세웠다.

나와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입고 있던 검은 수의가 바닥을 긁었다. 어머니의 옷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소리 없는 경악이 이 공간에 내리깔렸다. 동시에 이제야 상황을 인지한 형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형부의 시퍼런 입술이 흔들렸다.

“아리엘……?”

“클리드? 어…….”

형부의 뒤로,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있는 가족을 본 언니의 눈이 크게 늘어났다. 한 사람, 한 사람 가리킨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백부님, 백모님, 오빠까지……. 왜들 그러고 계세요? 왜 다들 한자리에 모이셨담?”

다른 때였다면 삿대질을 한다고 한 소리를 했을 분들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상황을 보며 입술만을 달싹였을 뿐.

지금 상황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을 언니가 고개를 한 차례 갸우뚱거렸다.

“왜 다들 울고 있어요? 우리 쥐새끼처럼.”

쥐새끼, 소리에 형부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제야 말실수를 깨달은 언니가 빠르게 고개를 틀었다. 영락없는 모른 척이었다.

다만 그 순간, 언니는 멀지 않은 곳에 무릎을 붙이고 있는 말리크와 말리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기겁한 언니가 서둘러 관 위에 무릎을 붙였다.

“아리엘 브렌델이 존모하는 말리크, 아름다운 말리카를 뵙습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었어요. 부디 너그러운 선처를 구합니다.”

“…….”

지금 이 상황에서 말리크도, 말리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앉은 상태 그대로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나조차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형부뿐이었다.

어느덧 비틀거리며 걸어 언니에게 다가온 형부가 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눈물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엘…… 아리엘!”

“크, 클리드, 왜 이래요. 아이참, 아이처럼!”

창졸간에 형부의 품에 쏙 안기게 된 언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형부는 울며, 웃으며 돌아온 언니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내가 그렇게, 살아 있는 신으로서 프레이르에 내비친 두 번째 기적은 소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