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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처지가 뭔데요!”
본능적으로 아득바득 대꾸했다. 이럴수록 더 재미를 느껴서 날 괴롭히리란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요놈의 입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나쁜 놈의 입꼬리가 비뚤게 말려 올라갔다. 툭 내던지듯 대꾸한다.
“즐거운 신혼?”
‘즐겁긴 개뿔이!’
난 괴롭힘 당하는 걸 즐기는 변태가 아니란 말이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필사적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저건 말하는 동시에 백 년의 놀림거리다.
나쁜 놈의 뚫린 입은 잘도 말 같지 않은 말을 만들어냈다.
“신혼은 두 번 다시 안 온다?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야지. 신혼여행 왔다고 생각하고, 신혼 때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는 게 좋지 않나?”
결혼식도 못 했는데 신혼여행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기막힌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면 신비감이 없어요, 없어. 지금이 아니면 네 머리 감겨줄 일도 없을걸?”
“솔직히 말해 봐요.”
이를 뿌득뿌득 간 나는 최대한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당신 초혼 아니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우아하게 다가온 카림의 손이 내 풍성한 머리채를 한 가닥 움켜쥐었다. 그 붉은 끄트머리에 장난스럽게 입 맞추는 시늉을 한다.
나는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이 결혼 삼혼이에요, 아니면 사혼이에요?”
재혼은 일단 넘어가자. 자연스럽게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삼혼 사혼이 뭐야, 오혼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호, 혹시 정체가 푸른 수염은 아니겠지.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스물세 번째 부인이 될지도…….’
엉뚱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점차 풍성해져 가고 있을 때, 카림이 자연스럽게 반문했다.
“삼혼? 사혼? 그건 지금 또 무슨 소리야?”
“이때만 할 수 있는 게 있다니, 시간이 지나면 신비감이 없다니! 너무 잘 알잖아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머리를 감겨줬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나오는데요?”
아득바득 따지는 소리에 이 빌어먹게 나쁜 놈은 풉, 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배꼽까지 잡은 그는 허리를 젖혀가며 시원스럽게도 웃어댔다.
왜 웃어, 왜! 나는 심각하단 말이야! 이거 사기 결혼 아니냐고!
두 주먹을 꾹 움켜쥔 나는 이 나쁜 놈을 노려다 보며 파들파들 떨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은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미치겠다, 정말.”
네가 미치겠으면 난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라고! 얼마나 신나게 웃어댔는지, 카림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프리드린?”
“왜요!”
“애초에 남이 내 머리를 감겨주면 감겨줬겠지. 내가 미쳤어? 그런 짓을 하게.”
오해는 억울했던지, 신나게 웃어댄 나쁜 놈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꾸했다.
“너 자꾸 잊는 모양인데, 나 카림이야.”
“누가 아니래요? 댁이 카림인 건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정식 작위는 아미르라고. 어느 쪽이든 자꾸 잊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아미르는 말리크의 아들, 즉 왕자나 말리크 딸의 남편에게 내리는 작위였다. 딸이나 아미르의 아내에게 내리는 작위는 아미라.
……어쨌든 카림의 눈물겨운 강조 덕분에 난 새카맣게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카림이 말리크의 동생을 의미하는 말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카림이 성주나 영주처럼 공식적인 작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왕제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이야 살아남은 말리크의 형제를 부르는 대명사처럼 사용하고는 있지만, ‘카림’이란 말의 본뜻은 ‘관대함’이었다.
본래 척박한 사막의 관습은, 말리크가 되지 못한 아미르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었다.
나라가 풍요로워지면서 점차 사라진 전통이긴 했지만, 형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오롯이 말리크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여전히 형제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것이 딱히 이상하거나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으며 지금 말리크도 그 관습을 따랐다.
다만 저 관습 덕에 간혹가다 살아남은 말리크의 형제를 ‘카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살려준 말리크의 관대함을 생각하고 되새기며, 헛된 생각은 꿈조차 꾸지 말라는 의미에서.
눈앞의 이 나쁜 놈은 선대 말리크의 차남이었다. 왕실 족보에 떡하니 박혀 있는 정식 이름은 아미르 릴 프레이르, 성인이 되면서 새 성을 받고 프레이르―데스테리언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 나쁜 놈은 남을 대접해주는 것보다 자신이 대접받는 데에 익숙한 작자였다. 그게 당연했다.
“그러니 내가 몸소 무릎까지 꿇어 가며 구두를 신겨준 여자도 네가 처음이고.”
아, 그 침 묻은 유리 구두 어지간히 들먹여대네. 그만 좀 얘기하란 말이야! 물론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인지라 라비아성의 내 방에 곱게 모셔두긴 했다.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쁜 놈의 짓궂은 한마디가 이어졌다.
“이리 아득바득 욕실까지 따라가서 몸소 시중을 들어 주겠다는…….”
“그만!”
그대로 기겁한 나는 온몸을 바르르 떨며 소리쳤다. 댁이 그렇게 대접해주는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는 건 알겠다고! 근데 왜 소름이 돋느냔 말이야!
그건 아마 머리를 감겨주는 걸로 끝나지 않으리란 걸, 내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세상에 찌들 대로 찌든 놈은 여리고 순수한 나를 한입에 꿀떡 집어 삼켜버릴 터였다.
희대의 나쁜 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혼신을 다해 거부할까. 하맘이라고 생각하면 될걸.”
“하맘…….”
그리고 이어지는 하맘 소리에 나는 양어깨를 초라하게 축 늘어뜨렸다. 하지 못한 결혼식부터 시작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억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꼬리 말린 다람쥐 같은 내 모습을 보며 나쁜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
“나도 하맘……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 발걸음도 디디지 못한 하맘을 떠올리자 내 눈시울이 저절로 달아올랐다.
왕실의 시녀로 들어갈 때 가장 기대하는 것은 말리크와 말리카를 알현할지도 모른다는 거고, 그다음이 하맘이었다.
넓고 잘 꾸며진 욕실과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하녀들까지, 원래 하맘은 왕족들의 전유 공간이었으니까. 그들을 모시는 시녀와 시종에게는 선심 쓰듯 내어주는 특권이었다.
카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시녀로 살면서 하맘도 안 가봤다고?”
“가볼 기회가 어디 있어요! 적어도 삼 년은 일해야 문턱이라도 밟아볼 수 있는데!”
“삼 년? 그러면 어차피 평생 못 갔겠네.”
담담하게 대꾸하는 것에 내 언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예요?”
“너 나이를 생각해야지.”
내 나이가 뭐가 어때서! 아직 파릇파릇하다 못해 어리단 말이야! 억울했던 내 눈이 사납게 번뜩이자 카림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꼭 내가 아니었어도 늦어도 일이 년 안에는 누군가가 데리고 갔겠지. 너도 세린의 핏줄인데.”
일찌감치 결혼하는 고위 귀족의 특성상, 곧 결혼해서 왕궁을 떠났으리란 소리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아프지만 않았다면 카림을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했겠지. 언니처럼 제대로 된 연애도 해 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아니, 대부분은 맞는 말을 들을 때에 더 기분이 상하는 법이다. 반박이 불가능하니 입술만 비죽거리고 있을 뿐.
이 빌어먹게도 나쁜 놈은 입술을 비죽거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슨 복잡한 생각을 하는 건지, 구석구석, 무슨 미술품을 감상하듯이.
“왜 그렇게 봐요?”
“……아니.”
반 박자 늦게 대꾸한 남자의 시선이 또다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안에 각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안 뺏기려면 잘해야겠다 싶어서?”
“그걸 이제 알았어요?”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나는 콧대를 세우며 대꾸했다. 내가 말이야, 앙! 굳이 댁이 아니어도 데려가겠다는 사람 많고 많았다고! 많고 많은 남자들 중에 댁이 제일 빨랐을 뿐이야!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카림이 씨익, 사악하게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잘됐네. 이 기회에 내가 누리게 해줘야겠어.”
“뭘요?”
“하맘 정도야 뭐,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지.”
“돼, 됐다니까요!”
진심을 다한 사양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내 발악은 그에게 먹히지 않았다.
“남편의 봉사를 싫다고 하다니. 아무 때나 오는 기회가 아닌데.”
“지금 나한테 제일 위험한 사람은 댁이거든요?”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내 곁이 제일 안전하지. 내가 몇 번을 살려줬는데.”
…아, 정말! 맞는 말 그만하라고! 반박할 수가 없잖아!
“아무튼!”
카림을 휙 밀친 나는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쫓아오지 마요!”
봉사고 뭐고, 아직 백 년은 이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