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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래서 프리드린 라비아는 우울했다
반만년 동안 존속해온 제국, 프레이르는 건국 신화를 토대로 이끌어온 제정일치의 국가였다.
프레이르의 태조, 사하크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 묘르닐의 장군이었다.
당시 묘르닐은 오래도록 지속된 전쟁으로 나라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전화 속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어 나갔고 비옥했던 토지는 피폐해졌다.
결국 출병했던 사하크는 조국을 배반하고, 군사를 돌려 새 땅으로 향해 프레이르를 세웠다. 하지만 그들이 향할 수 있던 남은 땅은 사막뿐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피해 오니 사막의 척박한 환경이 수많은 사람을 죽여 나갔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사하크는 수많은 신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자연의 신은 이 땅에 발을 디뎠다.
‘내 너의 간절함을 들었노라.’
이 땅에 내려온 자연의 신은 사하크에게 자신의 권능을 하사했다. 그로 인해 사하크는 물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메마른 땅을 적실 단비를 내릴 줄 알게 되었다.
사하크는 신께서 제게 하사한 권능을 남용하지 않았다.
철저히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사용했고, 그로 인해 프레이르는 점차 윤택해져갔다. 하지만 한참 전쟁 중이던 근처에서 윤택해진 땅을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평온했던 프레이르는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았고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긴 전쟁의 끝에 프레이르는 오롯하게 승리했고, 이후 신께서는 사하크의 반려가 되어 직접 피폐해진 땅을 가꾸었다. 사하크가 비를 내리면 신께서는 비옥해진 땅 위에 수많은 생명을 키워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인간인 사하크는 수명을 다해 눈을 감았다. 신은 반려인 사하크가 몸을 뉜 무덤가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읊조렸다.
‘내가 다시 재림하여 꽃을 피우는 날, 프레이르는 번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름드리나무로 화했다고 전해진다.
프레이르의 사람들은 아름드리나무를 중심으로 삼아 신전을 짓고, 그 나무를 세계수라고 부르며 정성껏 돌보았다.
하지만 그 나무는 처음부터 가지만 앙상한 채, 꽃은커녕 잎사귀조차 돋아난 전적이 없었다. 해서 신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은 예언처럼 프레이르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렇게 사하크를 도와 이 나라를 키운 자연의 신을 지금은, 이그드라실이라고 불렀다.
프레이르 사람들이 이 건국 신화를 ‘신화’이되, 단순한 신화로 치부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그드라실이 사하크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권능. 건조한 사막에 비를 내리고 물을 지배하는 이가 왕실에서 간혹가다가 태어나기 때문에.
두 번째, 보는 순간 경외감이 드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반만년간 신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만 이그드라실의 오롯한 힘이라고 전해지는, 땅을 가꾸고 그 땅 위를 걷는 모든 생명을 키워내는 이는 아직까지 전례가 없었다.
어쨌든 저런 건국 신화가 있기 때문에 왕실에서 어쩌다 한 번씩 태어나는, 물을 다루는 자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만인의 아낌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기나긴 어둠을 헤친 나는 힘겹게 눈을 들어 올렸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이는 어머니나 아버지, 언니가 아닌 카림이었다.
“이제 정신이 드나 봐?”
카림은 내 손을 꼭 움켜잡고 있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던 내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무, 무슨 일이…….”
“뭐긴.”
카림은 익살맞게도 웃었다.
…그 웃음이 왜 처연해 보였던 걸까.
“반가워, 내 동지.”
― 동지는 개뿔.
그때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들렸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머리에서 머리로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누가 말한 것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지나치게 넓은 이 방 안에는 나와 카림, 둘과 카림의 무릎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하얀 고양이뿐이었다.
‘……어, 고양이?’
보송보송한 하얀 털과 황금빛 눈을 빛내고 있는 고양이는 굉장한 미묘였다. 나는 그 고양이와 시선을 맞대었다. 앙증맞은 분홍빛 코, 쫑긋 서 있는 귀, 풍성한 털까지.
귀, 귀엽잖아!
“웬 고양이예요?”
“응? 못 알아보겠어?”
“네?”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잖아.”
……저, 저 고양이가 세계수의 정령이라고?
순간 경악한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다.
“이, 이, 이,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라뇨?”
― 야~ 옹.
귀엽게 야옹거린 고양이는 뒷발로 제 귀를 긁을 뿐이었다.
봐, 저게 영락없이 고양이지 무슨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야? 내가 본 드리아스는 엄청난 미인이었다고!
카림이 인정사정없이 고양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콩! 소리와 함께 고양이가 카림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 하악!
“무, 무슨 짓이에요! 이 작은 아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연기하지 마, 이 빌어먹을 축생아.”
내 외침을 무시한 카림은 고양이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무슨 천 년 묵은 원수를 보는 것처럼.
…내 눈에는 그런 카림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 카림의 무릎에서 우아하게 뛰어내린 고양이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 감히, 이 내게 빌어먹을 축생이라니. 사하크의 후손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싸가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동시에 들리던 음성이란.
그 흰 고양이가 제 앞발을 혀로 핥았다. 말랑말랑해 보이는 앞발 젤리는 선명한 분홍빛이었다.
‘너, 너무 귀여워. 예뻐. 사랑스러워.’
홀린 듯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을 적 제법 살벌한 음성이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 너도 마찬가지다, 릴. 버릇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지.
“버릇은 무슨. 축생이 감히 인간에게 버릇을 운운해?”
― 축생이라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사나운 하얀 고양이지, 뭐.”
― 이…….
고양이가 순간 내 무릎 위로 뛰어왔다. 그리고 앞발로 카림을 가리켰다.
― 혼내거라.
“……응?”
― 뭐 하고 있어. 네 족속인 저놈의 궁둥이를 냅다 걷어 차주지 않고!
꽤나 머리 아픈 고함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양이의 양 앞다리 사이 밑에 손을 넣은 나는 고양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털이 정말 보들보들했다.
“정말 네가 말하는 거야?”
― 뭐…… 네가? 지금 ‘네가’라고 했어? 이것도 사하크의 후손과 똑같은 싸가지로다!
화가 난 듯한 목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내 손을 냅다 물어버렸다. 눈물이 찔끔 나는 고통에 자연스럽게 비명이 터졌다.
“아얏!”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카림은 그런 고양이의 뒷덜미를 냅다 움켜쥐었다.
허공으로 들어 올리자, 졸지에 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고양이가 네 발을 마구 휘저었다.
― 네놈이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감히 나를!
“내 아내가 조금이라도 다치기만 했어 봐.”
― 다쳤으면 뭐 어쩔 건데!
“글쎄, 그건 알아서 생각해봐.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을지. 그래, 최악의 경우에는.”
카림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유려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그드라실을 불살라버릴지도 몰라.”
― …….
…내용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지만.
정말 저 고양이가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라면, 이그드라실이 타버리는 순간 사라질 터였다.
저 말이 엄청난 협박처럼 느껴졌던 듯, 고양이가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그 고양이를 소파 위로 가볍게 집어 던진 카림이 다시금 내게 다가왔다.
“프리드린, 지금 궁금한 게 많을 거 같은데.”
…의외로 지금의 내게 필요한 말이 이어졌다.
“하나씩 물어봐 줄래?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할게.”
그래. 일단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자.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 난 신전에 있었다.
관례에 따라 이그드라실을 마주했고, 그리고…….
“저…….”
“응.”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이그드라실에 꽃이 피고…….”
앙상했던 나무에 초목이 돋더니 마침내 꽃을 피워냈다.
“이그드라실에, 꽃이…….”
괜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래도록 아팠던 내 손은, 그 어떤 것도 배울 기회가 없던 손은 마냥 창백했다.
마디가 도드라진 곳도 없었고, 흉터나 자그마한 점 하나 없이 마냥 매끈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손으로 이그드라실에 꽃을 피워냈다.
─내가.
“그래, 프리드린.”
카림은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친절하게도 속삭였다.
“일단 현실을 하나 알려줄까?”
“현실이라뇨?”
“혹시 신관이 날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해?”
아주 오글거리게, 신성하신 분이라고 불렀지.
여러 의미로 오한이 이는 소리였다. 고개를 떨어뜨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넌 앞으로 그것보다 더한 소리를 들을 거야.”
그 말에 경악한 나는 눈을 부릅떴다. 저 구역질 날 정도로 오글거리는 소리보다 더한 걸 듣는다고?
죽어도 사양하고 싶었다.
“제, 제가 왜요?”
“난 겨우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어쩌고지만 넌 이제부터 이그드라실 그 자체야. 즉 프레이르의 살아 있는 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