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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생각을 거듭했다. 역병이라고 했는데 역병이 아니라니?
지금의 나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역병이 아니라뇨?”
말리크가 눈엣가시 같은 카림을 쫓아내려고 우리에게 거짓말을 친 걸까? 내가 가발을 벗긴 괘씸죄는 덤이고.
내 되물음에 릴은 제법 진지해진 태도로 대꾸했다.
“이것저것 조사하다 보니 중독 증세에 가까운 것 같거든. 역병이라기에는 뭔가 안 맞아.”
……중독?
문뜩 말리크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보는 괴질입니다. 발병하면 사흘 동안 열이 오르고 떨어지다가 반수는 목숨을 잃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두루뭉술한 표현이다. 대부분의 병은 저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나. 아프면 열이 오르고, 열이 내리지 않으면 사람은 죽으니까.
“그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어쩌다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중독이 되었냐는 거지. 역병으로 착각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어떤 독을 먹었을까. 그것도 무지하게.”
……그러게나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을 먹고 이상이 생기면 근처에서 바로 알 수밖에 없지 않나? 중독 증세는 바로 티가 나니까.
그래서 가장 하수들이 쓰는 공작이 독살이라는 말도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뭘 먹고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수상한 걸 모를 리가 있겠냐고.
그런데도…… 중독 증세에 가깝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적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바짝 치켜올렸다.
“수은이나 비소, 납처럼…… 조금씩, 알게 모르게 중독되어 왔다는 건가요?”
“역시 내 아내님. 감이 좋다니까.”
릴이 혀를 내둘렀다. 근데 감이 좋다는 건 칭찬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아니, 칭찬이든 아니든 뭐 어때. 내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돋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 그 원인만 알아내면 해결될 일인 거네요?”
“뭐, 일단은. 무슨 독인지만 찾아내면 해독제는 의사들이 알아서 하겠지. 물론 해독제를 못 찾아낼 수도 있지만.”
정말 냉정하지만 틀릴 것은 없는 소리였다. 수은과 비소, 납 중독은 정말 오래전부터 있던 사례지만 지금도 해독제가 없었다. 그냥 저것들을 사용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을 뿐.
비슷한 사례라면 결론도 같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큰 문제가 될 건 아니었다. 해독제를 만들지는 못해도 저 원인이 되는 걸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일은 없을 테니까.
물론 사람들이 저 말을 순순히 들을지가 문제지만. 납 같은 경우에는 근절시키기가 굉장히 힘이 들었다. 납이 들어간 화장품보다 좋은 화장품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근데 가장 큰 문제는.”
그때 릴이 중얼거렸다.
“이걸 그냥 지켜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알아낸 게 있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맞는지 판단이 안 선다는 거야.”
나는 눈을 두어 차례 깜빡거렸다. 지금 저게 왜 고민거리가 되는 걸까. 내 상식으로는 약간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잖아요. 일단 알아낸 게 있으면 알리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래야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도 있고요.”
“안쓰럽지만 어쩌겠어. 난 이런 일에 책임감을 가지면 안 돼.”
책임감을 가지면 안 된다니? 자연스럽게 반문했다.
“네? 왜요?”
“프리드린. 내가 이 나라에서, 나라에 관련된 일에 책임감을 가지면 그건 반역이야. 말리카가 나서기 너무 좋은 명분인데?”
대꾸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릴 데스테리언이 무엇인지 자꾸 깜빡하는 데에는 저 사실도 포함인 모양이다.
릴 데스테리언은 카림이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 말리크가 되지 못한 아미르.
왕실이 품고 있는 영원한 골칫거리, 말리크의 적. 말리크에게 자식이 없는 지금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기도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가 내 남편이라는 사실이 너무 명확해서 그런가. 내가 왕족과 결혼했다는 게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아서 그의 처지도 자꾸만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도리어 아무 사이가 아닐 때에는 그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명확했는데.
그래도…… 내게는 아버지께 배워 온 게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긍지와 의무. 우리가 누리는 것들만큼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신민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거.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 게 맞는데. 그의 사정이 있는 이상 저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쉽게 말할 수도 없었다.
정말…… 무엇도 선택할 수가 없구나.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제법 무겁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진짜 역병이었다면…… 내 처지가 나았을 텐데 말이야.”
“…….”
어떻게 생각하자면 한없이 이기적인 소리였다. 하지만 뭐, 일단 내가 살아야 나라도 있고 다른 것도 있지. 내가 죽어 나가면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일까.
릴의 처지를 잘 아는 내가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 정말……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옳은 걸까.
“자.”
그때 릴이 문뜩 오른쪽 뺨을 내밀었다. 오른손으로 오른쪽 뺨을 툭툭 건드리는 짓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확하잖아?
“……뭐, 뭐예요?”
“안 해주면 안 간다? 정말 일주일 동안 여기서 안 나가는 수가 있어.”
또다시 발끝까지 새빨개진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이 인간이 왜 이래?”
“어허.”
“됐고 얼른 가요!”
내 발악에 릴은 순간적으로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대로 가볍게 내 입술을 훔쳤다.
이어 밝은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든 그가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피가 몰린 얼굴을 감싸 쥔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야 했다.
짧고도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더한 짓도 해 놓고 왜, 이런 가벼운 스킨십에 마음이 흔들거리는 건지.
찰나의 순간 내게 스며든 그의 향과 촉감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도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
어허허, 어허허허……. 내가 저 인간에게 말리면 지는 거다…….
‘그, 근데…….’
이어 자연스럽게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게로 쏟아지는 무게감과 일체감, 그리고 그의 목소리와 체취, 체온. 깊은 밤에 녹아들었던 나지막한 목소리도, 나를 소중하게 매만지던 그 손길도 모두…….
행복했다. 즐거웠다.
내 질문에 언니가 그저 웃기만 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그 순간을 경험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감각이었다.
* * *
릴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비에르가 찾아왔다. 그는 내게 화술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어쩐지 이 시간에 다른 일을 더 하는 것 같았다.
“하비에르, 부탁이 있는데요.”
“예?”
내 부탁, 소리에 하비에르가 조금 기겁을 하는 듯했다.
“저번처럼 절 남편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사표 내겠습니다. 저도 죽기는 싫거든요.”
…흑역사 하나가 그의 입술을 비집었다. 릴도 그렇고, 하비에르도 그렇고 저 일은 왜 자꾸 언급한담? 당연히 발끈한 나는 바락바락 언성을 높였다.
“그럴 일은 없거든요!”
“그러면 뭡니까?”
침착하게 되묻는 것에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했던 것을 속삭였다.
“저도 역병의 실상을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병자들을 한번 직접 만나 보고 싶어요.”
하비에르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내키지 않는 일인 듯 되묻는다.
“굳이……. 왜 그러셔야 합니까.”
“릴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어서요.”
물론 내가 가서 뭘 보고, 알고, 경험한다고 해도 뾰족한 방법은 생기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명확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릴은 중독 증세처럼 보인다고 했거든요. 제 양심으로는 알아낸 게 있으면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는 게 맞아요.”
그게 귀족으로서든, 왕족으로서든. 적어도 내가 배워온 것은 그랬다.
“하지만 저나 릴이 나서면 말리카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겠죠.”
“말리카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라는 걸 아시면 얘기가 빠르겠군요.”
무척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반대로 여쭈어보겠습니다. 카림께서 왜 그런 고민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아무리 말리크께서 명령하신 거라고 해도, 이런 일에 끼어든다면 말리카께서 카림을 죽이려고 들 테니까요?”
“아닙니다.”
딱 잘라 부정한 하비에르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을 꺼내 들었다.
“레브아죠.”
“레브아요?”
레브아께서 왜?
하비에르의 입꼬리가 비뚤게 말려 올라갔다. 이윽고 냉정하게 읊조렸다.
“카림께서 조금이나마 민심을 얻을 일을 하신다면 가장 먼저 레브아께서 돌아가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