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지만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카림이 갑작스레 급사할지도 모르지.
이 일을 뭐라고 표현하면 될까.
이그드라실의 인가를 받는 것은 결혼식 청첩장을 날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려나.
청첩장을 받으면 그 두 사람이 당연하게도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부부가 될 것이라고 믿게 되지만, 정말 식장에 들어가서 부부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오래전에 한 번, 아미르(왕자)가 바람이 난 터에 이그드라실의 인가를 받은 여자가 버림받은 적이 있었다.
공식적인 아내로 인정은 받았지만 결혼식을 하지는 않았고, 왕실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전이었다. 당연하게도 바람 난 아미르는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고 떼를 썼다.
왕실의 체면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른 말리크였다면 아미르를 강제로 결혼시켰겠지만, 저 당시의 말리크는 자식을 무척이나 사랑해서 차마 아미르를 이겨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버림받은 여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켰다. 그렇게 모든 일은 없던 것이 되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전례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일까, 카림이 드물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건…… 네 말이 맞네.”
그에 힘입은 나는 신이 나서 덧붙였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카림을 이겨볼까.
“그리고 아직 계약서 덜 썼어요. 도장도 안 찍었잖아요.”
“그래서?”
“도장 찍기 전까지는 무효란 거죠! 어떤 계약서가 도장 찍기 전에 효력을 발휘해요?”
“아, 그래?”
카림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미소를 덧그렸다.
“있잖아, 프리드린.”
“네?”
“네 생각에는 저거 장작으로 쓰면 며칠이나 쓸 수 있을 거 같아?”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한 카림이 턱으로 이그드라실을 가리켰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데?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카림은 알아서 내뱉었다.
“일주일? 한 달? 아니, 한 달은 너무 오래가나?”
“……어디에서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당연히 왕궁이지.”
툭 대꾸한 카림은 곁눈질로 나무를 살폈다. 아마 크기를 재는 듯했다.
“이그드라실을 장작으로 쓸 만한 호사를 누릴 곳이 왕궁밖에 더 있나.”
“…….”
그러더니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나무를 올려다본다. 정말로 며칠 동안 쓸 수 있는 것인지 계산을 하는 모양이었다.
…난 점점 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보는 순간 위대한 세계수라는 생각만이 드는데, 태우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나오는 걸까. 연기는 무슨. 저,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옆에서 짙은 한숨을 내쉰 신관이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영애께서는 저를 따르십시오.”
“……네, 그렇게 할게요.”
내 영혼 없는 대답을 들은 신관은 호수로 다가갔다.
신관이 부드럽게 손짓을 하자, 안개 낀 호수 저편으로부터 작은 조각배가 하나 천천히 다가왔다.
신관과 함께 조각배에 몸을 실었다. 그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조각배는 부드럽게 짙은 물안개 사이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머잖아 끼익, 우람한 소리를 내며 조각배가 멈추었다. 신관이 먼저 배에서 내려 나를 부축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나무로 인도했다.
거대한 밑동 어딘가까지 나를 인도한 신관이 속삭였다.
“이쪽에 손을 대시면 됩니다.”
그 말을 따라 조용히 나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나무가 몸을 파르륵 떠는 것 같았다.
동시에 심장이 두근, 하고 세차게 진동했다.
이윽고 어디에선가 선명히 들려오는 목소리.
[누가 나를 찾았는가.]
위엄 있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갈색 나뭇가지 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소녀일까, 아니면 소년일까.
중성적인 외모였지만 보는 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고스란히 홀려버린 나는 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순간 카림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 네가 상상하는 모습 그대로. 네가 이그드라실을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면 정말 그 모습으로 널 반길 거고, 그냥 나무라고 생각했으면 나무가 말을 하는 기현상을 볼 수 있어.
나는 이그드라실을, 프레이르의 신을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해 왔던 걸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는 내가 평생 본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내가 생각한 미의 정점을 지닌 사람이었다.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데도 신비로운 도백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천천히 움직인 황금빛 시선이 나를 담았다.
그 순간 고운 그 눈이 찬연하게도 휘었다.
[드디어…….]
우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무 위에서 부드럽게 일어선 그 사람이 스르륵, 내게로 날아왔다. 허공에 둥둥 뜬 채 부드럽게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서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분명히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음에도 촉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존재가 나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기묘한 경험이었다.
[드디어 재회했도다.]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이 경건한 사람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 가능했을 뿐.
[지금까지 무사해서, 이렇게 나를 찾아와 줘서 무척이나 고맙구나. 사랑하는 내 후예여.]
이윽고 그 사람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내 자신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듯한 이상한 충격감이 밀려들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무형의 어떤 것이 눈앞에 이 사람에게로 흘러들어 가는 것만 같은 기괴한 느낌.
내 숨과 혼이, 의식이, 그렇게 내 자신조차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런 격통이 몰아닥쳤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내 안의 이름 모를 무언가가 격렬하게 터져버리자 세상이 눈부신 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진 나는 갑작스러운 일에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격통이 남아 있었다.
[자, 아이야.]
거칠게 물든 숨을 헐떡거리고 있을 때,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덧 자욱했던 물안개가 말끔하게 걷힌 채였다. 강렬한 햇살 틈바귀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이만, 각성의 시간이다.]
“라비아 영애?”
신관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홀린 듯 아름다운 사람을 따라,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나를 보며 눈부시게 미소 지은 그 사람이 이그드라실에 오른손을 얹었다.
누군가가 내게 깃든 것처럼, 나도 그 사람을 따라 이그드라실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리고 누가 알려준 적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피어나라.”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앙상했던 갈색 가지가 짙푸르게 우거졌다. 바람 한 점 없었지만 파스스, 저마다 몸을 부딪치며 새파란 나뭇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푸른 녹음 사이사이, 여린 초록빛 꽃눈이 맺혔다. 꽃눈은 서서히 도백색 꽃망울로 변해갔다.
아름답게 쏟아지는 하이얀 햇살 틈바귀로, 여리게 맺혀 있던 꽃망울이 화사하게도 피어났다. 순식간에 개화한, 아름답게 살랑거리는 꽃잎이 세상 가득 그윽한 화우를 흩뿌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목을 꺾은 나는 옷을 갈아입은 나무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 이그드라실에…….”
바로 옆에 있던 신관이 멍청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곧 풀썩, 하고.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잇지 못한 신관이 바닥에 무릎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신관은 경악 서린 눈으로 꽃이 핀 이그드라실과, 이그드라실에 붙어 있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 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넓은 호수 저편에서 사람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게 지금 무슨…….”
“이그드라실이 개화했어……!”
경악 어린 음성도 함께 들렸다.
말리크와 말리카,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그리고 수많은 신관들이 호수 저편에 있었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그드라실에 바짝 붙어 있는 나를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
꽃비가 아름답게도 흐트러지며 쏟아지고 있었다. 신관 중 하나가 파리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그드라실의 재림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오롯이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렸다. 누군가 세상을 천천히 되감은 듯 무척이나 느리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