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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날 이대로 한입에 꿀꺽 집어삼킬 기세였다. 괘, 괜히 도발했나?
내 안의 후회와 함께 바짝 오그라든 나는 아득바득, 늘 그렇듯 입만 살아서 기어올랐다.
“도망가면 어떻게 할 건데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줄 요량이시든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카림은 나를 번쩍 안아 들 뿐이었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제법 다급해 보였다.
머리카락을 거칠게 스치는 바람을 느끼던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지금 이런 것보다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다.
“아참, 있잖아요.”
“아무 말 말자.”
“아니, 그게……. 중요한 얘긴데.”
중요한 얘기, 소리에 카림이 미간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이때다 싶었던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있잖아요, 오늘 오펠 거리에서…….”
“아니야, 쓸데없어. 그런 얘긴 나중에 하자.”
그리고 오펠 거리, 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내 말을 끊어버렸지만.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바로 우리 방으로, 지난 며칠간 나 혼자 쪼그리고 자야 했던 그곳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 위에 날 올려두며 내 위로 늠름한 몸을 드리웠다.
괜한 긴장에 발끝이 저며 들었다.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프리드린.”
“예?”
“내가…… 너 때문에 일주일이나 잠을 못 잤거든.”
달콤한 목소리는 그렇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내게서 슬그머니 멀어진 카림은 보란 듯 자신의 눈가를 가리켰다.
“보여? 다크서클 복숭아뼈까지 내려온 거.”
“……네, 그렇네요.”
정말 카림의 눈 밑이…… 어느 경계인지까지 모를 범위가 새카맸다. 그는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일단 좀 자고…… 남은 일은 내일 하자.”
…오늘도 내일을 기약하는 말에 의심이 불쑥, 샘솟았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잠부터 자겠다고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거지?
결국 예전에 언니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 나는 얄쌍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이건 정상이 아니잖아! 언니 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고!
“솔직히 말해요.”
“응?”
“당신 혹시 고…….”
……그런데 그 말이 내 입 밖으로 차마 흐르지 않았다.
“고…… 고…… 고…….”
이게 이렇게 내뱉기 어려운 단어였나. 왜 말을 못 하니! 왜!
“…….”
까끌까끌하고, 위험한 어떤 것이 내 입 안에서만 감돌았다. 차마 내 입에서는 나오지 않는 소리였다.
언니는 자연스럽게 내뱉던데! 언니의 뻔뻔함을 반만 본받고 싶다.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을 적 이 부끄러움 모르는 남자는 자연스럽게도 물어왔다.
“아, 고자냐고?”
“…….”
얼굴이 시뻘게진 난 카림의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도 역시나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린 그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삼 센티냐고는 안 물어봐?”
“예?”
“처형이 안 그러시든? 그렇게 널 놀려 먹고도 남을 분이잖아.”
저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삼 센티요?”
“응.”
“그래서 뭐가…… 삼 센티요?”
남자의 입술이 내 귓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조곤조곤, 조용하게도 읊조리는 것에 발끝까지 시뻘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얼굴로 피가 확 쏠렸다. 단 두 음절의 짤막한 말이 끝났을 때, 이 더운 날씨에 내 입 밖으로 입김마저 나오는 것 같았다.
고, 고, 고…… 아니, 왜 이것도 고로 시작하는 건데?
“……예?”
대…… 대체 언니랑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침없는 어른인 언니를 생각하면 난 입 밖에 내는 것조차 창피한 엄한 얘기도 잘하겠다 싶긴 하다.
“고자도 아니고 삼 센티도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넣어둬도 돼. 내가 설마하니 이렇게 예쁜 아내님을 처녀 귀신으로 만들겠어? 내일 아침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그 장난스러운 대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 한 마디가 걸려서.
“……아침?”
“응, 아침.”
카림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그윽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원래 아침에 하는 게 더 좋대.”
내게는 짓궂게만 느껴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밝아서 싫어요!”
내 발악에 카림은 은근한 눈빛으로 내 몸을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도.
“그 예쁜 몸을 어둠에 숨기는 건 죄악인데.”
“예, 예쁜지 안 예쁜지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
“어떻게 알아요!”
“네가 구경시켜줬잖아. 데스테리언에서.”
……나는 멍청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던, 모순적이게도 잊을 수가 없던 일이었다. 욕실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구경시켜준 적이 있었잖아!
“정말 절경이었다니까.”
그때처럼 카림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그때의 일이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다. 수증기 속에 맺혔던 그의 그림자와 머잖아 마주쳤던 시선까지, 모두.
“딱 한 번 봤는데 도저히 잊을 수가 없더라고.”
“…….”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 같은 몸매를 보면 못 잊어버리긴 할 거다. 완벽에 가까운 조각상이라고!
이윽고 카림이 내 옆으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등 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간만에 푹 좀 자겠다. 이제 네 살냄새를 안 맡으면 잠이 안 와.”
그놈의 혼전 계약서 덕에, 결혼을 한 이후에는 한방을 쓰고 같은 침대에서 잔 건 맞았다. 카림이 나한테 걷어차인 요 며칠을 뺀다면.
……그런데 살, 살냄새라니.
저 말이 야하게 들린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얼굴이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테니까.
괜한 창피함이 밀려와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웅크렸다. 내가 몸을 움직인 덕에 등에 꾸욱, 하고 닿은…….
‘……어라?’
등 뒤로 비벼지는 이 딱딱한 바게트 같은 건…….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꺄아아아악!”
오늘도 어김없이 터진 내 비명은 천장을 꿰뚫었다.
* * *
순진하고, 천진난만하고, 어, 그러니까…….
과장 몇 숟가락 보태서 남자라고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백부님과 사촌 오빠 외에 본 적이 없는 내게는 너무나도 자극적인 일상이었다.
말리카의 궁은 거의 금남의 구역이었단 말이야! 말리크와 선택받은 소수의 시종 외에는 들어올 수가 없었다고!
결국 아침 일찍 기분 좋게 방을 나간 카림과 다르게,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사방을 돌아봐야 했다. 계속해서 생각나는 어제의 잔상이란.
“카림께서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얼떨결에―아마도 모두가 거절했기 때문에― 내 화술 선생을 맡게 된 하비에르가 중얼거렸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네, 뭐……. 카림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 만에 숙면을 취하셨다니까요.”
능숙하게 나를 달랜 카림은 정말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숙면을 취한 것보다, 마침내 거사를 치를 생각에 싱글벙글하는 게 아닐……. 크흠, 흠.
또다시 겨우 생각의 저편으로 밀어 넣었던, 어젯밤 내 등을 긁었던 바게트가 떠올랐다. 남자라면 다 그런 걸 달고 사는 건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에 하비에르의 바지춤으로 자꾸 흘끔흘끔 시선이 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으아아아악!’
부,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아, 내가 점점 누구를 닮아 변태가 되어가는 것 같다. 심호흡을 한 나는 겨우겨우 상념을 떨치고 말머리를 돌렸다.
“하, 하비에르. 카림께 전해 주실래요?”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두 분 사이에 못 하실 말씀이 뭐가 있습니까?”
“어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그런 얘긴 다음에 하자고 하셔서요. 제가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나보다 더 카림에게 익숙한 하비에르가 짐짓 미간을 모았다. 이어 무언가를 판단한 듯 단호하게 물어왔다.
“어떤 겁니까?”
“어제 언니하고 오펠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제가 키운 성수 가지를 파는 걸 봤거든요.”
이번에는 하비에르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정말 구겨졌다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그드라실께서 언제부터 부업으로 원예를 하셨습니까?”
원예라니, 언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과 같은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하비에르가 언니와 겹쳐 보여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
내 되물음에 하비에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어 엄한 음성으로 나를 꾸짖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오해하기 좋기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이건 권고가 아니라 반드시 고쳐야 하실 점입니다.”
어디가…… 오해하기 좋은 건데? 하비에르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가 반문했다.
“저 정말 잘 몰라서 여쭈어보는 건데요. 지금 제가…… 오해하기 좋게 말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