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38화 (38/115)

38

“아하?”

요 며칠 새, 남편 욕으로 나와 대동단결한 라일라의 눈이 샐쭉해졌다. 라일라 안에서 내 남편은 천하의 나쁜 놈이었을 테니 당연한 태도였다.

‘아…….’

속으로 처절한 신음을 삼킨 나는 하비에르를 질질 이끌며 속삭였다. 딱딱하게 굳은 남자는 움쩍할 생각도 안 했지만.

“라일라, 좀 급한 심부름이라서……. 미안한데 먼저 가봐도 될까요?”

“그래요. 나중에 봬요, 리니.”

내 앙큼한 거짓말에 까맣게 속아 넘어간 라일라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석상처럼 얼어붙은 하비에르를 겨우겨우 질질 끌고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라일라를 스쳐 몇 발자국 더 나아갔을 때,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하비에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미치셨습니까?”

할 말이 없던 나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만 같아서, 차마 그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카림이 아시면 저 죽습니다.”

“서, 설마 죽이겠어요?”

“예.”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꾸였다. 나보다는 그가 카림에 대해 잘 알겠거니 싶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해야 했다.

“미, 미안해요. 하지만 별수 없었어요.”

슬그머니 하비에르를 돌아보았다. 오만상을 일그러뜨린 하비에르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압박하고 있었다. 훅, 그 단단한 입술 틈새로 짙은 한숨이 흘렀다.

“이그드라…….”

“저, 저기요!”

혹시나 누가 들을세라, 근처를 살펴본 나는 펄쩍 뛰며 하비에르의 입을 막아야 했다. 근 며칠간 필사적으로 방 안에만 숨어 있던 이유가 뭔데!

연회에서 내 얼굴이 팔렸다고 하지만, 애초에 연회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펠의 귀족뿐이었다. 그나마 다수인 하위 귀족은 나나 카림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했다. 천만다행히도 모두가 지금의 나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들 그렇게 날 부르면서 어려워하니까 내가 이러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그드라실을 이그드라실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릅니까?”

“내 이름은 프리드린 라비아거든요?”

내 불퉁한 대꾸에 하비에르가 까탈스러운 눈썹을 추켜올렸다. 아마 안경을 쓰고 있었다면 안경도 끌어 올리지 않았을까 싶은 동작이었다.

“사소한 오류를 정정하겠습니다. 아미라 프리드린 데스테리언이죠. 부디 본인의 신분과 위치를 생각해 주시겠습니까?”

“…….”

나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누구 시종 아니랄까 봐, 아주 똑 닮았네! 근데 이 인간은 왜 이리 재수가 없지?

나를 제치고 걸어가기 시작한 하비에르가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라일라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머잖아 저 사람도 진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때는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십니까?”

“그건 그때 생각해요.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요. 조금 더 친해지고 나면 하비에르처럼 날 대할지.”

친구가 가지고 싶다는, 내 소심한 꿈이었다. 게다가 라일라와 나는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언니처럼.

하비에르의 노골적인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듣기 싫은, 누구의 주장에 따르면 이치에 맞는 말이 조곤조곤 울려 퍼졌다.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이미 뵙지 않으셨습니까.”

“…….”

“이그드라실을 평생 뵈어온 분들조차 그렇게 행동하시지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레브아와 카림도 사이가 원만해지는 데에 십 년이 걸렸습니다.”

나는 레브아와 카림의 따뜻했던 모습을 되새겼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십 년이라고. 다섯 살의 카림이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실망과 절망을 집어삼킨 내 어깨가 축 처질 적 얄미운 한마디가 이어졌다.

“이그드라실께는 더 어려울 일일 겁니다.”

그 말에 나는 그대로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하비에르도 나와 보폭을 맞췄다.

그때 가족들의 모습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포근했던 내 울타리 안에 아득한 벽이 생긴 느낌. 태어나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가족들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 내 곁을 떠나간 것만 같았다.

아마 하비에르를 바라보는 내 눈시울이 글썽글썽했을 것이다. 눈앞이 흐렸으니까.

하비에르는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저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입술이 달달 떨려 왔다.

“……그러는 하비에르는 어떻게 쉽게 절 대해요? 제 아무리 카림의 명이 있었다고 해도요."

“쉬워 보입니까? 손발이 다 떨리고 있는데요.”

하비에르의 음성은 딱딱했다. 다만 그 말대로 그의 손이, 허리가 미묘하게 진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혹 떼려다 붙인 격이네. 몰랐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주인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습니다만, 저 또한 프레이르의 신민이고 신자입니다. 이그드라실을 믿고 섬기는 것이 당연한.”

그것참 대단한 충심이네요, 하고 비꼬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무리 부정하고 도망치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합니다.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시는 편이 빠를 겁니다.”

누가 회초리로 사정없이 나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 * *

하비에르가 신관에 대해 조심하라고 열심히 떠든 것과 별개로, 신전에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신전에서 곱게 기르고 있던 성수(聖樹)에 물을 주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신전에서 시키는 대로, 성수에 물을 주는 것으로 내가 할 일은 끝이었다. 물론 신전에서 곱게 기르는 성수가 제법 많아서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렇게 다시금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카림이 오만하게 턱을 당겼다. 위험한 향을 폴폴 풍기며 내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욱 훑어보던 그가 한마디 한다.

“그래, 남편이라고?”

“……하아?”

내 멍청한 신음 소리에 카림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아내님은 언제부터 일처이부제 나라에서 생활하신 걸까. 프레이르에 언제 내가 모르는 법이라도 생겼나?”

“…….”

어, 어떻게 벌써 안 거지? 카림이 알면 죽는다더니 그새 일러바쳤나?

물론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카림이 장난인지 진담인지 모를 한마디를 얹었다.

“우와, 그러면 나 벌써부터 뒷방 후궁 신세로 밀려나는 거야? 그것도 신혼에.”

뭐, 뭐라고 대꾸해야 되는 걸까.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선 카림이 내게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큼지막한 손이 어깨 위에 올라왔다. 그 무게감과 존재감이 유독 선연하게 느껴져서 숨을 들이켰다.

“응? 뭐라고 대답 좀 해봐.”

“…….”

“그래서 내가 뒷방이야? 아니면 하비가?”

살며시 틀어진 고개가 귓가에 닿았다.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부드럽고 느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설마 날 뒷방으로 보내진 않겠지? 모로 봐도 내가 훨씬 나은데 말이야.”

“……네, 네?”

“하나하나 따져볼까.”

농담인 걸 아는데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인가. 하하.

“일단 내가 돈도 더 많고.”

…한 달에 무려 팔천이나 주는 분이셨다. 덕분에 내 연봉이 십억 가까이 된다.

“외모도 훨씬 낫고.”

두 눈이 매력적으로 휘었다. 나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카림의 껍데기 하나 훌륭한 것도 인정한다.

“아내님을 즐겁게 만들어 줄 능력도 출중한데.”

그의 음성이 색스럽게 물들었다. 내가 저 말의 뜻을 명확하게 알아듣는 건 나중 일이었다.

“날 뒷방으로 보낼 거야? 응?”

물론 지금의 내게는 마냥 협박처럼 들렸을 뿐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나는 눈만 끔뻑거렸다. 끔뻑, 끔뻑. 세상이 새카매지고 밝아지는 순간마다 카림이 보였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한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철푸덕 엎어진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못했어요.”

일단 싹싹 빌고 보자. 어쨌든 잘못은 한 게 맞으니까. 납작 엎드린 내 위로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뭘 잘못했는데.”

“하비에르를 남편이라고 사기 친 거요…….”

더듬더듬 변명을 얹어 나가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눈을 질끈 감기 전, 흰 장판 위에 꿈틀거리는 갈색의 무언가가 눈에 담겼다.

잘못 봤나 싶어 다시금 눈을 번쩍 떴다. 그 형체가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입술이 굳어서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제게도 저 나름대로의 사정이…….”

꿈틀, 꿈틀. 곱등, 곱등. 징그럽게 움직이는 갈색 더듬이. 털 달린 다리들이 우수수 움직였다.

짙은 다갈색 형체가 마치 필리피데스가 달리기하듯 그대로 공기의 바다를 헤엄치며 맹렬하게 질주한다. 바퀴, 바퀴 하고 울어대는 것만 같았다.

식겁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카림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비명에 가까운 처절한 우짖음이 입술 밖으로 흘렀다.

“바, 바, 바, 바 선생님! 바 선생님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