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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신을 다해 내뱉은 욕설이었는데, 여자는 내 말을 농담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여자가 까르륵, 청명한 웃음을 터뜨렸다.
“맞죠, 그 소문 유명하죠. 왜 그런 소문이 난지는 모르겠어요.”
“곁에서 직접 보시면 알 거예요.”
물론 혼전 계약서 덕에 앞으로는 미친개 소리를 들을 법한 짓은 안 하겠지만.
“미남이란 말도 참 많이 들었는데. 사실이에요?”
“그건…….”
나는 괜히 카림의 생김새를 머릿속에 그렸다. 낮게 가라앉은, 호수를 닮은 그 시선이 먼저 뇌리에 불쑥 떠올랐다. 이어 그가 지닌 품위 있는 분위기와 남성적인 목소리가 되새겨졌다.
“……잘생기긴 했죠.”
인정할 건 인정한다. 못생긴 나쁜 놈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양심상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딜 가든, 누구든 호감을 가질 정도로 미형이긴 했다. 입을 여는 순간 그 잘생긴 껍데기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눈이 정말 예뻐요. 다만…… 개념이 이상한 곳에 있을 뿐이에요.”
생각하자면 이그드라실이 왔다던 신들의 세계에서 온 듯한 개념이었다. 인간의 평범한 생각으로는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옆에 있으면 제 정신도 같이 이상해지는 거 같다니까요? 기상천외한 걸 얼마나 잘 떠올리는지 신기해 죽겠어요.”
특히 날 놀리는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언니보다 더했다.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상천외한 거라면, 뭐가 있어요?”
“성후와 카림이 처음 만난 생일 연회에서……. 이 얘기는 못 들으셨나요?”
“생일 연회라면……. 이그드라실께 유리 구두를 신겨주셨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래, 그놈의 침 바른 구두……. 그날을 떠올린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평생 가도 잊지 못할 일이다.
“그날 성후께 일이 좀 있어서…… 카림께서 구두를 선물해주신 거거든요. 그런데 성후도 성격이 조금…….”
…내 성격을 내가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할 말이 없던 나는 중간은 싹 자르고 결말만 속삭였다.
“어쨌든 그 연회에서 카림이 성후께 반한 이유가 바락바락 대들어서랬어요.”
“바락바락 대들어요?”
“네. 한 마디도 안 지고 기어오른다고요.”
물론…… 따지고 보면 사실이긴 했다.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다.
이번에는 어이가 없던 듯 여자가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어 날 바라보며 루비처럼 붉은 눈을 휘었다.
“난 라일라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리니.”
“저도요.”
그렇게 늦은 밤, 연못의 개구리 대신 나와 놀아준 친절한 여자는 나와 동갑이었다.
시녀로 뒤늦게 들어간 나는 말리카의 시녀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이미 나 빼고 끼리끼리 친한 무리가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친해지긴 했어도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선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사람과 이제 만난 것 같았다.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어댔다.
“리니의 성인식은 어땠어요?”
“별거 없었어요. 원래 부모님께서 최대한 화려하게 해 주신다고 했는데.”
라일라의 질문에 나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성인식을 떠올렸다. 성인이 되는 열아홉 살의 생일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날이긴 했다.
내가 무사히 살아남기만을 바라셨던 부모님은 정말 내 성인식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실 생각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뭐, 결국 제대로 된 성인식을 치르지도 못했지만.
“갑자기 시녀로 들어가게 되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어요.”
“그래도 부모님께서 해 주신다고는 하셨네요. 부러워라.”
라일라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그런 거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셨다니까요. 오빠 성인식은 화려하게도 해 줬으면서, 치사해 죽겠어.”
“약혼자가 있는 건 아니고요?”
내 질문에 라일라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원래 성인식을 화려하게 여는 가장 큰 이유는 적당한 약혼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고위 귀족이라면 어릴 때부터 약혼자가 있으니,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큰 연회를 열어주는 형식이었지만.
약혼자가 있는 하위 귀족이라면 굳이 저럴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연회를 여는 데에 돈이 많이 드니까.
“……있긴 하죠.”
툭 내뱉은 라일라는 짜증 난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머니는 왜 날 그런 애랑 결혼시키려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난 정말 끔찍한데 그만한 애가 없대요.”
약혼자와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나는 선선히 웃으며 물었다.
“소꿉친구예요?”
“친구요? 어머니와 걔 어머니가 친구긴 하죠. 나와는 희대의 원수고요.”
라일라가 몸서리를 쳤다. 왜인지 모르게 나와 카림의 관계를 보는 것 같은데.
저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하기 싫었던 듯, 라일라가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리니는요?”
“네?”
“리니는 약혼자가 있어요? 없다면 우리 오빠는 어때요?”
…라일라의 제안은 참 파격적이었다. 다만 나는 슬프게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무척이나 서글픈 현실이 내 입술을 비집었다.
“전 유부녀랍니다.”
“세상에! 벌써요?”
“네, 슬프게도 그러네요.”
슬프다 못해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한 마리 나비처럼 사교계를 살랑거리다가 결혼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는데!
흑흑, 연애 한 번 못 해 본 내가 벌써 유부녀라니! 그 무슨 소리요!
“남편은 뭐 하는 분이세요? 혹시 리니처럼 카림의 일행……?”
라일라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차마 지금 말할 수가 없는 진실이 있었다. 그러니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진실을 속삭일 수밖에.
“……네, 뭐.”
“좋은 사람이 있으면 빨리 하는 게 좋긴 해요. 게르드 사람들이 일찍 결혼한단 말을 듣긴 했는데 왕족의 시녀도 다르네요. 결혼식은 어땠어요?”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결혼식이라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렀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직 못 했어요.”
“왜요? 어쩌다가?”
“자고 일어났더니…… 남편이 얼렁뚱땅 자기 가문 족보에 제 이름을 올렸더라고요. 그리고 끝.”
내가 느끼기에는 딱 저런 사건이었다. 물론 저기에 언니가 끼어있긴 하고, 혼전 계약서라는 돈 많이 주는 놈도 끼어있긴 하지만…….
정말 자고 일어났더니 유부녀가 된 나는 무슨 죄야? 나도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가 되고 싶었단 말이야! 결혼식은 팔천이나 되는 품위유지비로는 채울 수 없는 환상이라고!
혀를 내두른 라일라는 내 마음에 쏙 드는 말을 내뱉었다.
“그거 참…… 나쁜 놈이네요.”
그렇지! 나만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카림은 공식적으로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었다.
* * *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새벽, 달이 이지러질 즈음에야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자지도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 잘 놀다 왔어?”
나쁜 놈을 한 번 노려본 나는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었다.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챙기고 욕실로 걸어가는 나를 보며 나쁜 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도 안 풀렸나? 꽤 즐거워하던데.”
확신 어린 목소리에 입술을 한 차례 비죽였다. 그에 내게 가까이 다가온 카림이 검지를 들어 내 통통한 뺨을 툭, 건드렸다.
“겁먹어서 뺨을 부풀린 게 엊그제 같은데.”
“…….”
“지금은 삐져서 그러고 있네.”
나쁜 놈의 손가락이 내 통통한 뺨에서 미끄러졌다. 이럴 때마저 아름다운, 나쁜 놈의 물빛 눈에 즐거움이 스쳐 지나갔다.
와, 나 지금 화내고 있는 건데 이럴 때마저 날 놀리고 싶니?
“어느 타이밍에 삐진 거야. 응?”
“……흥.”
콧방귀를 뀐 나는 그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한 일주일은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그래야 내 소중함을 알고 덜 놀리지 않을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가운뎃손가락이라도 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카림은 나보다 한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내 앞을 가로막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프리드린.”
카림은 그윽한…… 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담았다. 으, 정말 저 목소리는 반칙이다. 귀가 녹는 것 같다.
카림을 올려다본 내가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오펠의 유황 온천은 아주 유명하거든.”
오펠의 유황 온천이 좋다는 건 나도 익히 아는 소문이었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 같이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
늘 그렇듯 카림은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불과 삼십 초 전에 한 각오가 무색하게, 저 발언에 화들짝 놀란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카림은 정말로 욕실까지 따라와서 같은 탕에 몸을 담글 것 같단 말이야! 그를 올려다보는 내 입술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미, 미, 미, 미, 미쳤어요?”
“그럴 리가. 지극히 제정신이야.”
“그, 그, 그럼 지금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아무래도 지금 네 처지를 제대로 이해 못 하는 것 같아서.”
카림의 새파란 눈이 예쁘게도 휘었다.
“몸소 알려드릴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