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짓궂은 한마디였다. 순간 발끝까지 새빨개진 나는 비명을 질렀다.
“어, 언니!”
“뭐야, 반응이 이상한데.”
고개를 갸우뚱거린 언니의 입에서 막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설마 아직도 안 했어? 카림 어디 문제 있으셔? 고자야? 아님 발기 부전?”
“언니, 카림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 목이 뎅겅 잘릴지도 모른다고!”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 욕도 하는데 뭐 어때? 동생의 인생을 걱정하는 언니로서 못 물어볼 말도 아닌데.”
발작하는 나와 다르게, 언니의 대꾸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프리드린.”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며 카림이 들이닥쳤다. 순간적으로 식겁한 나와 다르게 언니는 여전히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원대하신 카림을 뵙습니다.”
아무 일도 없던 듯 카림에게 인사를 건넨 언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해꾼은 이만 빠져드릴게요. 신혼부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셔요.”
“언니!”
내 볼멘소리에, 혀를 내밀어 보인 언니가 빠르게 사라졌다. 아직 즐거운 시간이고 뭐고 할 사이가 아니란 말이다! 언니가 방금 확인했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다가온 카림은 컵 하나를 건네었다. 새카만 컵 안에는 걸쭉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마셔.”
…의외로 냄새는 괜찮았지만 별로 마시고 싶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받아 든 컵을 멀찍이 떨어뜨리며 물었다.
“이게 뭔데요?”
“아직 숙취가 심할 거 아냐. 약이야.”
아, 숙취 약인가.
하지만 그가 준 사탕을 먹고 아픈 전적이 있어서 별로 마셔주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괜히 말머리를 돌렸다.
“릴은 괜찮아요?”
“응? 뭐가?”
“숙취요. 릴은 저보다 더 많이 마셨잖아요. 그런 걸 어떻게 마시나 몰라요.”
“아.”
그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 툭 대꾸했다.
“난 멀쩡해. 안 취하거든.”
……음?
전혀 믿지 못할 소리였다. 릴 데스테리언이 미친개 소리를 듣는 이유 중 하나가 술이었다. 술에 취해서 벌이는 짓거리들이 아주 가관이니까.
나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본 건 왕실의 망나니 정도였지만, 보통 술에 취하면 개가 된다고들 한다. 거기서 더 마시면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습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정말요?”
“응. 그런데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고.”
카림이 부드럽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길에서 이유 모를 한숨이 느껴졌다.
“프리드린, 올 게 왔어.”
“네? 올 거라뇨?”
“형님께서.”
마, 말리크?
등줄기가 오싹하게 젖어들었다.
“곧 오실 거야.”
“…….”
내 얼굴이 창백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을 터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유서를 미리 써둬야겠다.
나 이제 떠납니다. 짧지만 참 좋은 삶이었어요. 아름다운 나이에 아름답게 떠납니다. 제 사인은 말리크의 가발을 벗긴 죄입니다.
흑흑…….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사박,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천하에 나쁜 놈이 내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금 눈을 떴을 적 내게 손을 뻗는 카림이 보였다. 덕분에 재생되는 어젯밤의 일.
묘한 긴장감이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바짝 굳어 있을 적 다소 차가운 손끝이 내 뺨을 툭 건드렸다.
“너 또 겁을 집어삼켰네.”
“그, 그럼 어떻게 겁을 안 먹어요!”
본능적으로 카림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내 손끝을 본 그는 얄밉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최대한 불쌍하게 사정했다.
“나, 나, 나 괜찮겠죠?”
“그건 나도 몰라.”
“제발, 부디, 안 아프게 죽여주세요. 제 일생일대의 소원이에요.”
“그건 형님께 부탁해 봐. 나, 나름대로 네가 벌인 일 뒷수습하느라 바빴다?”
내게 잘 먹혀들었던 말리카의 가련함과 다르게, 내 불쌍함은 씨알도 안 먹혔다. 덕분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툴툴거리는 것뿐이었다.
“그것참 고맙기도 하셔라. 너무 고마워서 눈물 날 거 같아요.”
“그렇지? 알면 잘해. 세 번째 목숨 빚이야.”
정말, 말이나 못 하면……. 입술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쁜 놈, 못된 놈, 멍멍이 같은 자식. 따지고 보면 나한테 술을 준, 대단한 남편님 잘못이 제일 큰 거 아니야?
속으로 이죽거리고 있을 적 다시 문이 열렸다.
무성하게도 자란 새카만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어린아이처럼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는 말리크가 나타났다.
뚜벅뚜벅 내 앞까지 걸어온 말리크가 무릎을 바닥에 붙였다.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조, 존모하는 말리크.”
말리크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리크는 순순히 허리를 굽히고, 내 드레스 자락에 입을 맞추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릴에게 듣기로 숙취로 고생을 하고 있으시다고요.”
“네, 네, 제가 고생을 좀 하고 있…….”
무심코 대답을 하던 나는 순간 혀를 깨물어야 했다. 아니, 이게 아니잖아!
내 울상과 다르게 얄미운 카림은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 한 대 때리고 싶어. 저런 인간을 남편이라고.
나는 내 앞에 여전히 무릎을 붙이고 있는 말리크를 바라보았다.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조, 존모하는 말, 말리크시여.”
“하문하시지요.”
“제, 제가 큰 무례를 저질렀어요.”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보았다. 이렇게 사정사정하는 귀여운 제수씨를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싶은 마음으로.
물론 그 와중에 바닥에 머리를 박은 건 불가항력이었다.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얏! 요, 용서해주세요!”
“……무례라니요. 감사하고 있습니다.”
순간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바닥에 나란히 무릎을 굽히고 있던 말리크와 시선이 마주했다.
말리크는 보란 듯, 자신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저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싶었다.
하지만 다른 말을 아낀 말리크는 나를 향해 눈을 휘었다.
“이그드라실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염치불문하고 이리 발걸음 했습니다.”
“네? 일이요?”
“들어주시겠습니까?”
정중하게 묻는 말에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그, 그럼요!”
“프리드린!”
순간 기겁한 카림이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내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이건 아니야! 무슨 부탁인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알겠다고 한 거냐고!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봤자 이미 때는 늦으리오. 흡족하게 나를 본 말리크는 ‘부탁’이란 것의 운을 떼었다.
“요즘 남부 지방에서 이름 모를 역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역병?
“처음 보는 괴질입니다. 발병하면 사흘 동안 열이 오르고 떨어지다가 반수는 목숨을 잃습니다.”
“…….”
“릴과 함께 해당 지역을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 카림이 한 걸음 나섰다. 어울리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였다.
“형님, 그러면 어머님은…….”
“어머님이 왜.”
오도카니 서 있는 카림을 올려다보는 말리크의 눈빛이 오묘했다. 걱정으로 물든 카림의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할 뿐이었다.
“편찮으시잖습니까, 조금 나아지시면 그때 기꺼이 시찰을 가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무거워서…… 한동안은 데스테리언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습니다.”
“릴, 경중을 생각하거라.”
말리크는 단호했다.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가라.’라는 의미였다.
“레브아께서는 내 어머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할라의 짓이라고 생각하느냐?”
말리크가 말리카를 들먹였다. 한순간 눈빛이 변한 카림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네가 틀린 거다.”
말리크는 더없이 단호했다. 카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런 말리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내 동생에게서 시선을 뗀 말리크가 나를 응시했다.
“이그드라실이여, 가시는 걸로 알고 준비해두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말리크는 내가 뭐라고 답하기 전, 도망치듯 이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번복하기 전에 쐐기를 박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미 하겠다고 한 거 어쩌겠어. 뭐가 됐든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최대한 좋게 생각하고 있을 적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골 아프다.”
……이, 이크.
어색한 웃음을 터뜨린 나는 사과를 해야만 했다. 물론 내가 무슨 잘못인가 싶었지만.
“하, 하하하…… 미, 미안해요, 릴.”
“아냐.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시기가 조금…….”
말꼬리를 흐린 카림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시기, 라는 말에 카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레브아의 건강이 좋지 않은 지금이라는 의미겠지.
“저, 조금 전 말리크와 나눈 대화의 의미가 뭐예요?”
내 질문에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말리카 짓이야.”
“……네?”
“어머니께서 편찮으신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