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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갑자기 처형은 왜 찾아.”
“언니도…… 그걸 먹었는데……. 점심때마다, 나랑 같이…….”
쇳소리처럼 걸걸한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었다.
내게 처음 과일을 건네주던 모습이 생각났다. 언니도 단 음식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어서, 그 이후 나와 만나던 점심때마다 열심히도 먹었었다.
“그래서 챙겨서…… 보냈는데…….”
언니가 쫓겨나던 날. 내가 따로 줄 수 있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 그 과일이라도 챙겨 보냈다. 좋아할 테니까.
돈을 주면 훨씬 좋아했을 테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과일이 이 병의, 많은 사람들이 중독된…… 역병이라고 불리는 이 사태의 원인이라면.
“어, 언니는…… 무사해요?”
결국 눈물이 주르륵 뺨을 긁었다.
‘카림 말씀 잘 듣고. 앞으로 점심 혼자 먹어야 한다고 굶지 말고. 몸 잘 챙기고. 역병 조심하고. 알았지?’
‘영영 이별은 아니지만……. 하아, 이렇게 가면 제법 오래 못 볼 거야. 그래서 하는 말들이고.’
언니와 함께하던 마지막 점심시간에 들었던 말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때도 그놈의 닉스톤을 열심히 먹었었다.
언니가 했던 말이 왜 그렇게 불안하게 들렸는지.
“울지 마.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다른 때였다면 우는 날 놀려먹었을 릴은, 일단 나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하비에르도 놀란 듯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많이 먹어야 증상이 올라오는 걸 보면 독성이 강하지는 않아.”
“속효성이 아니라 지효성일지도 모릅니다.”
초를 치는, 하비에르의 냉정한 말이 들렸다. 릴이 순간적으로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처형이 너만큼 많은 양을 먹지는 않았을 거야. 넌 삼시세끼를 거의 닉스톤만 먹었으니까.”
“그렇지, 만…….”
한번 시작된 걱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나을 내 몸뚱이보다 소식을 알 수 없는 언니의 걱정이 더욱 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릴은 무언가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게르드로 돌아가긴 해야겠네.”
스르륵 고개를 돌린 그가 하비에르를 응시했다. 한풀 진지해진 음성이 들려왔다.
“하비.”
“예.”
“그래…… 이번에는 네가 이기겠어.”
하비에르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고개를 바짝 쳐든 그는 답잖게, 감격에 겨운 감탄을 토해냈다.
“카림!”
“해결하는 게 맞는 거 같다.”
하비에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은 없다는 듯.
당장이라도 춤을 출 기세였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아부할 시간에 성주나 불러와.”
“예!”
하비에르가 그렇게 신이 난 건 처음 보았다.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방을 벗어났다.
한 사람이 사라지자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릴은 눈물로 얼룩진 내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입술이 뺨에 닿았다. 붉은 그 입술로 찝찝한 눈물을 거두어가며 다정하게 덧붙였다.
“이그드라실께서 지켜주실 거야.”
그 말에, 그를 믿지 말라고 속삭였던 이그드라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이그드라실이 언니를 지켜준다고?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그드라실을 믿고 섬기는 독실한 내 신앙과 다르게, 내가 보고 온 이그드라실은 그러지 않을 터였다.
* * *
오펠 성주는 바로 이번 역병이 사실 역병이 아닌 중독이며, 그 원인은 이산나에서 수입된 닉스톤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곧장 오펠에 닉스톤 금지령이 떨어졌다. 닉스톤뿐만 아니라 이산나에서 들여오는 모든 식료품은 일단 수입이 금지되었다.
게르드에도 해당 내용을 담은 전서를 보냈다. 머잖아 말리크의 이름하에, 프레이르 전체에 오펠과 같은 칙령이 떨어졌다.
덕분에 이산나와의 관계는 악화되는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당장 프레이르 내부의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니까.
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당연히 반신반의했다. 먹어도 당장에는 별 이상이 없는 과일이 병의 원인이라니,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 건 맞았다.
성후인 내가 역병에 걸리자 카림이 사기를 친다…… 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난 정말……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네.’
내 병증은 느리게 나아지고 있었다. 아직도 걸어 다닐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침대에 종일 누워 있던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았다.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그렇게 안 둬.”
내 중얼거림에 릴은 아스러지는 듯한 미소를 남겼다.
“네가 나보다 먼저 죽는 날은 오지 않을걸.”
나는 반쯤 넋 나간 웃음을 보였다.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나 무병장수가 꿈인데. 잘됐네요.”
“잘 알지. 무병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단수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이그드라실이 했던, 유병단수라는 말이 귀를 스쳤다.
“제가 릴에게 들은 말 중에 제일 감동적인 말이에요.”
진심이었다. 느끼하고 내성 없는 대사들보다는 저 말이 훨씬 더 내 가슴을 뛰게 했다.
평소였으면 날 놀려먹었을 그는 피식 웃으며 대꾸할 뿐이었다.
“남편 잘 만났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프지 않게, 오래오래 살게 해주는 사람이라면야 아주 잘 만난 게 맞지.
내 행동에 릴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그래요?”
“아니…….”
피식, 하고 그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득바득 안 기어오르니까 너 같지 않네. 제법 재미있는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요.”
“그래, 그래. 어서 기운 차려.”
쓱쓱, 다람쥐 머리 만지듯 움직이는 손길이 있었다. 그의 손길에 한없는 안도를 느끼던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것을 입술 위에 얹었다.
“언니는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게르드에 사람을 보냈거든. 처형 소식이 도착할 때가 됐는데.”
그래, 그의 말대로 괜찮겠지. 무엇보다 언니는 나와 다르게 건강하고 씩씩하니까. 만에 하나 사신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사신의 머리채를 다 쥐어뜯어 놓고 쫓아낼 사람이 우리 언니였다.
내가 안도한 눈치자 그가 웃으며 속삭였다.
“처형이랑 정말 사이가 좋네.”
“……그렇죠.”
희미하게 웃은 나는 가만히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랑 붙어 있으면 열심히 투닥거리긴 하지만, 싫어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니었다. 각별한 애정 표현 방식이다.
“저, 어릴 때 많이 아팠거든요. 지금보다 더요.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게 겨우 일 년 남짓 됐는데.”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손끝, 발끝에 힘을 줘 본다. 그때처럼 몸이 아예 말을 듣지 않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부자연스러웠다.
언니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정말 마음 아파하겠지.
“아파서 누워 있던 시절 내내, 언니가 들려줬던 이야기 속을 살아서 걸어갔어요. 그러니까 제가 일방적으로 언니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데, 언니도 충분히 절 예뻐하니까……. 사이가 좋은 게 당연하잖아요.”
나는 가만히 그를 흘겨보며 툭 중얼거렸다.
“그러는 릴도 말리크를 정말 좋아하면서.”
“그렇지. 나도 비슷해, 형님이 날 업어서 키웠거든.”
릴의 손은 여전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처음인 것 같다, 그가 구체적인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게.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어. 늘 내 손을 잡아줬던 사람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니라 형님이었지. 형님께는 늘…… 여러 감정이 들지만.”
옛일을 생각하는 걸까. 릴의 예쁜 눈이 살포시 휘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은혜를 잊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가장 커.”
……은혜를 모른다고 중얼거리던 이그드라실이 떠오른 이유는 왜였을까.
다른 때였다면 나도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미친 멍멍이라고, 아득바득 기어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다섯 살 이후에는요?”
“그 이후라니. 릴 프레이르가 그 이름으로 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네.”
“글쎄.”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 된 릴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죽고 없는 사람들 얘기를 꺼내기는 조금 그렇지만…….”
말리크가 없애버린 형제들에 대한 소리였다.
“정말, 다른 형제들은 지금 다른 사람들이 널 대하듯 날 대했거든. 그때에도 형님은 유일하게 크게 달라진 태도를 보이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 예전처럼 마음대로 업어주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할 수는 없으셨지만. 날 인간답게 가르치셨어.”
“좋은 형님이셨네요.”
데스테리언에서 릴을 대하던 말리크의 태도가 생각난 나는 짧게 덧붙였다.
“저번에 데스테리언에서 뵈었을 때에도 얼추 느끼긴 했어요.”
“응. 그러니까.”
릴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결단코 형님을 배신하지 못해.”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