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그 후로 며칠, 나는 비로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다시 멀쩡히 걸을 수 있게 되고, 숨이 차지 않고, 목소리도 갈라지지 않자 기쁨의 춤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아, 행복해. 이제야 살 것 같다고.
예전에 완치되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 아픈 건 어린 시절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했다. 앞으로 무병장수하자. 제발!
“이그드라실께서 뭔가 하실 줄 알면 좋을 텐데요.”
화술 선생을 빙자하여 찾아온 하비에르가 투덜거렸다.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네?”
“닉스톤 건을 사기로 생각하는 신민들이 많으니까요.”
으, 음.
정말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과일이 역병의 원인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정작 그 과일을 먹고 한바탕 앓은 나조차도 쉽게 믿음이 가지 않을 지경인데 말이다.
릴은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두긴 했다. 이제 뒷일은 의사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이 알아서 해독약을 찾아오겠지. 공로를 인정받고 큰 상을 받을 테니까.
릴의 입장에서는 저편이 가장 나은 방법이긴 했다. 애초에 말리크를 배신할 수 없다고 읊조리는 사람이니까. 여기서 이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새삼스럽게도 릴의 입장이 정말 난처하구나 싶었다.
이번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언니를 걱정하는 나 때문이었다. 아직 언니와 형부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은 것도 있고.
어쨌든 간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할 줄 아는 게 있긴 한데요.”
“그게 뭡니까?”
내 말을 믿을 수가 없던 건지, 하비에르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 나 정말 할 줄 아는 거 있다니까?
오기가 생긴 나는 화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저번에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가 알려줬던 대로…… 천천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소담하게 맺혀 있던 봉오리가 개화했다. 곧 방 안에 향긋한 향기가 감돌았다.
나는 자랑스럽게 하비에르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거요?”
“…….”
갑자기 발생한 일에 하비에르가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피어난 꽃을 담은 눈빛이 제법 진중했다.
이윽고 그는 내가 보여준 것에 대한 평을 내렸다.
“신기하긴 합니다만…… 유용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군요.”
“네, 뭐……. 마술사 수준이죠. 웬만한 사람들은 이것도 사기로 볼 거 같아.”
마술사들이 가볍게 할 수 있는 마술이 아닐까. 꽃봉오리와 꽃을 바꿔치기만 하면 되니까. 그 사실을 깨닫자 어깨가 축 처졌다.
다만 독설가 하비에르가 어쩐 일인지, 어울리지 않게 유한 말을 했다.
“아닙니다, 겨울이 오는 곳에서라면 참 유용할 겁니다. 하지만 오펠은 물론 프레이르 국토 대다수가 일 년 내내 여름입니다. 이런 능력이 놀라운 건 맞지만, 기껏 보여줘도 신기해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죠.”
“아하?”
“지금은 보여주기식이 필요합니다. 카림처럼 비를 내린다거나.”
사막에서 비를 내리는 능력은 정말 유용한 힘이었다. 비교적 농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이그드라실의 땅을 가꾸는 능력도 굉장한 힘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땅을 가꾸는 건…… 있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지. 대체할 수 있는 게 충분히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예.”
딱딱하게 대답한 하비에르는 내가 피워낸 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중얼거린다.
“생명을 피워내는 이그드라실이라…….”
“네? 갑자기 왜요?”
“눈앞에서 기적을 보니 한층 더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 같아서요.”
내가 기겁할 소리였다. 괜히 의자를 밀치며 뒤로 물러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나, 날 신으로 섬기지 말아주세요.”
“……예?”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고요!”
하비에르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독설가는 독설가답게 오늘도 독설을 내뱉었다.
“저도 제 믿음 속의 이그드라실은 성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하비에르는 흘끗, 내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겨보았다. 새빨간 머리에는 한 차례 스쳐 지나갔을 뿐인 시선은 내 눈을 유독 오래도록 응시했다.
…예전에 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눈이 아름다운 황금빛이라고, 사람을 홀리는 것만 같다고.
당연하게도 나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다. 다만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를 마주했을 때, 그 고결한 황금빛 눈을 보았을 때. 그때는 나도 고스란히 홀리는 것만 같았다.
비슷한 걸 느끼려나…… 라고 생각하면 불치병 중 하나라는 도끼병인가.
이윽고 하비에르가 툭 내던졌다.
“하필 그 모습으로 재림하셨는데요.”
……기분이 확 상하는 말이었다. 당연히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대체 내가 뭐가 어때서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아니요, 그건 정중하게 사양할게요.”
“신이면서 역병에나 걸리고,”
내 거절을 가볍게 무시한 하비에르가 팩트 몽둥이를 휘둘렀다. 와, 누구 시종 아니랄까 봐.
“신처럼 보이지 않게 바보 같고,”
바보 같다니! 어디서 감히 저런 무엄한 말을!
“그렇게 끊임없이 믿음을 시험하시지요.”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자연스러운 툴툴거림이 뒤를 이었다.
“누가 언제 믿어 달라고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녔어요? 자기 멋대로 믿어놓고 왜 믿음을 시험한다고 그런대?”
“그런데도 이그드라실에 꽃을 피우신 건 맞지 않으십니까.”
하비에르는 꽃병을 바라보았다. 내가 방금 전에 피워낸 꽃이 함초롬하게도 자신의 자태를 자랑했다.
“지금 이걸 보니 더더욱 확실합니다만.”
“뭐…… 네, 그건 제가 하긴 했네요.”
부정할 수 없는 진실들이었다. 적어도 이제 식물을 자라게 할 수는 있으니까.
문뜩 하비에르가 눈을 내리깔았다. 진지하게도 읊조린다.
“이런 걸 보면 전 운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래요?”
“형체가 존재할 수 없는 믿음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신자로서 생각하자면 태어나서 가장 감동받은 순간입니다.”
“좋겠네요. 전 제 신앙에 제가 위배되는데요.”
비꼬는 게 아니라 진담이었다.
가장 신기한 점은 저것이다. 나를 살아 있는 신이라고 말하는데, 정작 내 자신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게.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하비에르는 조금 의외의 것을 물어왔다.
“과거, 이그드라실께서는 카림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릴이요? 어…….”
나는 릴을 뭐라고 생각했더라.
원래대로라면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땅에 무릎을 굽히고 절을 올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카림, 릴 데스테리언.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말리크의 동생인, 동시에 미친개 소리를 듣는……. 아침 점심 저녁 옆에 끼고 있는 여자가 다르고 술독에 빠져 지낸다는 사람.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존경할 수는 없고, 섬김받아 마땅하지만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던…… 아득히 멀기만 했던 그런 존재.
“…….”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점이 있었다.
그래, 나도 프레이르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이상 나름대로 독실한 신자였지만 하비에르 같은 광신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신분적이라면 모를까, 신앙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절을 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신화 속의 모습과 다르게 걸리는 게 많았으니까.
그때 문이 왈칵 열렸다. 하비에르와 내가 소음을 향해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릴의 독특한 애쉬 그레이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의 이마 위에 땀방울이 또르륵 방울졌다.
“프리드린.”
내 앞까지 한달음에 뛰어온 릴의 얼굴이 썩 좋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
릴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겨우 입술을 열었다. 그 입술을 비집고 힘겹게 흐른 말.
“브렌델에서, 전갈이 왔어.”
“브렌델에서요? 언니 소식이에요? 왜 게르드에서 안 오고?”
말리카가 불러들인 건데, 언니와 형부가 게르드로 가지 않고 브렌델로 향했나? 그래서 소식이 들려오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나?
“…….”
릴이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어 힘겹게 나온 것은 내 이름뿐이었다.
“프리드린.”
다른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 태도에서 본능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깨달음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세상이 아찔하게 진동했다. 망연자실하게 그를 올려다보던 나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설마…….”
언니가…….
릴을 향해 뻗어 나가던 손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겨우 한 마디 얹을 수 있었다.
“아니……죠?”
“…….”
릴은 차마 어떤 말도 얹지 못한 채 내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그건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최악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