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바로 언니잖아! 언니가 날 이 지옥의 결혼 무덤으로 팔아넘겼잖아! 어마어마한 품위유지비에 홀려서!
…물론 누구든 혹할 만한 금액이긴 했다.
“그리고 내가 언제 멍청하댔어? 그런 점이 귀엽다는 거야. 다람쥐가 저러는 덕에 무사히 파종되는 식물이 얼마나 많은데. 생명을 키워냈다는 이그드라실과 딱 어울리지.”
“…….”
“아, 이걸 좀 다르게 말해줄까?”
카림은 항상 그렇듯 느끼한 소리를 덧붙였다.
“내 취향이야.”
그 말에 날 카림에게 팔아넘긴 언니가 옆에서 깔깔깔,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등을 어루만지고 있던 손이 찰지게 변한 것은 덤이었다.
찰싹, 찰싹하는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프리드린, 너 임자 만났다!”
“……참, 언니.”
난 그런 언니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붙잡았다. 언니 손은 제법 맵다고!
“왜?”
“내 도장은 대체 언제 훔쳤어?”
“훔치다니. 섭섭하게 왜 그러니?”
부정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언니는 항상 그렇듯 당당했다. 아니, 당당하다 못해 뻔뻔했다.
“원래 내 건 내 거고, 네 것도 내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디 있긴. 널 18년이나 돌봐 준 이 언니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되지.”
……윽.
뻔뻔한 언니를 닮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내게는 양심이란 놈이 흘러넘쳤다. 언니가 저렇게 나오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깟 도장 훔쳐 가서 대신 찍은 게 문제일까.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반쯤 자포자기한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래서 팔천이야?”
“어머, 팔천이라니. 그럼 삼천은 내 몫으로 주렴.”
약삭빠른 모른 척이었다. 기막혔던 난 툭 대꾸했다.
“누가 준대?”
“어머, 프리드린. 언니는 이제부터 너하고 같이 의상실도 가 봐야 하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기도 해야 하고, 남편 욕도 해보기도 하고……. 자매로서의 정을 좀 더 돈독히 하고 싶은데.”
지금도 언니와의 정이 너무 깊은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난 지금도 내 행복과 언니의 행복을 두고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후자를 선택할 텐데. 언니가 내게 희생한 세월이 무려 18년이니까.
여기서 더 깊어지면 우리는 뭐가 되는 걸까, 언니.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거든.”
내 기특한 속을 모르는 언니가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자연스럽게 졸라댔다.
“근데 안 줄 거야?”
“그을쎄에.”
“응? 안 줄 거야? 정말? 진심으로?”
그 칭얼거림에 뭐라고 대답하기 전 마차가 멈추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형부가 창백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직 내 존재를 버겁게 생각하는 형부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 행동이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형부와도 사이가 제법 좋았으니까.
“아리엘, 도착했어요. 어서 가요.”
“어머, 클리드.”
짤막한 사이, 순식간에 흐트러진 옷과 머리를 정리한 언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쪼르륵 형부에게 달려가 팔짱을 꼈다.
‘……와, 저 내숭 좀 보게.’
형부가 저 실체를 알아야 하는데!
언니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카림이, 문 밖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울리지 않게 우아한 행동거지였다.
“우리도 가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허리를 펴자마자 보이는 건, 짤막한 일 년을 살아온 익숙한 왕성이었다.
우리 네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익숙한 정원을 지나고, 문을 지나고, 또 복도를 지나서 도착한 연회장.
무거운 문이 열렸다.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언니와 형부가 먼저 앞장서 상석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 카림이 그 뒤를 따랐다.
우리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사람들이 바닥을 향해 무릎을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내게는 부담스러운 인사였지만 이 모든 것이 익숙한 카림은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도달한 상석에서 나와 카림, 언니와 형부가 자리에 무릎을 굽혔다.
말리크와 말리카도 우리를 향해, 놀랍게도 예의를 보였다.
“존모하는 말리크와 아름다운 말리카를 뵙습니다.”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말리크의, 선언과도 같은 말이 이어졌다.
“신의 가장 신실한 종으로서, 신께서 옮기시는 귀한 걸음은 언제나 진심으로 다해 섬길 것입니다.”
…그 말에 내가 지금껏 숨 쉬던 세상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언니와 마차에서 웃고 떠들던, 고작 몇 분 전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린 말리카는 떨리는 나와 눈을 맞대었다. 너무나 가련하고 아름답게 눈을 휘었다.
“부디, 왕실에서 준비한 조촐한 축하연이 이그드라실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말리카의 부드러운 속삭임과 함께 파티가 시작되었다.
익숙한 왕실 파티여야 했지만 하나도 익숙하지 않았다. 화사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춤을 추고 있는 사람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억눌린 활기였다. 하나같이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어울리지 않는 상석에 앉아, 당연하게도 의기소침해진 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일 뿐인데.
“따라해, 프리드린.”
언니는 그런 내게 말을 붙였다.
“……응?”
“프리드린 데스테리언은 아리엘 브렌델의 생쥐다.”
옆에서 형부가 창백한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안절부절못하는 게, 언니의 말에 형부가 대신 겁을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형부, 환상을 깨서 미안한데 형부 앞이라서 쥐새끼라고 안 하는 거예요.
당연히 저 말을 순순히 따라 할 내가 아니었다.
“……아리엘 라비아는 올챙이 배.”
“요게 정말!”
언니는 인정사정없이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힝, 아프단 말이야! 살살 때려!
“넌 평생 내 쥐새끼라고. 알겠어?”
“아, 아리엘!”
이어지는 발언에 기함한 형부가 언니의 팔을 붙잡았다.
형부를 돌아본 언니의 태도는 180도 뒤바뀌어 있었다. 봄바람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그래요, 자기?”
그 태도 변화에 형부가 언니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방금 들은 걸 착각이라고 판단한 듯 웃음기 어린 속삭임을 남겼다.
“마침 곡이 바뀌었는데 한 곡 춰요. 아리엘이 좋아하는 곡이네요.”
“어머, 그렇네요. 역시 절 챙겨주는 사람은 클리드뿐이에요.”
형부의 손을 맞잡은 언니가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며 내게 슬쩍 혀를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와, 진짜 내숭 백 단이다. 좀 보고 배워야겠어.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카림이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좋은 언니야.”
“……네.”
언니의 내숭과 별개로 코끝이 찡해진 나는 애써 대답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언니가 저보다 카…… 릴과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이어진 말에 와인을 마시던 카림의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얼떨떨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막장 불륜 종용해?”
“네? 막장 불륜이라뇨? 제가 언제요?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당연하게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떻게 하면 생각이 저쪽으로 흘러가는 거람?
그는 제법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써 중얼거렸다.
“내가 처형하고 잘 어울린다면서.”
“응?”
멍청하게 되물은 나는 뒤늦게 카림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기겁한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실 수가 있어요? 언니랑 대화가 잘 통하신다는 의미였어요. 마차에서도 잘 어울려서 노셨잖아요. 그것도 절 놀리면서!”
“아, 그 말이었어? 난 또 뭐라고. 내 다람쥐 취향이 특이한 줄 알았지.”
“아무렴 카…… 릴만 하겠어요.”
툭 대꾸한 소리에 이 얄미운 남자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취향이 뭐가 어때서?”
“정말 몰라서 물으세요?”
“응.”
……댁 취향을 댁이 모르면 어쩌자고요?
내 황당함과 별개로 그가 짓궂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설명해줄래?”
“그게…….”
차분히 대꾸하려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진짜 취향은 연상이네 어쩌네…… 하긴 했지만 그가 꾸준히 ‘취향’이라고 말한 건 나였으니까. 여기서 취향이 특이하다고 하면 내 자신이 특이한 사람이라고 인정해버리는 꼴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난 멍청한 다람쥐가 맞는 것 같다. 입술을 비죽 내민 나는 결국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씨, 언젠가 한 대 때려 주고 말 테다.
“근데 쥐상이 대체 뭐예요?”
“말 그대로인데. 설치류가 어떻게 생겼어?”
“설치류요?”
다람쥐는 귀엽고 쥐는 징그럽지만, 난 겨우겨우 쥐와 다람쥐의 공통점을 생각해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새카만 눈과 툭 튀어나온 코였다. 그 덕에 입은 보이지도 않고, 턱이 짧고 귀가 컸다.
……어, 그런데 이걸 정리하면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