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러니 그와 나는 삶의 동반자일 수밖에 없는 걸까.
괜히 미안해진 나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코피를 닦아주었다. 사과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으면서.
“……미안해요.”
“응? 아니, 뭐. 이거 가지고.”
카림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동시에 줄줄 흐르던 코피가 사라졌다. 완전히 멎은 듯 다시 흐르는 기색도 없었다.
놀란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그가 툭 대꾸했다.
“피도 물이거든.”
“…….”
아, 따지고 보면 그렇네? 그런데 갑자기 배신감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나.
내 입꼬리가 비뚤게 말아 올라갈 적 카림이 빠르게 속삭였다.
“근데 정말 생전 처음 나 보는 거다?”
“……아, 네.”
나는 진심을 담아, 저주를 내리듯 한 마디 한 마디 토해냈다.
“앞으로 종종 더 터뜨려 드릴게요.”
“그건 정중하게 사양…….”
무언가 생각난 게 있던 듯 말을 멈춘 그가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음미하듯, 노골적으로.
……그 시선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면 정말 바보 천치다.
카림의 입술이 음흉한 호선을 그었다.
“아니, 하루에 최소한 한 번 이상 부탁할게.”
“섹드립 아니라고!”
결국 베개가 다시 힘차게 포물선을 그었다.
……와, 감동받아서 찔끔 났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너한테 뭘 기대한 내가 정말 바보 천치 머저리 우렁쉥이다.
* * *
내게 닥친 상황이 무엇인지 정리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사실 카림과 단둘이 머리를 맞대고 있어도 무슨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부딪쳐서 현실과 맞닥뜨리는 것이 정답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간 이는 카림의 모친, 레브아였다.
레브아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지만 밝은 얼굴로 우리를 마주했다.
“어서 오세요.”
“고아하신 레브아를 뵙습니다.”
“딱딱하게. 저 아이처럼 어머니라고 불러주겠어요?”
내 어머니의 평소 음색처럼 푸근한 음성이었다.
어머니가 내 앞에서 절을 올리던 것이 생각났다. 괜히 쭈뼛거리며 중얼거렸다.
“레브아께서도 말씀은 놓으시면…….”
“차차 익숙해지면 그렇게 할게요. 이그드라실을 눈앞에서 현알하는데 이 늙은이도 많이 긴장했다는 걸 생각해 주세요.”
지금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대해도 실제로 그런 건 아니라고.
저 말을 그렇게 알아들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카림은 걱정스럽게 레브아에게 다가붙었다. 처음이었다, 카림이 저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 게.
왕족이든,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자든 간에 어머니 앞에 서면 그냥 평범한 자식에 불과하구나 싶었다.
“좀…… 괜찮으신가요.”
“그럼.”
레브아는 소탈하게도 웃었다.
…척 보기에도 아파 보여서, 소탈한 웃음조차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레브아는 카림을 안심시키듯 속삭였다.
“이제 나이가 들었을 뿐이란다.”
“……어머니.”
“아들아.”
주름졌지만 상냥한 손이 카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 아픈 게 당연하단다. 아무 걱정하지 마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니.”
…그 말에는 묘한 뼈가 있었다. 마치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그 무엇도 네 잘못이 아니고, 레반의 잘못도 아니야. 그렇다고 할라의 탓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 이렇게 낳은 어머니 잘못도 아니에요. 어머니께서 이런 걸 감내하실 이유가 없다고요.”
서로의 죄책감을 나누는 듯한 말이었다. 그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카림과 말리크는 제법 우애 좋은 형제였다.
말리카와 카림의 분위기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듯했지만 말리크와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말리크가 굳이 두 사람을 말리지 않는 것도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기가 애매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데 그런, 사이좋은 말리크와 카림은 애초에 배다른 형제였다.
지금 레브아는 선왕의 제2말리카. 지금 말리크의 친모가 죽은 후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다만 레브아는 현 말리크에게 소홀하지 않았다. 말리크도 그런 레브아를 친어머니처럼 따르고 공경했다.
아마 말리크가 즉위했을 때, 카림을 죽일 수 없던 이유에는 레브아와의 돈독함도 끼어 있을 것이다. 레브아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오르기 힘들었을 테니까.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지금 말리크가 무사히 왕위를 잇는 데에는 레브아의 공이 지대했지만, 그 자리를 위태롭게 만든 카림을 낳은 이 또한 레브아라는 게.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을 저럴 때 쓰는 건 아닐까.
그러면 지금 레브아와 말리크의 사이는 어떨까.
…레브아가 아프다는 걸 카림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 보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난 항상 네 미래를 위해 기도할 뿐이야. 아…….”
짤막한 탄성을 내뱉은 레브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이그드라실께 말씀드리면 되겠군요. 이 늙은이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어머니, 얘 아무것도 몰라요.”
카림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속삭였다. 레브아의 시선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얘야, 아무리 그래도 이그드라실께 그런 말버릇은…….”
“정말이니까요.”
카림은 툭 내던지듯 말을 받았다.
“기도하는 법도 모를걸요? 그렇지?”
“……뭐, 일단은, 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 정말 아는 거 없다. 애초에 내가 누굴 위해 기도할 일이 있었을 리가 있나. 당연하게도 신전과는 담쌓고 지냈다.
카림이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했다.
“큰일이야. 이제 주 업무가 될 텐데.”
“주 업무라뇨? 저 일해야 해요?”
“당연하지.”
…뭐가 당연한데?
자연스럽게 반문했다.
“세상에 어떤 신이 일을 해요?”
무엇보다 이 저질 체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조금 하다 쓰러지지 않을까.
“원래 이그드라실께서도 농사를 지었어. 농사 안 지으라고 하는 게 어디야? 기껏해야 기도해주고 성사하는 게 다일 텐데 그 정도면 뭐.”
“그게 더 귀찮겠어요.”
농사는 그래도 단순 노동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기도와 성사라니, 듣기만 해도 귀찮았다.
아니, 무엇보다 기도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책임은 모두 나한테 돌아오는 거 아닌가?
괜히 기겁한 내가 몸을 부르륵 떨 때 레브아가 친절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릴.”
“에이. 제가 어디 가서 사람하고 못 지내는 거 보셨나요?”
“그래……. 어디에서든 잘 지냈지. 기막힌 방법으로 말이다.”
레브아의 음성이 떨떠름했다. …정말 여러 뜻이 담긴 답이었다.
애초에 별명이 미친개인데 근처 사람과 잘 지낼 리가 있나. 딱 한 번 본 것이지만, 연회에서 한 짓만 생각하더라도 그랬다. 그건 잘 지내는 게 아니라 사람을 물질로 조련하는 행동이었다.
…아, 나도 물질로 조련당한 사람에 해당하나?
“어쨌든 내 걱정은 말거라. 허망하게 널 저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 아득바득 어떻게든 살아서, 네가 행복하게 웃는 얼굴은 보고 갈 거야.”
레브아는 상냥하게 카림의 어깨를 매만졌다.
“이만 쉬어야겠구나.”
카림은 레브아의 뜻을 존중했다. 인사를 한 우리는 조용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다음은 신전 차례. 신전 다음에는 왕성으로 향해야 했다.
레브아 궁을 빠져나오면서 괜히 말을 걸었다.
“고아하신 레브아와 사이가 좋아 보이세요.”
“응, 뭐.”
병색이 완연했던 태후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던지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일하게, 오롯한 내 편이니까.”
“…….”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림은 그런 내 손을 슬그머니 붙잡았다.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이어 한층 밝아진 음성이 들렸다.
“그래도 이제 네가 생겼네.”
나도 레브아처럼 오롯한 자신의 편이라는 소리였다. 괜히 피식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동지.”
“동지요?”
“이제 같은 길을 걸어갈 동반자.”
그럴듯했다.
…뭐.
애초에 내가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이 사람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신화의 재림이 어쩌고…… 하면서 신전에서 먼저 나서서 이 사람과 엮어줬을 것이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갔거나.
내가 고개를 주억거릴 적 카림이 말을 이었다.
“아니네, 신화를 따르면 이그드라실에게서 모든 걸 받았으니까……. 넌 내 주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어.”
진지하게 말한 남자는 전혀 진지하지 않은 속삭임을 남겼다.
“주인님. 멍멍.”
왜 이 남자의 엉덩이 뒤에서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 같을까.
정말 강아지였다면 귀엽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줬겠지만…….
지금은 내 머리가 딱딱 아려오기 시작할 뿐이었다.
장난이라고 해도 받아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 법이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압박한 나는 최대한 음산하게 속삭였다.
“……지금 그거 조건 5번 위반이거든요?”
“그래서 뭐. 너도 은근슬쩍 2번 위반하잖아.”
“제가 언제요?”
“일부러 어떤 호칭도 안 부르잖아.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정곡을 찔린 나는 항상 그렇듯 따박따박 따지고 보았다.
“그게 왜 위반인데요? 다른 호칭 안 썼으니 된 거 아니에요? 하다못해 저기요나 이봐요도 안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나도 조항 어긴 적 없다? 네 앞이라 장난삼아 농담 한 번 해 본 거지, 품위 유지를 하지 않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뭐라고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어떤 대꾸도 할 수 없던 내가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을 때였다.
“프리드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