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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오펠에 도착한 건 어젯밤의 일이었다. 하루 푹 쉬고 일어난 언니는 아침 일찍 나를 찾아왔고,
“……저렇게 되어서 아직 소꿉놀이하고 있어요.”
나는 오펠까지 친히 강림하신 언니께 그간 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아야 했다. 내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관자놀이를 더더욱 강하게 압박하던 언니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멍청한 쥐새끼야.”
…일단 시원스레 내 욕부터 하고 본 언니는 한심하다는 듯 덧붙였다.
“줘도 못 먹니?”
그 거침없는 발언에 내 얼굴이 새빨개진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말도 거침없이 내뱉을 수가 있는 거지?
“어, 언니……. 줘, 줘도 못 먹는다니…….”
“이 청맹과니를 대체 어디에 써먹지?”
내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자연스러운 투덜거림이 뒤를 이었다.
“써먹다뇨. 너무한 거 아닙니까?”
“얘가. 청맹과니보다 그 말이 더 너무해?”
어이없다는 듯 대꾸한 언니는 짐짓 엄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리니. 카림께서 널 열심히 꼬시고 계신데.”
“놀리는 게 꼬시는 거야?”
“사람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내 볼멘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언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괴롭히는 게 꼬시는 거라면 언니야말로 가장 열심히 나를 꼬시고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게르드로 돌아왔을 때에는 둘이 아니라 셋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갈 길이 멀다, 멀어.”
둘이 아니라 셋, 둘이 아니라 셋……. 잠시 그 말을 곱씹은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뒤늦게 말을 이해한 내 입술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흘렀다.
“……예?”
“왜. 혹시 넷을 생각했니? 더 좋네. 아들딸 쌍둥이로 한 번에 해치우자.”
덕분에 카림이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언제쯤 아이를 가지는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근데 백 년은 이른 이야기들 아니냐고! 아직도 소꿉장난 중이잖아!
지금 내 상황을 생각하면 사람들을 바라보며 ‘뀨?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데 그러시죠?’ 하고 물어봐야 할 지경이다.
……아니, 일단 그 모든 건 차치하고.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그러는 언니는!”
“나? 나는 뭘?”
“언니는 결혼한 지 더 오래됐잖아! 나도 조카가 보고 싶단 말이야.”
언니를 닮으면 아주 예쁘지 않을까? 우리 언니도 껍데기 하나는 황홀하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카림과 언니가 은근히 닮은 구석이 많았다.
눈을 두어 차례 깜빡인 언니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어머머, 너랑 내가 같니?”
“그럼 같지, 달라?”
“다르지. 넌 성후고 나는 아니거든.”
“그게 뭐가 중요한데?”
“그럼 안 중요하니?”
그렇게 말하면 중요한 건 맞지만……. 신분적으로 성후와 귀부인의 격차는 작은 게 아니니까.
입술을 비죽 내민 나는 툴툴거렸다.
“그러면 언니도 성주 찾아서 결혼하지 그랬어.”
“어머머,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에 우리 여보야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형부라면 죽고 못 사는 언니는 새침하게도 대꾸했다. 우리 여보야라니…….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애정 표현이다. 그대로 할 말을 상실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휴……. 이걸 어디서 다시 꿰매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네.”
언니가 짙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저러다 바닥에 구멍 뚫리겠네.
“내 동생이 쥐새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줘도 못 먹는 바보일 건 꿈에도 생각 못 했네.”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은 주먹을 꾹 움켜쥔 나는 언니를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언니…….”
“응?”
“오펠에 나 보러 온 게 아니라 카림이랑 나 그…….”
…발끝이 간질간질했다. 이어 토해내는 내 목소리조차 새빨개진 것만 같았다.
“그…… 그거 시키려고 온 거지? 그렇지?”
“그게 뭔데?”
“…….”
내 입에서 차마 나오지 않는, 성인의 언어가 있었다. 분명히 아는 단어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소리가 입 안에서 까끌까끌하게 미끄러지기만 했다. 떼, 떼, 떼, 떼…….
“그거! 그거!”
“뭐라는 거야. 제대로 말해야 나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씨……. 밤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양보였다. 언니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밤일이래…… 밤일!”
“…….”
내숭 떨 대상도 없겠다, 깔깔거리며 시원한 웃음을 터뜨린 언니가 내 등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정말 우리 언니도 내 덕에 심심하지 않겠다.
즐거운 언니와 별개로 발끝까지 새빨개진 나는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저게 뭐라고 이렇게 부끄럽고 창피한지 모르겠다.
언니는 웃으면서 겨우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좋은 게 좋은 거야. 이왕지사 결혼한 거 마음을 비우고 남편한테 사랑 듬뿍 받는 게 좋잖아?”
“사랑받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주 큰 연관이 있어. 네 표현대로라면 그 ‘밤일’이 없는 부부는 부부라고 할 수 없거든?”
…묘하게 밤일을 강조한 언니가 얄밉게 키득거렸다. 저러니 카림과 죽이 잘 맞는 거 아닐까.
“근데 그게…….”
발끝까지 새빨개진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좋아?”
정말 본능적인 호기심이었다. 나, 나라고 해도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란 말이야. 그냥 조금…… 아니, 많이 부끄러울 뿐.
언니는 씨익, 하고 사악한 웃음을 덧그렸다.
“직접 경험해보면 잘 알 텐데. 그렇지?”
“…….”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이어 언니는 내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그러면 가자.”
“응? 어딜?”
“네 발로 걷어찼으니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그럼 최대한 예쁘게 포장이라도 해놔야 다음 기회가 올 거 아냐?”
꽤 그럴듯한 말이었다. 귀가 얇은 내가 넘어가는 듯하자 언니는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오펠에 유명한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팔이거든? 너하고도 잘 어울릴 거야.”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저 핑계로 내 품위 유지비를 열심히 써보자, 그거잖아!
물론 언니와의 쇼핑이라니, 해보고 싶은 일이긴 했지만 저것보다 중요한 게 하나 있었다.
“언니, 여기 역병 돌아. 나갔다가 역병 걸리면 어쩌려고?”
“카림은. 뒀다가 수프 끓여 먹게?”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되물어 볼 말이었다.
“……응?”
“병 걸리면 치료해달라고 하면 되는걸. 써먹을 수 있는 건 열심히 써먹어야지?”
“…….”
그러게나 말이다. 난 왜 자꾸 저걸 까먹는지 모르겠다.
정말 먹이를 숨겨 놓고 까먹는다는 다람쥐의 지능인가. 흑흑.
어쨌든 언니와 사이좋게 손잡고 하는 생애 첫 쇼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와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게 저런 사기꾼의 대사라니.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나는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물론 취미가 원예가 된 건 아니고……. 얼마 전에 신전에서 날 불러서 가긴 했었는데…….”
“했었는데?”
“성수에 물을 주래서 준 것도 맞는데……. 그게 내가 키운 게 된 건가?”
“아하?”
내 소심한 중얼거림에 언니가 양팔을 걷어붙였다. 살벌한 걸음을 옮기며 읊조린다.
“이것들이.”
“어, 언니! 그러지 마!”
당장이라도 저 사람에게 가서 깽판을 칠 것 같은 기세에 언니를 말려야 했다. 언니라면 이곳을 다 헤집어 놓고도 남았다.
내게로 다시 홱 소리 나게 뒤돌아선 언니의 눈이 번뜩였다. 언니의 두 눈에서 태양 광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왜?”
“카림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단 말이야.”
카림이 좋다고 말한 내 감이 맞다면 가만히 있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언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의외로 말은 잘 듣네?”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말이라도 잘 들어야지.”
“근데 왜 정작 들어야 하는 말은 안 들을까?”
언니는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이상한 기세를 보이는 언니를 피해 괜스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으, 응?”
“그냥 날 잡아먹어 주세요~ 하고 얌전히 있으면 되는 건데.”
입술을 비죽거린 나는 그날 이후의 시간을 되새겼다. 소심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날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는데요?”
“네가 자꾸 튕기니까 그런 거잖아.”
자비 없는 언니는 치사하게 팩트로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지? 쌍방 간에 오고 가는 게 있어야 관계가 성립되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면 될 관계도 망가진다고.”
“그런 거야?”
“당연하지.”
“그치만…….”
우물쭈물, 기어 들어가는 듯한 내 목소리에 언니가 인상을 확 썼다.
“그치만, 뭐?”
“……부끄럽단 말야.”
“너…….”
내 자그마한 답에 언니가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가 제법 음산했다.
“평생 제자리에 있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