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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37화 (3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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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의 아침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겨우 일어나서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있는 내게 웬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예전 카림의 생일 연회에서 구두를 갖다 줬던 그 남자였다.

“원대하신 카림의 시종, 하비에르 솔테입니다. 정식으로 처음 인사 올립니다.”

“네에. 안녕하세요.”

내 소심한 대답에 하비에르가 깐깐한 눈매를 추켜올렸다. 괜히 죄 없는 이불을 꼭 움켜쥔 나는 근처를 둘러보며 물었다.

“카림은요?”

“오펠 성주와 의논할 게 있으시기에 먼저 외출하셨습니다. 오늘부터는 이그드라실께서도 일정이 있으십니다.”

이그드라실 발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 닭살 돋아! 저 말 좀 안 하면 안 되냐고!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자 하비에르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딱딱한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왜 그러십니까?”

“환장하겠어서요.”

비몽사몽이던 내 입술에서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말이 흘렀다.

…덕분에 머잖아 내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몸을 움찔 떨어야 했다. 엄마야, 저게 무슨 헛소리람.

하비에르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압박하며 입을 열었다.

“익숙해지십시오.”

내가 ‘무엇’ 때문에 환장하는 건지는 묻지도 않았다. 카림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독심술을 하는 게 틀림없다.

“이만 정신 차리시고 준비부터 하시지요. 신전에 가셔야 합니다.”

“……신전이요? 신전은 왜요?”

“오펠에 일을 하러 오신 거니까요. 설마 카림께 모든 걸 맡겨두시려고 하셨습니까?”

따지듯 말하는 저 어조가 익숙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비에르에게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던 나는 소심하게 대꾸했다.

“그건 아니지만요……. 일단 카림은 저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요.”

“예, 그 말씀도 맞습니다. 이그드라실께서는 적당히 뭔가를 하는 시늉만 하시면 됩니다.”

소름이 끼치는 건 둘째 치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는 게 있어야 하는 시늉이라도 하죠.”

내 말에 하비에르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무지한 건 사실이었지만…… 괜히 어설프게 아는 척하다가 창피당하는 것보단 이게 낫잖아? 노골적인 불만이 가득한 태도에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그게 자랑은 아닙니다만…… 솔직하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무지를 인정하면 그 부분을 배워가면 되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늘 신전에서는 아는 척도 하지 마시고, 그렇다고 모르는 걸 티 내지도 마십시오. 조용히 계시면 됩니다.”

“저기요, 하비에르라고 했나요?”

“예.”

“혹시 카림이, 하비에르가 자기 취향이라고 말 안 하나요?”

자연스레 물은 것에 순간 기겁한 듯, 하비에르의 녹색 눈이 얼어붙었다. 날 빤히 응시하는 눈빛이 꼭 ‘이게 미쳤나.’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내내 꼿꼿했던 그가 혀를 떨었다.

“그,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뇨, 저한테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카림이 좋아할 만한 성격이신 거 같아서요.”

정말 순수하게 저렇게 생각했다.

카림은 따박따박 대꾸하는 사람이 좋다고 했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카림이 좋아할 법한 스타일이지 않나. 하비에르와는 몇 마디 안 해봤지만 그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카림이 저런 사람을 좋다고 하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고.

하비에르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아…… 그런 뜻이라면 비슷한 말씀은 하신 적이 있으십니다만.”

날 바라보는 하비에르의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히 첨언하자면 오해하기 좋게 말씀하시는 건 안 좋은 습관입니다.”

“……네?”

“습관이라면 고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괜찮은 화술 선생을 찾아 붙이겠습니다. 착실히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갑작스러운 말에 내 어안이 벙벙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하비에르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자신이 왜 이런 설명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짜증이 담긴 음성이 울려 왔다.

“제가 카림이 아니기에 카림의 생각에 관해서는 감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일단 저는 이성을 좋아합니다.”

“그건 안 물어봤는데요?”

“취향을 말씀하시면 저쪽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오해를 사기 좋은 발언이니 조심하시죠.”

…지금 저게 뭔 소리람. 내가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나 카림 앞에서는 괜찮습니다만 남들 앞에서도 그러시면 큰일 납니다. 말씀하시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주시죠.”

“……아, 네. 조심할게요.”

“말은 잘 들으셔서 다행입니다. 그러면 이만 일어나서 채비하시지요. 신전에서 오늘 오전 외에는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할 말을 남긴 하비에르가 뒤돌아섰다. 그대로 내 눈앞에서 벗어나는 걸 보며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하비에르 솔테?’

솔테라고?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겨우 벗어난 나는 저 남자의 성을 뒤늦게 상기해냈다.

‘하인인 줄 알았는데 시종이었어?’

카림의 뒤를 쫄랑쫄랑 쫓아다니면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기에 당연히 하인인 줄 알았다.

가뜩이나 솔테는 제3재상의 가문으로 우리 본가, 세린과도 필적할 법한 명문가였다. 저 성을 쓴다는 건 당주의 직계 가족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당주의 장자나 차남이 말리크라면 모를까, 카림의 시종으로 들어올 리는 없었다. 그러면 삼남 이후.

…몇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에게도 제법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겠다 싶었다.

뭐, 어쨌든 시키는 건 해야겠지.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한 차례 기지개를 켠 이후 욕실로 향했다. 시녀들의 조심스러운 손끝에서 단장되자 타이밍 좋게 하비에르가 나타났다.

하비에르는 나를 신전으로 인도하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그드라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크루엘 신관입니다. 크루엘 신관은…….”

“그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나요?”

그 말을 끊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서.

“예, 익숙해지실 때까지 계속 부를 겁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제가 싫다고 해도요?”

“예.”

먼저 한 걸음 옮긴 하비에르는 어렵게도 속삭였다.

“제가…… 지금 땅에 무릎을 붙이고 경배의 말씀을 올리지 않는 것은 카림의 명 때문입니다.”

“카림의 명이라뇨?”

“이그드라실을 카림 자신 대하듯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자리에 멈추어 선 나는 하비에르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림을…… 막 대하시나요?”

그동안 그런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성심을 다해 모시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막 대한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막 대하다니요. 다만 전 이치에 맞는 말만 할 뿐입니다.”

“내 말이 이치에 맞는다는 건 어떻게 판단하고요?”

다소 뼈가 있는 질문에, 뒤돌아선 하비에르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혹시 제 말이 듣기 싫으십니까?”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는 소리였다. 몇 마디 안 해 봤지만 듣기 싫은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면 이치에 맞는 소리입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듣기 싫다고 무조건 이치에 맞는 소리는 아니지만, 대체로는 저렇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러니까 내가 맨날 치사하게 팩트로 때리지 말라고 중얼거리는 거 아닌가. 너무 듣기 싫으니까. 늘 생각하지만 날조와 선동만큼 덜 아픈 게 없었다.

“어쨌든 크루엘 신관은 중앙 신전 출신으로, 좌천되어 이곳까지 쫓겨난 사람입니다. 입이 가볍고 신의가 모…….”

“리니!”

긴 설명이 이어지던 와중,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살랑거린 라일라가 새하얗게 웃어 보였다.

머잖아 라일라가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요 며칠, 남몰래 나와 놀아준 그녀와는 제법 친해진 상황인지라 나는 상냥하게 눈을 휘었다.

“안녕, 라일라. 좋은 아침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침부터 급하게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아, 신전에 심부름을 좀 가고 있어요.”

내가 답하자, 라일라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하비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옆에 분은 누구예요? 남편?”

라일라가 묻는 것에 나는 본능적으로 하비에르의 팔을 덥석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도 대답했다.

“네! 남편이에요!”

“…….”

순간 하비에르는 뜨악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왠지 모르게 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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