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45화 (45/115)

45

눈을 두어 차례 끔뻑인 나는 소심하게 반박을 이어 나갔다.

“힝, 하지만…….”

“뭐가 또 하지만이야!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있어? 처음은 다 그런 거야.”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라고 배웠잖아.”

“그럼 이혼하든가. 가서 첫눈에 반할 만한 사람 찾아.”

…거침없는 발언에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언니, 말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요?

“참, 못 하지?”

툭 내뱉은 언니가 샐쭉하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지, 나 이혼 못 하지.

근데…… 언니가 저걸 어떻게 알지?

“그러니 얌전히…… 아니지,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좋은 게 좋은 거잖아. 품위유지비 팔천은 아무나 주는 게 아니란다?”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말에 언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뭘?”

“나 이혼 못 하는 거.”

그놈의 이혼에 대한 건 혼전계약서에 떡하니 박혀 있는 문구였다. 당연히 혼전계약서를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혹시나 했던 게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언니가 내 혼전 계약서에 도장!”

“어머머? 지금 무슨 말씀이실까나?”

언니가 내 말을 끊었다. 얄미운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네가 카림께 이혼 서류 던지는 건 불가능한 게 당연하지. 카림께서 네게 던지면 모를까. 근데 카림이 그러시겠니?”

“우씨…….”

“다~ 그런 거란다. 그러니까…… 흐음.”

할 말을 생각해낸 내가 뭐라고 더 따지기 전, 언니는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불리할 때 회피하는 솜씨는 아주 일품이었다.

“좋아. 시상이 떠올랐어.”

“……응?”

“가자!”

그대로 내 팔짱을 낀 언니가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언니는 남의 돈을 쓰는 맛을 제대로 깨달아버렸다.

* * *

한바탕―그것도 내 돈으로― 제대로 쇼핑을 한 언니는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다 풀린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게 요란한 밤 화장을 해준 다음 속삭였다.

“자, 카림께 지금 모습 꼭 보여줘야 해.”

“……보여주면?”

내 되물음을 무시한 언니는 매력적인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나는 그런 언니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나, 나만 두고 어디 가?”

“나보고 신혼부부 방에 남아 있으라고?”

“카림이 올 때까지만!”

“됐거든? 나도 내 님을 뵈러 가야지? 언제까지 탁아만 할 수는 없어요.”

새침하게 대꾸한 언니가 서둘러 사라졌다. 입술을 비죽 내민 나는 그런 언니의 뒤를 남몰래 쫓았다. 혼자서 방 안에 앉아 있기는 너무 민망해서.

언니가 나를 피해 살금살금 도망친 곳은 형부의 곁이었다. 분수대에 앉아 있던 형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물론 그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은 언니를 마주하자마자 환하게 밝아졌지만 말이다. 형부는 다가오는 언니의 손을 다감하게도 맞잡았다.

“아리엘, 잘 다녀왔어요?”

“그럼요.”

“즐거웠나요?”

“네에. 그래도 클리드와 함께 있을 때보다 즐겁지는 않더라고요.”

사근사근하게 답한 언니는 대범하게도 형부의 무릎에 앉았다. 자연스레 형부의 목덜미에 양팔을 겹치자 형부도 언니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람. 닭살 돋아라.

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클리드는 하루 종일 뭘 하고 있었어요?”

“카림께서…… 하하.”

형부가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형부는 따뜻한 눈빛으로 언니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아리엘, 이런 말을 해야 해서 미안한데……. 여러모로 걱정이에요.”

“걱정이라뇨.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말리카께서 아버지를 부르셨다고 하거든요. 우리가 오펠로 출발한 직후에.”

두 사람의 온화한 분위기와 다르게 제법 묵직한 이야기였다.

“우리도 카림께서 부르셔서 왔고, 이그드라실의 일이니 그 누구도 어쩔 수야 없다지만……. 아버지께서도 꽤 난감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러고 보니 형부의 가문, 브렌델은 따지고 보면 말리카 쪽에 가까운 곳이었다. 말리카의 이름은 할라 라펠리타―프레이르로 라펠리타 성주의 딸이었고 브렌델 영주는 라펠리타 성주의 방계 쪽이니까. 먼 인척이었다.

백모님의 추천이 있었다지만 내가 말리카의 시녀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저런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말리카가 나를 카림에 곁에 보낼 사람으로 낙점했던 이유에 저런 계산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아버님께서 고생하셨겠어요. 그래도 클리드.”

언니는 나지막한 한숨에 목소리를 얽었다.

“물론 우리 행동이 말리카께는 거슬릴 수가 있지만……. 리니는 아직도 밤에 제가 어릴 때 선물해준 곰인형을 끌어안고 자는 아이예요.”

그 말에 괜히 흠칫했다. 어떻게 알았담?

형부와 시선을 맞댄 언니의 눈이 예쁘게도 휘었다.

“지금 자기 상황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걱정이 되어서 그냥 둘 수가 없었어요. 카림께서 부르지 않으셨더라도 제가 먼저 왔을 거예요.”

“물론 그 마음은 잘 알아요.”

“제게는 하나밖에 없는, 그것도 딸처럼 키운 동생이에요. 말리카고 카림이고 이그드라실이고……. 클리드도 그냥 다 떠나서, 제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예전처럼요. 이그드라실에 꽃을 피웠다지만 제 동생이라는 사람이 바뀌고 변한 게 아니에요.”

“노력은 하고 있어요.”

형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쓴웃음이 돋아났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아리엘.”

“이해해요.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요. 그래서 고마워요.”

언니는 형부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이어 이마와 이마를 맞대면서 속삭였다.

“함께 와줘서 고마워요. 클리드를 만난 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에요.”

어, 어떻게 저런 닭살 돋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도 하지?

하지만 단순히 닭살 돋는 건 저 말뿐만이 아니었다. 사이좋은 남편과 아내는 딱 달라붙어 진득한 스킨십을 하기 시작했다. 보기 민망할 정도의 수위를.

…하지만 구경은 늘 재미있는 거다. 눈을 어설프게 가리는 시늉을 하며 둘의 끈적끈적한 애정 행각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지금 여기서 뭐 해?”

“히익!”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편과 애정 행각을 벌이는 언니와 다르게, 나는 땅바닥과 진득한 스킨십을 해야 했다. 맨바닥과 딥 키스를 나눈 엉덩이가 아프다고 울부짖었다.

그런 내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남자의 목소리란.

“왜 그렇게 놀라, 나쁜 짓 하다 걸렸어? 아니, 너 꼴이…….”

내 모습을 훑어보던 카림이 말끝을 흐렸다. 그 기묘한 태도에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꼴이라뇨?”

“누가 이런 걸 입혀 뒀어? 화장은 또…….”

이번에도 말을 마치지 못한 카림이 손을 뻗었다. 뜨겁게만 느껴지는 손이 내 입술을 보듬었다. 그대로 주르륵, 뺨까지 제법 밀착감 있게 마찰했다. 무언가 메마른 것이 입술에서 뺨까지 번져 나갔다.

“역시 옅은 게 더 예쁘다.”

나와 시선을 맞댄 카림은 황홀하게도 미소를 보였다. 괜히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만 같다.

“머리도 새빨간데 입술도 그러니까…… 어라.”

순간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음험해졌다. 아름다운 새파란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제 보니.”

슬쩍 숙인 고개가 내 귓가에 닿았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지분거렸다.

“양 뺨도 새빨갛네.”

할 말이 없던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지금 그저 바라보는 것만 가능한 눈앞의 사람은 유독 눈이 부셨다.

“이러고 누굴 유혹하려고 했어.”

장난기 어린 속삭임을 남긴 그가 고운 검지를 들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

“그, 그, 그, 그, 그럴 리가…….”

겨우 입을 연 나는 애써 부정을 표했다. 아니, 부정을 말하려다가 슬쩍 방향을 바꾸었다.

“……있잖아요.”

“응? 뭔데?”

“그그그그그그그럴 리가.”

거의 기어 들어가는 듯한 중얼거림이 입술을 비집었다.

“있다고요.”

“…….”

평소에는 잘만 나를 놀려먹었던 카림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그의 말문을 틀어 막히게 만든 걸까. 승리감을 느껴야 마땅했지만…… 그런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카림을 바라본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왜…… 왜 그래요?”

“……아니.”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카림이 자신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방금 전의 손길만큼이나 거칠었다.

“미치겠다.”

그대로 미끄러진 손이 제법 다급하게 내 양팔을 붙잡았다. 호수처럼 깊고 파란 눈이 순간적으로 붉게 번뜩인 것 같았다면,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너 요 며칠 내가 얼마나…… 아니다, 말을 말자.”

“네?”

“네가 내 속을 어떻게 알겠어.”

그야 난 당신처럼 독심술을 하는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겨우 밀어 넣었다.

“네가 자꾸 눈앞에서 알짱거려서, 한입에 잡아먹고 싶은데 아주. 지금도…….”

눈앞의 이 남자가 참 위험해 보여서, 나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켜야 했다.

“그래, 프리드린?”

“네, 네?”

내 대답에 그는 씨익, 하고 색기 넘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절대 도망 못 갈 줄 알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