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22화 (22/115)

22

다급하게 물은 것에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욕실? 무슨 욕실?”

“여기서 게르드로 출발하던 날! 당신이 갑, 갑, 갑……! 내, 내, 내……!”

갑자기 욕실로 들어왔잖아! 내 알몸 봤잖아!

하지만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아들은 카림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돌리며 휘파람 부는 시늉을 한다.

‘우이씨!’

그러면 그렇지, 애초에 둘 중 하나인 일이었다.

어디에 있든 날 느낀다는 저 말이 진짜라면, 내가 그 욕실에 있던 걸 몰랐을 리가 없잖아! 있다는 걸 느꼈을 테니까!

…갑자기 살의가 끓어올랐다

“알면서, 일부러…….”

나는 지극히 본능적으로, 옆에 놓여 있던 베개로 그를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나가 죽어, 이 변태야!”

염치없는 남자를 후려치는 베개의 타격감은 꽤나 훌륭했다.

베개를 휘두르는 손목의 리드미컬한 스냅.

푹신한 솜뭉치가 제법 덩치 있는 남자와 맞부딪힐 때의 찰진 타격감.

…이 매타작에는 한번 맛이 들리면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는 매력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내 매타작은 타악기처럼 장단에 맞춰, 신명 나게 이어졌다.

퍽, 퍼벅! 퍼버벅! 하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야, 그만! 잠시만! 아파! 스톱!”

자신보다 훨씬 작은 베개를 피해 도망가던 카림이 소리쳤다. 여기서 그만두라고 그만두면 내가 아니다.

“변태는 죽을 때까지 맞아야 해!”

“그게 이렇게 화낼 일이야?”

“당연하죠!”

“앞으로 주구장창 보게 될 건데, 미리 좀 보면 덧나?”

“덧나요! 그리고 꿈 깨! 누가 보여준다고 했냐고! 그럴 일 없어! 절대로!”

각방 금지 조항이 있긴 하지만, 빌어먹게도, 정말 인정하기 싫게도, 이미 부부지만!

이 인간과 내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려면 백만 년은 이르다. 점잖지 못하게 덮치려고 하면 중요 부위를 냅다 걷어차 줄 거야! 평생 써먹지 못하게!

팔을 방패 삼아, 끊임없이 쏟아지던 매타작을 막던 그가 다시 외쳤다.

“계약서에 한 줄 추가하자면서! 나도 하나 추가해야 성립되는 거 아냐?”

“아, 네. 그래서 뭔데요?”

“폭력 금지!”

그제야 신명 나게 이어지던 매타작을 멈춘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 진심을 담아 의문을 표했다.

“이게 폭력이에요?”

“당연하지!”

“나처럼 연약한 소녀가 때리는 게 어디가 아프다고 그러세요?”

뻔뻔한 것 같지만, 내가 당당하게 내 스스로를 ‘연약하다’라고 묘사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아픈 덕에 침대 생활을 18년이나 했다. 멀쩡히 서서 돌아다닌 지 고작 일 년하고도 몇 개월.

덕분에 정신 건강은 최상위권 수준이지만 근력이고, 체력이고 나발이고는 최하위권이었다. 시녀 생활을 하면서 조금 늘었다고 하지만 시녀가 뭐, 험한 일을 하겠나?

병아리 눈곱만큼 늘은 것도 늘은 거기야 하지만 여전히 연약하단 거다.

그런 내가, 심지어 이런 베개를 휘둘러봐야……. 적당한 타격감은 있었지만 아플 리가 있나.

솜이 듬뿍 들은 베개로 때리는 게 진짜로 아플 리가 없었다.

“상성이라는 게 있어.”

내 기막힌 시선에 카림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의 이마는 땀투성이였다. 애쉬 그레이 빛깔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은 채 어지럽게 흐트러진 채였다.

남자의 저 중얼거림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던 내가 되물었다.

“상성이요?”

“자연의 신은 왜 사하크에게 물을 다룰 수 있게 하고, 자신은 대지를 가꾸었게?”

“모르겠는데요. 그냥 신화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물은 불에는 강해도 흙에는 약하거든. 자기가 이겨먹으려고 그런 거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신화잖아?

“네가 작정하고 나서면 난 0.1초 만에 죽는다는 소리야.”

믿기지가 않는 말이었다. 당연히 입 밖으로 흘러나가는 목소리가 멍청했다.

“…정말로요?”

“응.”

“진짜?”

“당연히.”

“확실해요?”

“속고만 살았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이 나쁜 놈에게는 속은 기억밖에 없는 것 같은데. 작정하고 나서면 죽는다니까 실험해 볼 수도 없고.

‘음…….’

진위 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이 대화가 이어진 근원을 떠올렸다.

그 욕실 사건.

…신나게 때리고 있던 것도 전부 그것 때문이었는데.

잠시 가라앉았던 살의가 다시 치솟았다.

“근데 누가 애초에 원인 제공하랬냐고!”

“아니, 그래. 네가 있는 걸 알고 간 건 맞지만…….”

“변명하지 마요!”

“프리드린, 나도 억울해. 네가 좋은 구경 시켜줄 줄 누가 알았어?”

“억울은 무슨! 애초에 욕실에서 당연히 목욕을 하고 있지! 욕실이 시녀하고 다정하게 수다 떠는 공간은 아니잖아!”

퍽!

파공음까지 내며 힘차게 날아간 베개가 카림의 얼굴에 정통으로 부닥쳤다.

투둑…….

무슨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베개가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이 남자의 코를 타고 주르륵 흐르는 붉은 것.

“…….”

세상에.

코, 코피다.

순간 식겁한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괘, 괜찮아요?”

“……아.”

내뱉는 한마디가 어딘지 모르게 음울했다.

……화가 난 건 아닐까.

아무리 원인 제공자라고 하더라도 이건 내가 너무한 것 같았다. 해서 조심스럽게 카림의 얼굴에 손을 뻗을 때 그가 툭 내던졌다.

“내 코피를 터뜨린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남자에게로 향해 뻗어 나가던 내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완벽하게 할 말을 상실한 나는 카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자신의 턱을 긁으며 덧붙였다.

“라고 말하면 조건 5번에 위반되려나?”

……네가 그럼 그렇지.

기대를 항상 깔끔하게 저버리시는구나.

이어지는 말에 정신이 오롯이 가출한 나도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야한 생각 해서 쏟아진 건 아니고요?”

“응?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굳이 욕실까지 쳐들어오신 걸 보면 카림의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건지 안 봐도 뻔해서요.”

“그것참, 역시 따박따박 잘 따져. 근데 그거 알아? 볼 게 있어야 상상도…….”

그대로 말을 멈춘 카림이 제법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아, 그래, 인정할 건 인정. 절경이긴 했어.”

“그렇죠?”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이 없어진 나는 자신감 있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날씬한 허리를 보란 듯 주욱 늘이면서.

“제가 이래 봬도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죠. 누구든 내 몸매를 보면 첫눈에 반할 거야. 언니는 올챙이지만.”

언니는 스스로를 빨래판이라고 부르지만, 글쎄. 빨래판 정도면 너무 미화한 모습이었다. 빨래판은 그래도 일자기라도 하잖아.

언니는 올챙이가 딱이다.

“……올챙이라니?”

반문한 카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올챙이가 어떻게 생겼게요?”

“동글동글하니 배만 볼록한…… 아.”

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대답하다가 깨달은 모양이다.

올챙이 배면서 빨래판은 무슨. 빨래판은 그래도 들어갈 곳은 들어갔다고! 나와야 할 곳도 들어가 있어서 문제일 뿐이지. 하지만 올챙이는 들어가야 할 곳도 볼록하단 말이야. 언니처럼.

……귀신같은 언니가 근처에 있었으면 지금쯤 꿀밤 한 대 맞았겠지?

‘아니, 이제 안 때리겠지.’

그러지 못하겠지. 세상에, 이그드라실이여. 맞는 날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괜히 씁쓸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카림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드린? 난 너에 대해서만 알면 돼. 굳이 처형 몸매까지 알려주지 마. 그런 건 제발 모르고 싶어.”

“모르셔도 돼요. 그냥, 언니랑 항상 이러고 놀아서요.”

내 말에 카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이좋네.”

“그랬죠.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요.”

피식,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린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있잖아, 프리드린.”

진지한 음성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그가 아무리 진지한 태도를 보여도 줄줄 흐르는 코피 덕에 전혀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너도 네 위치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네게 익숙해지는 건 네가 네 위치에 익숙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려. 그럴 수밖에 없어.”

하지만 들려오는 말은 차분하게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널 아낀 사람들에게도, 이 갑작스러운 일에 익숙해질 충분한 시간을 줘.”

따뜻한 손이 천천히 내 뺨을 매만졌다.

“네가 여전히, 예전의 너란 걸 받아들일 때까지.”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동시에 무심코 깨달았다.

……그래.

이 사람만이 지금의 나를 이해해 줄 수 있겠구나.

그리고 언젠가 나만이 이 사람을 이해하게 될 수 있겠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