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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17화 (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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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께서는 안 오셨나?”

“안타깝게도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말리크와 말리카께서만 안뜰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후.”

카림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을 끌고 있는 신관의 망토를 은근슬쩍 짓밟더니 꽤나 살벌하게 읊조렸다.

“오늘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 나오면 너부터 가만 안 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신전에서는 카림의 일이라면 항상 최선을 다합니다, 신성하신 분이시여.”

시, 신성하신 분이래.

너무도 거창하고 오글거려서 소름이 오싹 돋는 말이었다. 신성하신 분의 아내 어쩌고…… 라고 날 부르는 게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었다.

‘…그야말로 미친 소리지 않냐고!’

날 한 번이라도 저딴 식으로 부르면 절대로 신전에 오지 않을 테다.

그런 다짐을 하고 있을 적에도 발걸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느덧 신관이 말한 안뜰에 도달했다.

말리크와 말리카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애정을 나누고 있었다. 언제 봐도 참 다정하고 완벽한 한 쌍이었다.

이곳까지 온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무릎을 굽혔다.

“존모하는 말리크와 아름다운 말리카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요, 라비아 영주. 귀부인. 브렌델 귀부인도요. 어서 와요, 프리드린.”

우리의 인사에 대답한 이는 말리카였다. 말리카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카림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무척이나 기쁜 날이에요, 원대한 카림.”

“기쁘시다니요.”

“제가 선택한 사람이 카림의 마음에 들었다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겠나요?”

생글생글 웃는 말리카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말 무슨 말을 하든 다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얼굴이다.

하지만 카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카림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그 얼굴을 숨기듯, 그는 허리를 숙여 말리카의 하얗고 예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름다운 말리카의 기쁨이 곧 프레이르의 기쁨이죠. 제 작은 일로 말리카께서 이렇게 기뻐하시니 조금 더 일찍 큰 기쁨을 선물해드릴 걸 그랬습니다.”

“무슨 겸언을 그렇게 하세요. 지금이라도 선사해주셔서 감사할 뿐이랍니다.”

“미처 깨닫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전 말리카께서 제가 조금 더 이 시간을 즐기는 걸 바라고 계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크나큰 오해였군요.”

“아니에요. 카림께는 참 고마워요.”

말리카는 여전히 화사하게 웃는 낯이었다. 한 차례, 카림을 따뜻하게도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마침내 이렇게 저희의 품 안에서 안주하신다니. 이제 제가 안심해도 되겠지요?”

“물론이죠. 전 평생 형님의 신하로 남을 건데요.”

“녀석도 참.”

말리크가 비로소 입술을 열었다. 말리카만큼은 아니었지만 밝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참, 칼만 안 들었지 참 살벌한 현장이었다.

저번의 아침 식사가 생각났다.

그때는 내 생각만 하느라 바빠서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였지 않았을까.

“난 긴말 않겠다. 앞으로 영애께 잘하거라.”

“먼저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시지. 형님께는 그 말만 듣고 싶은데요. 어머님께서도 오시지 않으셨는데 형님마저 그러시니, 참 서운합니다.”

“어머님께서 간밤에 앓아누우셨다. 위독한 것은 아니라고 하니 걱정은 넣어 두거라.”

그 말에 카림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이제 나이가 많은 선대 말리카, 레브아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카림에게 치유의 힘이 있다고 한들 노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상 어떤 자식이, 부모가 앓아누웠다는데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카림이 남몰래 주먹을 꾹 움켜쥐는 듯했다.

“……제가 따로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내가 언제 그런 걸 가지고 뭐라고 했더냐?”

“그러면 두 분은 이그드라실을 현알하고 오시겠나요?”

말리카가 두 형제 사이에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라비아 영주와 부인께서는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의견을 나눌 게 많답니다.”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말리카.”

“우리 프리드린이 모자라서…… 걱정만 앞서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의상 하는 말에, 말리카는 또다시 두 눈을 반달로 접었다. 한 폭의 명화처럼 우아하고 교양이 넘쳤다.

“평소 라비아 영애의 자태가 참 단아하고 기품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라비아 귀부인께 배운 것이었군요. 부모님께서 이렇게 훌륭하신데 라비아 영애께서도 응당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지나친 겸양은 그쯤 하세요.”

“두 분께서는 이쪽으로 오십시오.”

신관은 또다시 나와 카림을 인도했다.

안뜰에 있는 아치형 문을 지나자 정원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물안개가 자욱하게 낀 채였다. 아마도 이그드라실이 있는 곳이겠지.

정원에 한 발자국을 디디고 나서야 바닥에 푸른 잔디가 가득 깔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이그드라실을 볼 수 있는 걸까.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릴 적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리카를 저대로 두실 겁니까?”

“글쎄.”

“카림.”

“나쁜 분은 아니잖아.”

물안개를 뚫고 흘끗, 나를 흘기는 시선이 느껴졌다.

…참 뼈가 있는 말이었다. 뒤끝도 있었다.

내가 뭐라고 반박하기 전 신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카림께서 말리카에게 완전히 굴복했다는 말이 나오잖습니까. 저희는 통탄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왜…….”

“야.”

카림이 제법 살벌하게 신관의 말을 끊었다.

“난 조용히 사는 게 일생일대의 원대한 꿈이야.”

“그게 가능한 위치가 아니십니다.”

“너희들만 가만히 있으면 돼. 너희가 말리카의 품속으로 들어가면 간단한 일 아닌가? 원래 말리카의 소유인 신전이 왜 자꾸 주제를 모르지?”

경고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너희들이 자꾸 난리를 치니까 나하고 형님 사이만 이상해지잖아. 너희들 때문에 내가 조용히 살 수가 없어요, 살 수가.”

“카림, 저희는 지극히 전통을 수호하며 따릅니다. 이그드라실의 유지만 없었다면 저희도 기꺼이 말리카를 섬길…….”

“시끄러워. 내가 싫다는데 왜 너희들이 먼저 나서서 지랄 법석이지? 그리고 너.”

왠지 모르게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네?”

“아니, 프리드린 너 말고.”

앞서 걸어가던 신관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문하십시오.”

“어머니 얘기, 알면서도 안 했지.”

잘만 떠들던 신관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에, 왕실에는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내가 이러니 너희들을 좋게 볼 수 없어. 가장 먼저 나한테 알려야 하는 일 아닌가?”

그 말은 옳았다. 신관은 빠르게 말을 받았다.

“바로 알리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레브아께서는…….”

“변명은 그쯤 해.”

카림은 이를 빠득빠득 갈며 덧붙였다.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거 알아? 한 번만 더 들쑤시면 이그드라실을 내 손으로 불살라버리는 수가 있어.”

“카, 카림이시여…….”

울상이 된 신관은 애타게도 카림을 불렀다.

…그건 나라고 해도 좀 경악할 소리였다.

세, 세계수를 불사르겠다니. 신을 죽이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나도 조심스럽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뭐가 그건 좀이야. 그깟 나무 쪼가리 태워버린다고 세상이 망할 것 같아?”

“그러면 안 망하나요?”

나름대로 정말 진지하게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내 진지함과 다르게 그는 툭 대꾸할 뿐이다.

“그건 모르겠네. 안 태워봐서.”

“…….”

“아, 그래. 이 기회에 한번 태워볼까?”

……저기요? 그렇게 실험용으로 아무렇게나 태워도 되는 겁니까? 그것도 세상의 멸망을 걸고요?

이 사람에게는 신앙심이라는 게 없는 걸까. 기막힌 내가 입술을 달싹거릴 적 그가 저 앞을 가리켰다.

“마침 저기 보이는데.”

그에 나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꺾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드넓은 호수였다. 바다처럼 고운 에메랄드빛 호수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땅이 있었다.

그 땅 위에 거목이라는 말로도 묘사가 불가능한, 정말 큰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나무는 이파리 하나 없이 가지만 앙상했다. 겨울날의 나무처럼 정말 볼품없었다.

그런데도 그 나무를 마주한 순간 언니의 말을 이해했다.

내가 오롯이 압도당하는 것만 같은 느낌.

이상한 경외감과 막연한 가슴 벅참. 아득히 우러러볼 수밖에 없으며, 기꺼이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경배해야 할 위대하고 원대한 태고의 무언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기분.

스르륵 카림을 돌아본 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저, 저런 걸 불사르겠다고요?”

“왜. 못 할 이유라도 있나?”

“카, 카림.”

“카림이 아니라 릴이라니까. 오늘이 지나면 꼬박꼬박 그렇게 불러야 할 텐데 지금부터 익숙해져 봐.”

너무나도 얄미운 속삭임이었다. 그래, 내가 공식적인 아내로 인정받기 전까지 몇 분 안 남았다. 이그드라실이 바로 코앞에 있으니까.

나로서는 당연히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결혼한 이후의 일을 말하는 거잖아요.”

“공식적인 아내로 인정을 받으면 결혼한 게 아닌가?”

“그건 사람들의 인식일 뿐이고요! 법적으로는 부부 아니거든요? 결혼식 하고 왕실 족보에 제 이름이 박히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막말로 알아주는 바람둥이인 카림이 다른 사람이 좋다고 홀라당 뛰어갈 수도 있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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