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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뚝뚝 떨어지는 발언에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니, 왜 이래. 형부가 품위유지비 안 줘?”
“얘는. 클리드가 넉넉하게 주긴 하지만 품위유지비는 많을수록 좋은 거야. 십만이라도 더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장신구가 달라진다고. 말리카 곁에서 일 년이나 있었으면서 아직도 이런 걸 모르니?”
“아리엘!”
근검절약이 인생의 신조인 아버지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 어머니는 언니와 아버지의 저런 모습이 새삼스럽지 않은지, 관자놀이를 짚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돌릴 뿐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잘 아는 언니는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대꾸했다.
“아버지도 참. 게르드의 유행을 따라가려면 한 달 오백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드레스 한 세트에 몇천은 가뿐하게도 호가한다고요.”
“분수에 맞게 하면 되잖아. 분수에 맞게!”
“이제 프리드린이 돈이 많게 될 텐데요? 품위유지비로 오천을 받는다면 몇천짜리 정도는 분수에 맞는 거죠. 말리카께서는 억을 넘게 쓰시는데. 게다가 유일한 카림의 성후인데, 어느 정도의 품위는 지켜야죠.”
언니의 반박에 아버지가 엄하게 한마디 했다.
“그게 다 혈세다.”
“그 혈세, 창고에 쌓아 두면 뭐 해요? 돈을 써야 시장이 굴러가서 가치라는 게 생기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사치를 부리는 건 안 돼.”
“저 정도가 무슨 사치라고 그러세요? 아버지께서 너무 검소하신 거라고요. 할아버지께서 더 주신다고 했는데도 아버지께서 마다하셨잖아요.”
언니의 새침한 대꾸가 이어졌다.
…그야 할아버지께서 주시는 돈을 아버지가 덥석 받았으면 백부님이 난리를 칠 게 뻔하잖아.
저건 가족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아마 할아버지와 백부님 사이에 혈투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둘 사이에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아버지도, 언니도 그만해.”
내 만류에 언니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자기편을 들어줄 것 같았나 보다.
하지만 호호, 저런 희망은 부숴 버려야 제맛이다.
“언니, 난 내 품위유지비를 나눌 생각 없어. 나도 이제 왕족인데 오천으로는 모자라지 않겠어? 언니 말대로 아름다운 말리카께서 억을 쓰신다면 말이야.”
언니가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애원하듯 나를 부르는 건 덤이었다.
“프리드린…….”
“대신 인심 썼다.”
“인심이라니?”
“내가 입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언니 줄게.”
옷 사이즈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아팠던 주제에 이상하게 발육이 좋았던 내 몸매는 굉장히 육감적이었지만 언니는 아주 빈약했다. 텅텅 남는 상의 덕에 옷이 부해 보이는 건 아닐까 몰라…… 하고 생각하고 있을 적이었다.
콩! 하고, 언니는 인정사정없이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눈앞에 별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아픈 머리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아얏! 왜 때려!”
“왜긴.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래, 나 빨래판이다! 근데 네가 뭐 보태준 거 있니!”
……언니는 귀신이었다.
내 생각을 어떻게 읽었담?
“그런 인심은 안 써도 돼! 그리고 설마하니 내가 정말 너한테 오백을 뜯어 가겠니!”
언니의 외침이 이어졌다. 물론 농담이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니가 나보다 몇 배는 현실적이라고 해도 내 품위유지비마저 가져갈 리는 없으니까. 언니의 말에 장단을 맞추느라 모르는 척 되물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당연하지. 오백이 뭐야, 적어도 천은 돼야 코에 붙이지.”
“…….”
할 말을 고스란히 상실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언니를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내 언니지만 참 남다르다.
* * *
마차는 달리고 달려서, 왕실 신전에 도착했다.
온통 하얀 신전은 정결함과 정적임의 극치였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게 간혹가다 들려오는 바람 소리마저 시끄럽다고 할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비아 영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정갈한 흰 신관복을 입은 신관이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그리고 신관 옆에, 성장을 하고 있는 카림이 있었다.
그는 황금빛 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의 껍데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생긴 건 정말 우아하니까. 그 모습이 나른한 한 마리 사자를 닮았다.
괜한 긴장에 침을 꿀꺽 삼킬 적, 나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가족들이 카림에게 인사를 건넸다.
“원대하신 카림을 뵙습니다.”
카림은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내게 다가와 잡으라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갈까?”
“저, 원대하신 카림이시여.”
그때 아버지가 카림에게 말을 붙였다. 카림이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예?”
“부디 프리드린을…… 잘 부탁드립니다.”
많은 것이 담긴 한마디였다.
카림은 상당히 복잡한 얼굴로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답이 입술을 비집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알던 그 멍멍이 카림이 맞나 싶은 진중함이었다. 멍청하게 카림을 올려다볼 적 그는, 나만 볼 수 있도록 슬그머니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제야 내가 아는 사람 같다.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적 아버지께서 말을 이었다.
“헌데 정말 오천이나…… 주실 생각이십니까?”
품위유지비 얘기가 내내 신경 쓰이셨던 모양이다.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 도리어 발목을 잡은 것 같다.
카림이 슬쩍 미간을 모았다. 조금 전의 진지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왜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너무 많습니다. 우리 프리드린이 그런 거액을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사치는…….”
“카림의 성후에게 그 정도는 아주 검소한 수준입니다. 오천이면 겨우 연회 한 번 참석할 정도죠.”
…겨우 연회 한 번에 오천이라니.
카림이 휙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내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왕족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는 지켜야 하지 않나?”
― 왕족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주시면 그걸로 만족할게요.
며칠 전, 내가 했던 말이 귀에 메아리쳤다.
…이 인간, 생각 외로 뒤끝이 있구나.
이어 카림이 다시금 자신의 팔을 툭 건드렸다. 내게 잡으라는 듯이.
“가자.”
“……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어간다는 게 실감이 났기 때문일까. 카림의 팔을 잡는 내 손끝이 떨려 왔다.
신관은 흡족한 얼굴로 카림과 나를 바라보다가 길을 인도했다. 가족들이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신관이 능숙하게 말을 붙여 왔다. 카림이 슬그머니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나와 바짝 붙어 있는 그의 팔이 경직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신관을 굉장히 싫어하는 모양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신전은 절대적으로 카림의 편일 텐데 노골적으로 꺼려 하는 모습이라니.
원래 신전은 대대로 말리카가 다스리는 곳이긴 했다. 생각해보면 말리카가 카림을 싫어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권력을 하나 빼앗긴 거니까.
“뭐가.”
“존경하는 카림께서 결혼이라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남의 집 귀한 딸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신 게 엊그제 같습니다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럼 내 다람쥐는 남의 집 귀한 딸이 아니라는 건가?”
……대체 저 말이 어쩌면 저렇게 해석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카림의 저런 모습이 익숙한 듯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시비조의 말에 신관이 펄쩍 뛰었다.
“원대하신 카림! 제가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니란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의도?”
이죽거린 카림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 없느냐? 이 대책 없이 무례한 놈을 당장 신전 밖으로 쫓아내지 않고 뭐 하고 있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펄쩍 뛰었던 주제에, 신관도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재깍 고개를 숙였다. 카림도 정말 쫓아낼 생각은 없던 듯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헌데 뭣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 돼.”
“다람쥐라니……. 그는 어떤 의미십니까?”
안 된다고 했는데 기어이 하고 만 질문이었다. 카림은 보란 듯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이 손을 한 대 때려, 말아?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적 신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람쥐라기에는…….”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내 다람쥐에게 다람쥐라고 하는데 불만 있어?”
“아, 아닙니다. 이 미천한 이그드라실의 종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관이 얌전히 꼬리를 말았다.
…그럴 법도 했다.
프레이르는 결국 건국 신화에 얽힌 세계수, 이그드라실을 섬기는 나라였다. 신관은 그 이그드라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이.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존재인 카림에게 껌뻑 죽는 건 당연했다.
아마 카림이 사실 이 세상은 둥글지 않고 사각형이야! 라고 해도 순순히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까. 카림의 말은 모든 것이 옳다고 외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