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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61화 (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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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를 안타깝게 생각해서 건네는 충고였다. 자신이 먼저 걸어온 길을 따라 걷지 않기를 바라는, 위대한 존재의 사려 깊은 마음이 절절하게도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순간적으로, 눈앞의 이그드라실을 가엾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잊지도 못한 채, 지우지도 못한 채. 배신당한 상처에 아직도 떨고 있었으니까. 영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시간 동안 아파하면서, 괴로워하면서.

그리고.

“릴은 안 그래요.”

이것만큼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 단호한 대꾸에 하릴없이 나를 응시하던 이그드라실이 남몰래 혀를 찼다.

[그래……. 아직은 찬란한 단꿈에 젖어 있을 때지.]

부드러운 음성에는 상처가 올올이 서려 있었다. 아름다운 이그드라실이 무척이나 처량하게 느껴져서, 안타까운 마음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위로도, 그 어떤 것조차 전할 수가 없었다. 아름답기에 더더욱 쓸쓸한 황금빛 눈을 빛낸 이그드라실은 고요히 덧붙일 따름이었다.

[내가 타인을 믿는 만큼 그 사람이 나를 믿어주는 것도 아니지. 배신은 단 한 순간에, 나조차도 예기치 못할 때에 일어나기에 배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란다. 내 아가야, 신뢰만큼 덧없는 것은 없다.]

“그래도 이건 신뢰의 문제가 아닌걸요. 무, 물론 그 사람은 매일 날 놀려먹고, 변태에, 얼굴하고 안 어울리는 짓만 해대지만…….”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말을 만들어가던 나조차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모두 사실이긴 하잖아?

한순간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린 나는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남에게 쉽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말을 내뱉으며 생각하자면 그 남자는 천성이 그랬다. 무, 물론 첫 만남 때 사람들을 썰어버린 전적은 있지만……. 그건 특수한 상황이니까 일단 논외로 치고.

적어도 릴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까 말리크의 자리를 지켜주고 싶어 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이 괴로워도 인내하고, 차라리 스스로의 존엄을 해치는 것을 선택했다. 조금만 이기적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치였는데도 저랬다.

하비에르가 꾸역꾸역 기어올라도 너그럽게 봐주고 넘어갔다. 신전의 신관들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자면 완전히 딴판이었다.

[사하크도 그랬었단다.]

조곤조곤 대답하던 이그드라실이 다시금 눈을 휘었다. 눈 위에 자리 잡은 속눈썹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너무 예쁜 거 아니냐고. 흑흑, 졸지에 오징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자신보다 남을 사랑하고, 나보다는 타인을 위했지. 그러니 한 나라의 지배자로 존경받은 게 아니겠니?]

저건 내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나보다 남을 사랑하고, 나보다 타인을 위한 사람이면 정말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 건 맞지.

내가 수긍하는 듯한 눈치자 이그드라실은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욕심을 가지고 타락하는 건 단 한 순간의 일이었다. 사하크에게 욕심을 갖게 한 내 잘못이 크긴 했지만.]

“…….”

그래서 그 릴이 변할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에게 상처 주고, 상처 입히고, 그걸 당연시하게 여길 사람이 되리란 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릴을 변하게 만들 만한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걸. 개판인 왕실에서 권력을 좇으면 모를까, 그는 이제 와서 말리크 자리에 욕심을 가질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단번에 지금 판도를 뒤집을 수도 있을 테고.

[애초에…… 그의 기도를 듣는 게 아니었다. 이 땅에 내려오지도 말았어야 했고,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내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

지극히 아름다운 이그드라실은 처량하게도 중얼거렸다. 사람을 홀리는 것만 같은 황금빛 시선이 나를 품고 애처롭게 빛났다.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그때 새삼스럽게 상처를 말하지 마렴. 난 미리 경고했으니.]

서서히 고개를 돌린 이그드라실은 아득히 먼 곳을 응시했다. 내내 배신에 대해 말하며 내게 겁을 주더니,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음성이 이그드라실의 입술을 비집었다.

[이만 돌아갈 시간이다. 네 단꿈이 너를 찾는구나.]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릴 때 세상이 일그러졌다.

* * *

“프리드린.”

날 부르는 음성이 귓가에 젖어들었다.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지독하고도 끔찍한 암전을 맞이했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낀 듯 흐린 시야에 사람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무엇이든 보려고 노력하자 회색빛으로 느껴졌던 것들에 색상이 담겼다.

부드럽게 살랑거리던 애쉬 그레이빛 머리카락. 걱정스럽게 반짝이던 호수 같은 눈빛. 여전히 우아한 외양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릴이었다.

“어때. 정신이 들어?"

“…….”

방금 전까지 그토록 자유로웠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혀를 움직이고 입술을 열었지만 목소리조차 흐르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온몸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턱 막혀온 숨통이 이상한 쇳소리를 냈다.

미치도록 아팠던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하지만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들. 그때와 비슷한 고통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눈앞이 흐렸다. 겨우 그를 올려다보던 내 눈빛이 어떤 말을 하고 있었을까.

다만 릴은 겨우 숨을 몰아쉬는 나를 다정히도 품에 안았다. 땀에 젖은 이마를 상냥하게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살아 있어. 괜찮아.”

“…….”

아, 나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묻고 싶었나.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를 궁금해했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뱅뱅 메아리쳤다.

이건 그러면 세 번째 목숨 빚이야? 이번에는 이자가 몇 부야? 첫 번째와 두 번째 빚은 결혼으로 탕감했는데, 이번에는 뭘로 갚지?

“설마하니 내가 그렇게 야박할까.”

안도의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조곤조곤한, 조용하고도 따스한 속삭임이 노랫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빨리 털고 일어나. 그게 이자야.”

‘내,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지?’

“넌 얼굴에 다 보인다니까. 아파도 똑같네.”

우, 우씨. 어떻게 이럴 때마저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내가 입술을 비죽거리자 그는 다정하게도 말을 붙여왔다.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 프리드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두 눈으로 물었다. 릴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서 나아야 하니까.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

이어지는 말에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릴의 눈물겨운 병간호가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언니가 나를 돌봐주던 것과 비슷했다.

사람을 치유하는 그의 힘이 있었지만, 예전에도 내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 와중에 병간호는 쉬운 일도 아니었다. 원래 아픈 사람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이가 간병인이었다.

릴은 모든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사소하게는 죽을 먹이는 것부터, 옷을 갈아입히고 땀에 젖은 몸을 닦아주는 것까지. …물론 후자는 약간의 사심이 엿보이긴 하지만.

남에게 대접받는 게 익숙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수발을 잘 드는 건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역시 이 결혼이 그에게는 사혼째인 게 맞는 거 같아.

내가 힘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면 릴은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사랑하는 아내님이니까 하는 거지.”

“…….”

그리고 저 말을 듣는 순간, 삼혼인지 사혼인지 의심했던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것 참.

내가 언니에게 까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꼼짝 못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언니가 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너무 잘 아니까. 아픈 사람의 곁에 붙어 돌보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니까.

덕분에 릴에게도 앞으로 꼼짝 못 하게 될 것 같았다.

아, 지금도 이기지 못하는데. 나는 평생 먹이사슬 최하위권에서 살겠구나. 흑흑.

그렇게 과거로 역행한 것만 같은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이그드라실이 유병단수라고까지 말한 역병인데, 잘 통하지는 않아도 릴의 힘 덕에 목숨을 연명하는 것 같았다.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죽어 나갔을지도 모르겠지.

천천히 나아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그드라실께서 역병이라니…….”

하비에르는 느지막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 병간호 덕에 두문불출하고 있던 릴을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누워서 꼼짝 못 하는 나를 본 하비에르는 심각하게도 중얼거렸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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