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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금 그 말씀은…….”
충격을 받은 나는 겨우 대꾸할 수 있었다. 내 목소리가 자연스레 작아졌다. 혹시나 누군가 들었을까 싶어서 근처를 둘러보는 건 덤이었다.
가장 먼저 레브아께서 돌아가신다고? 정말 경악할 소리였다.
“말리카께서…… 레브아를 어떻게 하기라도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못 하실 것 같습니까? 할라 라펠리타―프레이르가 어떤 인간인데요.”
하비에르가 말리카의 이름을 막 부르는 것에 기겁하고 말았다. 어허허, 대범하다 못해 막 나가네.
이제 하비에르가 얼추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정말 당장에 목이 잘릴 하극상이었다.
내 경악이 어린 얼굴을 보았음에도 하비에르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제 카림께서는 지켜야 하실 게 많습니다. 예전에는 레브아 하나였다면 이제는 세린 가문도 포함입니다.”
그 말에는 눈을 깜빡여야 했다. 우리 본가?
할아버지는 제1재상이었다. 프레이르의 정계에는 제1재상부터 제8재상까지 총 여덟 명의 재상이 있었다. 제1재상은 그중 명실상부, 이 나라의 최고직이었다.
다시 말해 말리크의 오른팔이기도 하다는 거다. 말리크에게 반발하는 사람은 제1재상직을 차지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가문은…… 말리크의 편인데도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1재상이 대수입니까? 바꾸면 그만인데요. 할 사람은 많습니다.”
그것도…… 그렇지. 제1재상 자리를 내리겠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이 뒤집혀서 덤벼들 테니까.
“어쨌든 레브아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쉽게 움직일 수가 없는 겁니다. 먼 곳에 있으니 지켜드릴 수도 없죠.”
“…….”
나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릴은 왜 저런 얘기를 내게 해주지 않는 걸까…… 싶다가도.
내가 말리카는 그럴 리가 없다고 꾸준히 얘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다못해 그를 설득하려고 했던 일까지 뇌리에 그려졌다.
‘아하하, 말해주지 않을 만하네.’
말리카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내가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릴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말리카는 내게 있어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시녀들을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었다. 늘 상냥하고 우아해서 왕궁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었다.
그래서 릴과 하비에르가 말하는 말리카가 내가 아는 그 말리카가 맞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가 있을까?
잠시 관자놀이를 압박한 나는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이 둘이 아무리 말리카를 나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도 나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말리카께서 그러신다는 증거는 있고요?”
“넘치지요.”
딱 잘라 대답한 하비에르의 녹색 눈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그드라실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도 증거에 해당됩니다.”
“……예?”
“애초에 말리카께서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마, 맞지. 하비에르는 그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다.
…괜히 지금도 말리카의 첩자로 오인을 받을까 싶어서 필사적으로 부정해야 했다.
“그, 그렇다고 제가 지금 말리카와 연락을 한다거나…… 그러는 건 아닌데요.”
“이그드라실께서는 이그드라실이시니까요. 특수한 상황입니다. 말리카께서 이그드라실을 카림께 보낼 때를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
내게 당근을 내밀고 채찍을 휘두르던 말리카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가 순수하게 나이던 시절, 말리카는 섬뜩한 협박도 거침없이 했었다.
음, 그런 걸 떠올리면…… 수틀리면 충분히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일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 성품이기는 했다.
백모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도 있고. 말리카의 눈 밖에 나서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하지 못했다는 귀족의 이야기가.
내가 생각이 많은 얼굴이 되자 하비에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이그드라실께서 그저 프리드린 라비아였다면, 지금도 말리카께서는 이그드라실께 이런저런 명을 내리고 계셨을 겁니다. 카림의 성후는 놓치기에는 큰 물고기니까요.”
“…….”
저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그드라실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네? 어떤 말요?”
“저는 카림께서 깔끔하게 이 일을 해결하시고, 신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릴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였다. 그는 말리크 자리에 욕심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릴은 생각 외로 소탈한 편이었다. 말리크 자리에 앉는다면 하루도 못 버티고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그건 릴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잖아요?”
“예, 그것도 맞습니다.”
하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게도 하비에르와 릴이 참 상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릴 밑에 저런 시종이 들어왔을까? 아무리 솔테에서 보낸 감시역이라고 해도.
“냉정하게 들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제게는 레브아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레브아께서 자꾸 위협을 받으시는 건 레브아께서 하신 일의 대가죠. 말리크를 선택하신 분도, 할라를 말리카로 추대한 분도 레브아시니까요.”
“…….”
냉정하다 못해 잔인한 말이었다.
“하지만 카림께서는 신경 쓰시죠. 그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카림을 낳고 기르신 어머니시기에.”
신경 쓰다 못해…… 카림에게 있어 레브아는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다. 별로 티를 내지는 않지만, 지금도 레브아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그드라실께서 병자를 돌보러 나섰다는 이야기가 말리카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 사람들의 걱정대로라면 아픈 레브아를 해치겠지. 사실 이상한 위치에 서 있는 나야말로……. 지금 무슨 짓을 하든 간에 환호를 받고 욕을 먹을 위치였다.
눈을 내리깐 나는 중얼거렸다.
“어려운…… 문제네요.”
“원래 늘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그드라실께서는 카림의 선택을 따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비에르는 딱 잘라 대꾸했다. 내 부탁 따위는 들어줄 생각이 없단 의미였다.
“그게 틀린 선택처럼 보인다고 해도요.”
가만히 있으라는 릴의 말이 떠올랐다.
뭐, 적어도 내 생각보다는 릴의 생각이 옳기야 하겠지. 나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내 양심의 찔림 따위는 무시해야겠다. 괜히 더 큰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까.
* * *
며칠 지나지 않아 정말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내게 찾아온 그녀는 다른 때와 다르게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절을 올렸다.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어색해서 딱딱하게 굳어 있을 때, 그녀는 내 치맛자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샤리프스 귀부인…….”
나는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페라엘 샤리프스. 제2재상 샤리프 성주의 후계자인 샤리프스의 안주인으로, 말리카의 수석 시녀였다. 그녀는 부드럽고 온화한 말리카 대신 왕궁의 기강을 잡았던, 왕궁의 숨은 실세였다.
그리고 웬만한 사건에는 나서는 일이 없는 분이셨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몰래 한 소리씩 던졌을 뿐.
다시 말해 페라엘 샤리프스가 이곳까지 직접 납시었다는 건, 지금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바짝 긴장한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샤리프스 귀부인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말리카께서 걱정이 크십니다.”
그녀는 그 어떤 포장조차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단 시녀 시절의 쭈글함이 살아 있던 내 음성은 소심하기 그지없었다.
“걱정이라면, 어떤?”
“남부 지방의 병세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고요. 신민들을 아끼시는 마음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계십니다.”
말리카가 이 나라를 사랑하는 건 진실이었으니까, 충분히 가능한 말이었다. 카림과는 앙숙이었지만 객관적으로는 좋은 말리카긴 했다.
……뭐, 이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카림과 더 앙숙인 것일까.
문뜩 그녀의 냉정한 눈이 내 목덜미를 스쳤다. 어젯밤에도 릴이 새겨두고 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나는 서둘러 목덜미를 가려야 했다.
아, 남기지 좀 말라니까!
“이그드라실께서는 좋아 보이십니다.”
페라엘의 냉정한 눈이 슬며시 휘었다. 눈만 웃는 그 모양새가 얼마나 섬뜩한지…….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이면 모른다.
난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하…….”
“말리카께서 이그드라실과 카림의 소식을 들으면 좋아하시겠군요.”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태도였다. 늘 그렇듯 페라엘은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말리크께서도, 말리카께서도 조카 소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