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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이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 말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역병이 도는데! 말리크는 우리에게 부득불 일을 시켜 놓고서! 조카 타령을!
그나마 적어도 이제는 ‘뀨?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나요?’ 하고 물어보지 않아도 될 상태라 다행인가. …아니, 다행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문제인가?
내 얼굴이 볼만해지자 페라엘 샤리프스가 슬그머니 눈을 휘었다. 여러 뜻을 담은 미소였다.
“왕실에 아이가 없지 않습니까. 두 분께 좋은 소식이 있다면 왕실에도 활기가 돌 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내게 먼저 ‘좋은 소식’이 생기면 더 난리가 나지 않을까? 그런 의문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 좋은 소식이 필요한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리카께도 곧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요?”
내 목소리에 페라엘 샤리프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페라엘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너 혼날 준비 됐니?’라는 의미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덕분에 말단 시녀 때의 본능이 살아난 나는 쭈글쭈글해진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어, 엄마야, 무서워라.
…솔직히 말리카에게 아이에 대해 언급하는 건 금기 사항 수준이었다. 말리카는 아이를 원했지만 생기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말리카가 릴에게 그토록 날을 세우는 것도 아이가 없는 게 한몫할 것이다. 말리카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릴이 제아무리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다고 해도, 서열이 밀리게 되니까.
“염려해주신 대로 곧 좋은 소식이 들리겠지요.”
이윽고 들려오는 답은 더없이 사근사근했다. 하지만 사근사근해서 더 소름이 끼치는 이유는 왜 때문일까.
페라엘은 뼈 있는 말을 속삭였다.
“이그드라실께서 이토록 사려 깊으시니 말리카께 유효한 축복을 내려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조만간 말리카의 임신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면 내가 한 방 먹겠구나 싶었다. 나는 핑계와 변명을 속삭여야 했다.
“그게 축복만 있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어서요…….”
“축복만 있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요.”
페라엘 샤리프스가 내 말을 부러 곱씹었다. 고개를 한 차례 숙여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그드라실의 뜻, 잘 알겠습니다. 말리카께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 아니, 저기요?
내 말을 비뚤게 받아들인 게 틀림없었다. 이제 왕실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걸 내 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나보고 대체 어쩌란 말이냐! 누가 먼저 아이 얘기 꺼내랬냐고! 나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사방에서 이러는 건데!
“오펠의 신민들이 기대하는 바가 많은 건 알고 계시지요?”
페라엘이 말머리를 돌렸다. 은근한 어조로 나를 책망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라도 해 주시지요. 말리카의 은혜를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셔야 할지 잘 아실 겁니다.”
“…….”
그 뼈 있는 말에 나는 잠시 페라엘을 빤히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릴의 말을 잘 들었다. 정말 딱 이곳의 신전에서 내게 요구한 것만 했다.
결국 오펠의 사정을 보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날 혼내는 소리였다. 정작 뭔가를 했으면, 그게 릴에게 좋은 결과를 낳았으면 더 크게 혼이 났을 것 같지만.
부러 일을 망치기라도 해야 했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옳은 거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문이 왈칵 열렸다. 예고 없이 릴이 들이닥쳤다.
“릴!”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본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페라엘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릴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페라엘 샤리프스가 원대하신 카림을 뵙습니다.”
“페라엘.”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나는 그가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적의가 가득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제법 살벌했다.
“여기까지는 웬일이지?”
“말리크께서 오펠의 사정을 둘러보고 오라고 명하셨으니까요. 그것 외에 제가 이곳까지 올 사정이 있겠는지요?”
“형님께서 명하셨다?”
“예.”
정말 사근사근한 대답이었다. 다만 페라엘의 눈빛도 릴의 눈빛만큼이나 살벌했다. 그 눈빛이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니?’ 하고 말하고 있었다.
“말리크께서 카림께, 하루바삐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라…… 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진 말에 릴이 미간을 모았다. 아무래도 저게 정말 말리크의 뜻인지 알 수가 없으니 저러는 모양이었다.
불편한 공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천천히 되묻는 릴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형님께서 굳이 그걸 페라엘에게 전달하라고 명한 이유를 모르겠는데. 브렌델 영주도 이곳에 와 있는데 말이지.”
“말리크의 깊은 뜻을 제가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다만 샤리프스인 제가 훨씬 믿음직하다는 건 카림께서도 잘 알고 계신 사항이 아닌가요?”
“샤리프에 비해 세린은 믿을 게 못 된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샤리프도 세린도 모두 말리크께서 신뢰하는 곳입니다.”
페라엘의 검은 눈빛이 슬쩍 나를 스쳐 지나갔다.
“라비아와 브렌델이 샤리프스와 격차가 있을 뿐이지요.”
샤리프의 후계자인 샤리프스와, 각각 세린과 라펠리타의 방계인 라비아와 브렌델. 신분부터 월등하게 밀렸다.
하위 귀족이라고 대놓고 나와 언니를 무시하는 소리였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왜일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내 자신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까.
“참, 레브아께서도 카림께서 잘 지내고 계시는지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편지 한 통 없으시다고 서운해하시더군요.”
“…….”
그 노골적인 협박에 릴은 페라엘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나는 새삼스럽게도, 하비에르가 레브아를 언급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레브아야말로 말리카의 손아귀에 있는 릴의 족쇄였다. 씁쓸하게도.
“브렌델 영주에게도 이만 귀환을 명하셨습니다. 오래도록 자리를 비우니 보기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형님께서? 아니면 말리카께서.”
릴이 확인하듯 물었다. 페라엘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뭐, 굳이 대답하지 않았어도 답은 뻔했다. 말리크가 형부의 귀환을 명한 것이라면 말리크의 시종이 왔겠지. 말리카의 수석 시녀가 아니라.
…사실 말리크는 브렌델에게 큰 관심이 없을 것이다. 말리카는 자신의 먼 인척이니 신경을 쓸 뿐. 자신의 편은 하나라도 많은 게 좋으니까.
“이건 제가 바로 전달하도록 하지요. 저도 오펠에 길게 머무를 생각은 없으니 제가 이곳을 떠날 때 브렌델 영주 부부를 함께 데리고 귀환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페라엘은 고상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직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페라엘이 자리에서 사라지자 릴이 서둘러 내게 다가왔다.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기며 물어온다.
“괜찮아? 별일 없었지?”
“벼, 별일이라고 할 건 없었는데…….”
페라엘이 설마 나를 해치기라도 하려고. 물론 그녀의 눈빛마저 무섭긴 하지만.
말꼬리를 흐린 나는 릴이 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페라엘이 했던 말, 그놈의 아이 타령. 그리고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내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돋아났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실직고해야 했다.
“저…… 아무래도 사고 친 거 같아요.”
“사고? 웬?”
“그게…… 절대로 대놓고 말한 건 아니고요. 결론적으로 말리카께서 아이를 못 가질 거라고…… 알아들을 법한 말을 해버려서요.”
절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다. 기도한다고, 축언을 받는다고 아이를 가진다면 세상에 왜 불임으로 고통 받는 부부가 있겠나?
다만 페라엘이 저렇게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했다. 이제는 나도 눈엣가시일 테니까, 뭐라고 말하든 한껏 꼬아서 받아들이겠지.
“아니? 그런 거라면 잘했는데.”
그의 반응에 눈을 멍청하게 끔뻑여야 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자연스레 되물었다.
“……네? 잘한 건가요?”
“응. 그것도 아주. 페라엘이 그렇게 알아 들을 법한 말이라면 와,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정말 의외의 칭찬이었다.
릴의 반응에 눈을 멀뚱멀뚱 끔뻑이고 있을 적, 그는 나지막한 한숨에 내 이름을 얽었다.
“프리드린.”
“네?”
“사람이 못된 짓을 하면 그렇게 업보를 받고 살아.”
업보. 그 소리에 문뜩 생각했다.
한쪽은 어머니를 잡고 협박하고, 다른 쪽은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 업보라고 말하고…….
말리카와 그의 관계는 정말 뒤틀려 있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겉보기에는 화려한 왕실인데, 안은 참 썩은 꼴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