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저기요, 릴.”
나는 그런, 위험한 향을 풀풀 내뿜는 카림을 피해 뒷걸음질 쳤다. 입술을 시작으로 주르륵 미끄러진 그의 손가락이 내 턱을 스쳤다.
그 목소리가, 손길이, 눈빛이, 이 순간의 공기가 색스럽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 아닐 터였다.
심장이 귀에서 끊임없이 방망이질치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내색하지 않은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혹시…… 치매예요?”
“응? 웬 치매?”
“자기가 한 일도 기억 못 하는 걸 보니까 그런 거 같아서요.”
저번에 했잖아, 이 나쁜 놈아! 네가! 나한테! 근데 해 봤냐 안 해봤냐를 묻냐!
라고 성질대로 토해내고 싶은 게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내리눌렀다. 왜인지 모르게 내가 저렇게 반응할 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난 치매 남편도 싫거든요. 신혼부터 병 수발 들고 싶지는 않다고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대체 좋은 게 뭐야?”
“치매랑 대머리를 누가 좋다고 해요?”
이건 너무 당연한 거다. 오십 년간 서로에게 헌신한 애틋한 부부도 아니고, 이제 신혼인데 누가 좋다고 하냐고!
“……그것도 그러네.”
순순히 수긍한 카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내가 한 일을 기억 못 한다니. 그건 무슨 소리야?”
“잘 생각해 봐요.”
카림은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내 손이 내 앙증맞은 입술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나한테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수가 있어요? 정말 기억 안 나서 그러는 거 아니죠?”
“응?”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은 카림이 이내 손뼉을 쳤다.
“아, 그때 그거?”
“네, 그거요!”
무슨 일인지 듣지도 않은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보았다.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이어 카림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걸 키스라고 해? 가벼운 인사지.”
“누가 인사를 그렇게 해요! 제 기준에는 전혀 아니거든요!”
이건 바락바락 따지지 않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뭔가 억울했으니까.
누구는 아주 바람둥이로 유명할 정도로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고 다니셔서, 그런 끈적한 스킨십이 간단한 인사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전혀 아니란 말이다!
나도 연애에 환상이 있었다고! 첫 키스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있었단 말이야! 누구 때문에 어이없이 코가 꿰여서 황당한 경험을 하고 있는데!
“그래, 기준은 보수적인데 사람 말을 엉큼하게는 아주 잘 받아들이네.”
“그래서 불만이에요?”
“아니. 전혀.”
씨익 웃은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올라왔다. 사정없이 흐트러뜨린다.
“이걸 정말 언제 키우나 싶을 뿐이야.”
“이것 저것 하지 말라고요! 그리고 키우기 어렵다면 취향인 연상 만나시면 되겠네요.”
“어라. 지금 남편한테 바람을 권해?”
아니, 그게 아니라!
입을 꾹 다문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턱을 당긴 채 파들파들 떨며 카림을 노려보았다.
“……됐어요.”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나는 홱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삐져서 저 멀리 도망가는 내 뒤로 카림의 아득한 목소리가 닿을 뿐이었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 * *
밤공기가 끈적끈적했다. 남부 지방이기 때문인지 게르드하고 비교하면 훨씬 후덥지근하고 습기가 높았다.
시원한 곳을 찾아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의 수원지인 연못까지 기어간 나는 연못 근처를 장식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무의미하게 연못에 돌을 던졌다. 퐁당! 물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파문처럼 번져나가는 잔물결을 보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삐져서 도망오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한담. 여기서 잘 수는 없잖아?
이래 봬도 귀하게 자란지라 노숙은 해본 적이 없었다.
‘……개구리랑 쎄쎄쎄 하다가 돌아가지 뭐.’
개굴개굴, 내 생각에 보답하듯 개구리가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개구리가 있어서 혼자는 아니구나.
한숨을 푹푹 내쉬며 차갑게 느껴지는 연못에 손을 담갔을 적이었다.
“어, 처음 뵙는 분이네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성장을 한 걸 보면 연회 자리에서 도망쳐 나온 것 같았다. 나처럼.
“아, 안녕하세요.”
어렵게 인사를 건네자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어 눈치 빠르게도 속삭인다.
“게르드 말씨네요? 수도에서 오신 분인가요?”
“네.”
“카림의 일행?”
이런 시점에 게르드에서 왔다면 알면서도 물어보는 것이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 수긍에 여자가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야릇한 애교가 흐르는 웃음이었다.
“연회장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깐 도망 나왔어요. 이 정도는 봐줘요.”
봐주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소심하게 대답했다.
“……저도 그런 걸요.”
“휴, 다행이에요. 카림과 이그드라실께서 오셔서 그런 건 알겠지만…… 난 저렇게 요란한 건 딱 질색이라서요. 어머니 아버지께 들키면 엄청 혼날 거예요.”
사교성이 좋은 것 같은 여자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반짝, 하고 예쁘게도 빛났다.
“참, 카림의 일행이면 이그드라실도 뵌 적이 있으시겠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나야. 아하하하하. 하지만 나라고 대답하면 고개를 땅바닥에 박아버리겠지.
살짝 고개를 돌린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뭐…….”
“이그드라실께서 세린 재상의 일가라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맞아요. 말리카의 시녀로 있었어요.”
내 답에 여자가 혀를 내둘렀다. 프레이르 사람이라면 말리카와 카림의 관계를 모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는 놀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카림과…….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둘만의 사정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것도 그래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카림이 홀딱 반해서 쫓아다녔다고 하던데…….”
카, 카림이? 대체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 거람?
끈끈하고 더운 날씨였지만 이유 모를 오한이 내 몸을 덮쳤다.
“생일 연회 때 뵙고 첫눈에 반해서 바로 결혼까지 하신 거라고요. 그런데 쉽게 믿을 수는 없는 이야기잖아요? 워낙 이 얘기 저 얘기를 몰고 다니는 분이셨는데.”
여자는 은근슬쩍 내게 사실을 확인했다. 다만 내가 뭐라고 대답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건 카림과 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일단 말리크는…… 저렇게 알고 계시긴 하겠지만. 사실 제3자였다면 전혀 믿지 못할 소문이긴 했겠지.
나는 입술에 침도 안 묻히고 거짓말을 줄줄 해야 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카림과 성후께서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아요.”
“그래요?”
내게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여자에게서는 은은한 술 냄새가 났다.
“초면에 이상한 걸 물어봐서 미안해요. 하지만 제가 언제 카림과 이그드라실을 뵙겠어요.”
…그 말에 얼마 전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래, 나도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될 줄은 몰랐지. 적어도 카림의 생일 연회에 갈 때까지만 해도 그랬지. 언니처럼 적당히 괜찮은 사람을 만나 결혼할 줄 알았는데.
이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내 자신은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근처에서 나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한 게.
“호기심이 과했다고 생각해줄래요?”
“이해해요. 나도 그랬으니까요.”
내 대답에, 나와 눈을 맞댄 여자가 배시시 눈웃음을 덧그렸다. 한결 친절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리니라고 불러주세요.”
“리니도 한동안 오펠에서 지내요?”
“네. 카림께서 머무는 동안은요.”
양심이 쿡쿡 찔려왔지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내 답에 여자의 눈이 또다시 반짝 빛났다.
“두 분은 얼마나 계실 것 같아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이쪽에 역병이 돈다고 들었거든요. 잠잠해지기 전까지는 계실 거 같아요.”
“아, 그거 때문에 오신 거구나.”
여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하위 귀족인 것 같았다. 원래 나와 비슷한 정도의.
“리니는 두 분을 맨날 뵈어요?”
날 보는 여자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말리카의 시녀로 처음 들어가던 때가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나도 백모님을 붙잡고 시녀로 가면 매일같이 말리카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거냐고 물었었다. 막상 말단 시녀가 말리카와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정말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하위 귀족에게 왕족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여자가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 수밖에 없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분들이세요?”
“그냥 평범…….”
평범하다, 고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려던 나는 조금 전 카림을 떠올렸다. 나를 놀려먹는 모습에 이를 빠득빠득 갈며 내 말을 정정했다.
“아뇨, 적어도 카림은 딱 소문대로의 분이에요.”
“소문대로라면요?”
“미친 멍멍이요.”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에 불과하지만, 카림에게 저 말보다 더 잘 어울리는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