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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62화 (6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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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나도 프리드린은 역병에 안 걸릴 줄 알았는데.”

평소처럼 릴은 가볍게 대꾸했다. 완벽한 모른 척이었다.

하비에르는 있는 힘껏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불만을 표현했다. 평소 하비에르가 내게 말하는 것처럼 오해하지 좋게 말하지 말라거나…… 그런 말을 내뱉을 줄 알았는데, 하비에르의 입술에서는 쓴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말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잔소리가 시작될 모양이다. 날 무슨 온실의 꽃 취급하는 릴이 내 귀를 틀어막았다. 저기, 그래도 들릴 말은 다 들리는데요.

릴은 무거워진 얼굴로 엄하게 한마디 했다. 하비에르를 담은 그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하비.”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못 가립니다.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났습니다.”

소문? 무슨 소문.

하비에르가 곁눈질로 나를 힐끗거렸다. 그가 날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왜 못 가리지? 하늘 대신 내 눈을 가리면 되는데 말이야. 사람들은 늘 발상을 전환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 발전이 없는 거야.”

“카림…….”

릴의 긴말이 이어지자 하비에르가 신음을 토해냈다. 릴의 태도는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겠지만, 늘 그렇듯 하비에르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시작했다.

역사서에서나 나오는, 바른말만 하는 충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우습게도, 그 충신이 끔찍하게 싫어서 목을 쳤다는 폭군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오펠성에도 역병 증세를 보이는 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시발점이 이그드라실로 지목되고 있고요.”

……귀족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걸렸구나.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그…… 어쩌고는 둘째 치고 카림의 성후라는 신분적으로나, 성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위치적으로나 내가 가장 안전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진짜 역병이라고 해도 그렇고, 릴의 말대로 중독이 의심된다고 해도 그런 상황이지 않나. 뭔가 이상한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민간에 떠도는 소문입니다. 그거하고 비교하면 성안 이야기야 아무것도 아니죠.”

“민간에? 그건 또 무슨 말이람.”

“이그드라실이 가짜랍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릴의 얼굴이 험악하게 물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른 그렇지 못한 표정이라니.

…나는 그가 저런 얼굴도 지을 수 있다는 사람인 걸 처음 알았다. 새삼스레 요즘 릴의 여러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가짜라니.”

자그마하게 되씹는 목소리에서 화가 묻어 나왔다.

솔직히 내가 가짜 이그드라실이라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나였다. 혼전계약서가 있다고 한들 이 결혼을 무를 수 있지…….

‘……아니, 이제는 별로 무르고 싶지는 않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내면의 변화였다. 그렇게 질색하던 게 겨우 몇 달 전의 일인데.

나는 어느덧 이 남자에게 홀라당 넘어가 있었다.

천천히 이 남자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살랑거리는 머릿결도, 단단한 눈빛도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홀라당 넘어간 걸까.

항상 던져대는 느끼한 말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고, 날 놀려먹는 게 취미 특기인데 말이다. 물론 가끔 이상한 감동을 주기야 하지만…….

“틀림없는 진짜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내가 보증할 수 있는데.”

“그걸 누가 믿습니까?”

“글쎄. 너?”

“저도 믿기 힘듭니다.”

“아닐 텐데.”

가볍지만 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하비에르는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는 웬만한 기적을 보여도 눈속임이라고 할 텐데, 지금 이그드라실께서는 하실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릴은 뭐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그건 하비에르의 말이 맞기 때문일까, 아니면 반박할 가치가 없기 때문일까.

……둘 다일지도 모른다.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꼬이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 법했다. 저번에도 한번 느꼈지만 하비에르는 묘하게 재수가 없었다. 맞는 말인 걸 머리로는 잘 알지만 정말 듣기가 싫은 소리들이니까.

‘오늘 참 묘한 깨달음을 여러 개 얻네.’

나를 다시금 흘끗거린 하비에르가 노골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카림께서 말리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성후와 짜고 사기를 친 거다, 그래서 오펠까지 내려온 성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서지도 않는 거다…….”

하비에르의 말이 이어질수록 릴의 인상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릴은 눈빛으로 선명하게 입 닥치라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하비에르의 말은 끝날 줄을 몰랐다.

…새삼스럽지만 하비에르가 역시나 릴의 취향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아득바득 잘 기어오른다고 해야 할까.

“기적을 일으킬 줄 모르는 거다, 그게 들통날까 무서워 몸을 사리다가 역병을 얻었다, 이그드라실을 사칭한 죄일 것이다, 분노한 이그드라실께서 저주를 내린 것이다. 라고 하더군요.”

역병이란…… 신께서 징벌이 내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니까.

이그드라실은 내가 자신의 힘을 받은 게 맞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잘 알 수가 없는 문제기도 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음, 릴의 존재가 있으니 믿기야 하겠지.

어쨌든 왜 내가 이런 역병에 걸린 거지? 어쩌다가?

“신께서 신의 저주를 받을 리는 없을 테니까요.”

“적당히 하자? 아픈 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네.”

눈으로 하던 말이 결국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하비에르는 굽히는 법이 없었다. 늘 그렇듯 당당하게도 내뱉었다.

“이그드라실께서도 아셔야 하는 일입니다.”

“꼭 지금 알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나중에 알아도 안 늦어.”

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식은땀에 젖어 있는 내 이마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안 봐도 뻔하긴 하고. 별로 무서운 일도 아니고 걱정해야 할 것도 아니야. 늘 그래 왔으니까.”

“누구의 입에서 퍼지기 시작한 건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딱딱하게 대꾸한 하비에르가 릴과 나를 한 차례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눈빛은 정말 맹목적이었다.

“성후께서 이그드라실이 맞든 아니든……. 그 진실 여부도 중요하지 않고요.”

“그럼 네 생각에 중요한 게 뭔데.”

“민심이 흉흉합니다.”

하비에르는 운을 떼고, 릴은 학을 떼었다.

“민심이라니. 그게 내가 신경 써야 할 문제인가?”

“예.”

하비에르는 더없이 강건하게도 권유했다. …아니, 왜인지 모르게 말리카가 내게 명령할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 기회에 역병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하고, 해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싫은데.”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떨어진 답이었다. 하비에르가 미간을 모았다.

“원대하신 카림.”

더는 듣기 싫다는 듯 릴이 손사래를 쳤다. 다만 하비에르는 꿋꿋했다.

“저도 잘 압니다. 이그드라실께서는 정말 몸을 사리셨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신 것도 몇 번 되지 않으며 그나마 방문하신 곳은 신전뿐이었지요. 그런데도 바깥출입을 많이 한 하인들보다 먼저 병증이 나타났다는 건 이상한 일이 맞습니다.”

“확실히 옮는 병은 아니야.”

릴은 조용히 덧붙였다.

“중독 증세에 가깝다고 생각하고는 있었거든.”

저 일에 대해 하비에르에게는 말하지 않았나 보다. 개인적으로 조사했던 건가.

…하긴, 사실에 대해 알았다면 저 광신도가 어지간히 귀찮게 했을 테니. 나라도 말하기 싫을 것 같다.

“중독이라면……. 해결의 실마리는 도리어 간단하군요.”

“응.”

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되면 도리어 간단한 일이었다. 이 병의 원인은 내가 가까이한 것 중에 있을 테니까. 그중 릴이나 이 방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은 것.

그게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내 어깨를 매만진 릴은 작게 속삭였다.

“프리드린, 역시 그 나라는 쓸모가 없어.”

그 나라?

‘이산나가 쓸모 있을 때도 있네.’

얼마 전 릴이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저 말을 왜 했었더라.

그 독특한 모양의 과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너무 맛있고, 덕분에 한동안 내 주식이 되었던…….

설마.

“리, 릴…….”

나는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가 흘렀다.

내 목소리에 릴이 어깨를 들썩였다. 놀란 듯 크게 늘어난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프리드린.”

내 이름을 입술에 얹은 릴이 바짝 고개를 기울였다. 자그마하게 울리던 내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할 수 있겠어?”

“네…… 에. 저기…….”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그 눈물겨운 고통 속에서 나는 겨우겨우 중얼거렸다.

하지만 고통과 별개로 걱정이 앞서서, 겨우 한마디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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