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로부터 딱 한 시간 후,
“미안하다고 했잖아.”
카림은 훌쩍훌쩍 울고 있는 나를 달래느라 바빴다.
흑흑, 지금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야?
생전 처음 타인에게 알몸 자랑을 했는데!
수치사 하기 직전이었다.
“흑, 엄마…….”
급기야 엄마를 찾으며 울어대는 나를 보며 카림이 기막힌 시선을 빛냈다.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게 엄마까지 찾을 일인가?”
“흐, 흐윽!”
“내, 내가 잘못했어.”
당연하게도 내 울음소리가 커지자 곧장 꼬리를 말았지만.
카림이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내가 사과하는데 안 받아줄 거야?”
…그게 미안한 사람의 태도니?
내게서 대꾸가 없자 카림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프리드린.”
“왜, 왜요, 훌쩍.”
“거기 원래 내 욕실이야.”
“그, 그럼, 끅, 하녀가 왜 저를 거기로 안내했는데요!”
“왜긴.”
그는 그윽한 목소리로 느끼하게도 속삭였다.
“같이 씻으라고?”
그 말에 내 언성이 올라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라고욧?”
“우리, 머잖아 부부가 될 사이잖아? 못 할 게 뭐 있어.”
…그런 거라면 결혼하자마자 하녀들을 당장 다 내쫓아 버릴 테다.
속으로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는데, 카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민망하고 부끄럽겠지만 좋은 구경 시켜준 건 너다? 거기서 벌떡 일어설 줄 누가 알았겠어.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것도 못 봤을 텐데.”
“흑, 으흑!”
그 말에 나는 더더욱 서럽게 오열했다.
남한테 어쩌다가 알몸을 보여준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니. 반박할 수 없다는 게 더 슬펐다.
그에 카림은 강아지 달래듯 속삭였다.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우, 울지 마. 응? 착하지.”
“제, 제가 무슨 강아지예요?”
“미친개의 아내면 똑같이 강아지지.”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발언이었다.
저건 자아비판일까, 아니면 날 욕하는 걸까.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계속 뚝뚝 떨어뜨리고 있을 적 달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쨌든 그만 울어. 뚝. 이그드라실도 우는 사람은 안 만나줘.”
…그 말에는 괜히 흠칫했다. 이그드라실도 우는 사람은 안 만나준다니.
순간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도 프레이르 사람인 이상, 이그드라실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요?”
“응?”
“이그드라실께서는 우는 사람은 안 만나줘요?”
“당연하지. 정령 주제에 소갈머리가 쁘띠 사이즈야. 조금만 제 눈에서 벗어나도 삐져서 저주를 내리지.”
…어딘지 모르게 맺힌 게 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저 말은, 단순히 신전에 모셔둔 세계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 즉 나무의 정령을 말하는 것이었지.
호기심이 생긴 나는 우는 것도 잊은 채 물었다.
“드리아스가 정말 있어요? 만나 본 적이 있으신 거고요?”
“응, 정말 있어. 만나도 봤고.”
“어떻게 생겼어요?”
“네가 상상하는 모습 그대로.”
성의 없는 대답에 나는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알려주기 싫으시면 그렇다고 하세요.”
“정말인데.”
“……네?”
“네가 이그드라실을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면 정말 그 모습으로 널 반길 거고, 그냥 나무라고 생각했으면 나무가 말을 하는 기현상을 볼 수 있어.”
그래서 상상한 모습 그대로라고 말한 거였구나.
수긍한 내가 슬그머니 고개를 주억거릴 적, 카림은 눈부시게 웃으며 속삭였다.
“예쁘다, 안 우니까.”
그 사소한 속삭임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언가에 홀린 듯 카림을 올려다볼 적, 그는 손수건을 내 코에 올리며 속삭였다.
“자, 킁도 하자.”
그 말을 따라 자연스럽게 코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 할 뻔했다.
스스로의 기막힌 행동을 인지한 나는 뒤늦게 볼멘소리를 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응? 코맹맹이 소리 내길래.”
“제가 애예요?”
“우는 아이 안 만나준다는 소리에 뚝 그친 거 보면?”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빨간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재생되는 이 이상한 노래는 뭐지.
“근데 굳이 따지자면 넌 다람쥐 같아.”
내 머리를 쓰다듬은 카림이 말을 이었다.
“그것도 겨울에 숨겨둔 먹이를 못 찾아서 헤매고 있는.”
저게 당최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 *
카림의 성부터 수도 게르드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난 것은 며칠간의 여정 끝에 게르드에 도착한 이후. 수도의 관문인 게르드 샨에서 왕실 신전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였다.
몇 달 만에 뵈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보고 그래.”
“걱정이 앞서서 그런다.”
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속삭였다. 곁에 나란히 앉아 계시던 어머니도 옷자락을 움켜쥐며 추임새를 넣었다.
“네가 결혼을 한다니, 그것도 카림과…….”
어머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이 가득한 두 눈이 따뜻하게 빛났다.
“카림의 위치가 어떤지 잘 알지? 위험천만한데……. 사실상 오늘 이그드라실을 현알하면 결혼식이고 뭐고 상관없이, 왕실의 식구로 공표되는 건데.”
눈빛만큼이나 걱정 가득한 중얼거림이었다.
전통이 있으니 그럴 터였다.
결혼식을 일 년 뒤에 하든 십 년 후에 하든 상관없었다. 카림과 함께 이그드라실을 만나보는 순간부터 나는 카림의 공식적인 아내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근데 그게 오늘이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직 결혼식 얘기는 해 보지도 못했는데!
아마 결혼식에 대해서는 내가 이그드라실을 마주하고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받은 후에, 부모님과 말리크가 상의해서 결정할 터였다. 내 의사는 전혀 들어가지 않고서.
어쨌든 간에. 몇 시간 후면 공식 별명 미친개의 공식적인 아내라고…….
내 생각을 읽은 듯 어머니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잘 살 수 있겠니?”
“리니, 정말 괜찮은 게냐.”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이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사실 카림이 결혼 안 해 주면 날 죽이겠다고 했다?
저렇게 죽을 수는 없잖아.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은 입 안에서만 까끌까끌하게 맴돌았다. 속으로 푹 한숨을 내쉰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셔?”
“좋아하시지. 소식을 듣자마자 눈물을 보이실 정도였다.”
“그럼 된 거지, 뭐. 내가 할아버지 걱정을 오죽 많이 시켰어?”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이나 아꼈다. 굉장히 특이한 이름도 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어주신 것이었다.
어머니가 날 가지셨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세상이 아마빛으로 물드는 꿈을 꾸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빌려주신 영지 이름과 합쳐서 나온 게 내 이름이었다. 정말 어딜 가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이름이다.
할아버지는 그렇게도 날 예뻐했다. 막내아들의 막내딸이니 더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그런 내가 오래도록 아팠으니, 할아버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어머니는 자식이 아프다는 이유 하나로 늘 죄인이었고.
…그래, 이런 걸 생각해보면 카림에게 코 꿰인 게 결단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카림이 몰고 다니는 소문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보다 더 좋은 혼처가 존재하지 않는 건 맞으니까.
나는 분위기를 가볍게 해보고자 최대한 밝은 어조로 속삭였다.
“있잖아, 아버지, 어머니. 카림께서 내 한 달 품위유지비로 오천을 준대.”
“오, 오천?”
그 말에 반응한 건 조용히 있던 언니였다. 언니는 곧장 내 옆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프리드린, 그거 혼자 다 쓸 수 있니?”
“당연하지.”
“매정해. 혼전 계약서 쓰라고 알려준 은혜를 잊지 마.”
“언니는 겨우 오백을 받으라면서.”
물론 오백도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리고 품위유지비가 오천이 될지, 육천이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사실, 품위유지비 덕에 게르드로 올라오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세 가족, 언니가 있을 때에는 네 가족의 일 년 생활비로 오천을 쓰셨다. 내게 저만큼 큰돈이 생긴다면 손이 떨려서 제대로 쓰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런 고로 굳이 오천이나 받을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으면 좋다지만 감당할 수 있는 선이란 게 있지 않겠나.
언니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오백만 내게 투자하렴. 그래도 사천오백이 남잖아?”