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저번에 만났을 때,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있던 레브아의 모습이 머릿속에 맺혔다. 동시에 두 모자가 나누었던 대화들이 귀를 스쳤다.
그런데 그게 말리카가 한 짓이라고?
말리카의 곁을 무려 일 년이나 지켰었던 나다. 항상 우아하고 차분하고, 말단 시녀였던 내게조차 섬세하게 대해줬던 아름다운 말리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믿어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어.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적 카림이 중얼거렸다. 순간 경악한 나는 어깨를 들썩여야 했다.
“……네? 저기요, 릴. 혹시 독심술 하세요?”
“내가?”
그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손끝으로 내 통통한 뺨을 툭툭 어루만졌다.
“넌 얼굴에 생각이 다 보여.”
……우씨.
습관처럼 뺨을 둥글게 부풀리자 여전히 내 뺨에 붙어있던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투명하게도 읽혀. 그래서 좋아.”
카림을 노려보던 나는 입술을 비죽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단순하고 멍청한…… 그래서 자기 생각을 모조리 읽히는 한심한 사람이라는 건가? 아니,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게 아닐까?
끝나지 않을 고민을 이어가던 나는 한마디 툭 대꾸했다.
“말리크께서도 착각이라고 하셨잖아요.”
내 말에 카림이 미간을 모았다. 그는 손끝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리, 릴이 그렇게 말하면 무서운데요.”
지극히 본능적인 대꾸였다. 매번 오해하지 말고 들으라는 말 다음에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서.
내 반응을 무시한 그가 입술을 열었다.
“어머니는 형님의 친모가 아냐.”
그거야 프레이르 제국민으로서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말리크께서 레브아를 어머니라고 부르기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이다.
“만에 하나 형님과 내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형님께서는 나를 해칠 수는 없거든. 옆에 두고 감시하는 게 최선이지. 그런데 뭐가 어떻든 간에 어머니는 날 묶어둘 도구가 될 수 있고, 나도 마찬가지인 상황인데.”
왕실 사정을 보면 그렇겠다, 싶은 당연한 말이었다.
카림의 모습을 보면 말리크의 말도 듣지 않고, 사이가 좋지 않은 말리카의 말은 아예 무시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레브아는 미친개로 이름을 떨쳤던 카림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않을까?
물론 그 ‘제어’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는 말리크의 마음이겠지만 말이다.
“알고도 묵과하시는 거야. 불리할 게 없으니까. 아니, 도리어 좋지. 여차하면 말리카 탓으로 전부 돌려버리면 되니까.”
“그러면 카…… 릴은 왜 가만히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말리크의 머리를 자라게 한 건 나도 어떻게 한 건지 모르는 일이지만 카림에게는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었다.
이미 나도 한 번 경험한 일이 아니었나? 별 도움은 안 됐지만.
그리고 아마,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숙취 약도 그가 만들었을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굳이, 내게 말리카가 레브아를 아프게 한다고 성토하는 이유는.
“혹시 말리크께서 레브아를 못 만나게 하시나요?”
저번에 이그드라실을 만나러 가기 전, 카림이 말리크에게 물었던 것이 생각나서 덧붙였다.
레브아가 아프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카림은 레브아를 만나도 되느냐고 했었다. 허락을 구하는 어조였었다.
“그것도 있고.”
카림은 제 머리를 다소 거칠게 쓸어 넘겼다. 어울리지 않게도 진중한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었다.
“형님의 불안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니까.”
그 적응되지 않는 모습과 별개로,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말리크가 불안하다니, 어떤 점에서?
“……불안함이요?”
“적어도 내가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다른 형제들을 죽일 일도 없었겠지.”
카림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왕실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당사자에게는 죄책감이 클 법한 사건이긴 했다. 하지만 저건 카림 때문이 아니잖아? 권력을 지키고 싶은 말리크가 전통을 따랐을 뿐이다.
카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나만 없었다면. 형님께서 당연히 가져야 할 것들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떨지도 않았겠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결국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은 내가 맞으니까.”
우리 자매의 모습과 다르게 참 삭막한 형제 관계였다.
하지만 저런 잔인한 선택은 말리크가 하고, 자책은 왜 카림이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불쑥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카림은 잠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이내 얼떨떨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다.
“응?”
“우리 언니는 그런 말 하나도 안 하잖아요.”
카림은 내가 내뱉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머잖아 꽤 어렵게 말을 골랐다.
“둘 사이가 좋은 건 나도 잘 알아.”
“릴하고 말리크께서도 사이가 나쁜 건 아니잖아요?”
도리어 둘 사이는 좋은 편이라고 했다. 조금 전만 봐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왕실에 얽힌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긴 할 테지만.
“난 오랫동안 아팠는걸요. 언니는 그런 날 항상 돌봐줬어요.”
“응, 네가 엊그제 그렇게 얘기했어.”
“언니는 예쁜 것도 좋아하고, 품위유지비 얘기를 할 때 보셔서 알겠지만 엄청난 속물이에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지만 속물을 속물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
그리고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있어?
돈이 싫다고 하는 사람은 아주 위험한 사람이었다. 멀리해야 옳다.
“나도 잘 알아요. 언니야말로 내가 없었다면 가질 수 있는 게 훨씬 많았다는 거요.”
하다못해 결혼할 때 들고 갔을 지참금조차 뒷자리에 0이 한 개는 더 붙었을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세린 가문은 딸이 귀했다. 할아버지에게도 아들만 둘이고, 백부님에게도 아들만 있었다.
그러니 집안의 모든 사랑은 고명딸인 언니가 독차지했겠지.
실제로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내 덕에, 심지어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팠던 덕에 언니는 관심조차 받을 수가 없었다.
내가 없었다면 언니야말로 정말 가질 게 많았다. 하지만 언니는 단 한 번도 저런 생각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가족이니까 양보하고 나누는 거잖아요?”
그러는 우리 집안 꼴도 그놈의 작위 때문에 우스운 일이 없던 건 아니었다. 다만 백부님의 삶이 순조로웠던 건 아버지가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력 앞에는 부모 형제가 없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권력 앞에 무너질 사람이라면 근처에 누가 있든, 뭐가 있든 상관이 없는 게 아닐까. 내 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도 권력을 탐하다가 무너질 테니까.
“말리크께서 릴이 말씀하신 대로의 사람이라면, 릴이 평범하게 태어났어도 그러셨을 거예요. 무슨 릴만 없으면 다 좋았을 거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물론 난 카림이 없었으면 좋았겠지? 이렇게 이상한 식으로 코도 안 꿰이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넌 정말…….”
숨을 고른 카림은, 항상 그렇듯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했다.
“가끔, 이상한 데에서 쓸데없이 예리해.”
“그래서 싫죠?”
제발, 제발 싫다고 해 주겠니?
내 간곡한 생각과 다르게 그는 씨익 웃으며 내뱉을 뿐이다.
“누가 언제 싫대? 내 취향이라니까.”
……정말 독심술을 하는 모양이다. 나는 항상 그렇듯 바락바락 대들고 보았다.
“진짜 취향은 연상이라면서요!”
“어라, 그 말을 믿었어?”
툭 대꾸하는 말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는 언니만큼이나 날 놀리는 걸 즐기고 있단 사실을.
입술을 비죽 내민 나는 툴툴거렸다.
“……아뇨, 믿으면 제가 바보 멍청이죠.”
“와. 서운하게 왜 그래. 나만큼 진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기요, 지금 장난하십니까?
내가 기막힌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말머리를 돌렸다.
“지방으로 갈 준비나 해 둬. 시작부터 역병 치료라니, 난이도가 꽤 높긴 하다.”
아참, 그랬지.
심각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깨달은 또 다른 게 있었다. 그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저기요…….”
“응?”
“나 할 줄 아는 거 없는데요?”
말리크의 탈모를 어떻게 치료해줬는지도 모르겠는데? 나 정말 어떻게 한 거지?
내 말에 카림은 얄밉게 웃을 뿐이다.
“그러니까 누가 재깍 하겠다고 대답하래?”
아, 얄미워. 얄밉다고!
내가 뭔가 할 줄 알게 되면 가장 먼저 당신, 대머리가 되게 해달라고 빌 거야! 그래서 나한테 머리털 나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하게 만들 거라고! 각오해도 좋아!
속으로 저주를 토해낼 적 사늘하고 우아하게 나를 돌아본 카림이 한마디 덧붙였다.
“네 덕에 나도 같이 고생해야 하니까 날 저주하지는 말고.”
“……헉.”
그는 정말 독심술을 하는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